깨복쟁이들과 걷는 물소리길1코스

한 동네, 종친이기도 한 초딩동창인 C와 J와 내가 양수역사를 빠져나왔을 땐 정오가 지나서였다. 예정코스가 시골들녘과 산길이라서 아예 점심을 때우고 출발했음 싶었는데, 아침식사를 늦게 했으니 가다가 적당한 식당을 찾자는 두 친구들 의견을 좇아 물소리길1코스에 진입했다. 남한강에 꼬리를 담군 가정천뚝길을 걷는다.

양수리

나는 7년 전에 나 홀로, 또다시 3년 전엔 아내와 걸었던 코스이기도 했다. 양평시골의 하천 낀 들판과 야산을 넘는 1코스 막바지잔등에 몽양기념관이 있는데 나는 그냥 훑고 지나쳤었다. 그런데 C가 몽양 여운형 기념관을 간절히 가보고파 해 오늘 길라잡이 나선 셈이다. 해방전후 진보성향의 선지식인 몽양선생이 좌우합방 속에 독립정부를 꿈꾸다 극우청년의 총탄에 희생된 비극의 주인공쯤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양수리동막골

영하의 쌀쌀한 아침은 낮이 되면서 따스한 햇살을 가정천의 얼음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시골길을 걸으면서 반세기동안의 각자의 생활편린들을 양념으로 얘기꽃을 피우면서 시시덕거리느라 신명났다. 마음만 청춘인 섹스에 대한 향연은 초등시절의 애틋한 추억만큼 얘기꽃의 주제가 됐다. 깨복쟁이 친구 셋이 70노인이 되어 시골길을 한량걸음으로 유유하는 맛깔은 세월의 덧없음이 짙게 배여 웃음소리가 더 컸을 것 같다.

들판 저쪽에 양수리 성당첨탑이 보이고, 아내와 오디서리를 했던 에듀셀파독학기술학원 앞을 지나쳤다. 산세와 물길이 좋아 정창손을 비롯한 정승들이 줄곧 태어났다는 구정승골에 들었다. 그래선지 동네뒷산은 팔부능선까지 신흥주택이 들어섰다. 한음 이덕형행장비각 앞을 지나친다. 선생은 당파싸움의 폐해가 빚은 광해의 영창대군처형과 폐모론에 반대했다. 삭탈관직과 멸문지화 당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용진(龍津)귀양길 들었던 올곧은 선비였다.

한음 이덕형행장비각

목왕리 동막골에선 산골짝을 파고드는 산행이다. 잣나무군락 속에 귀한 비자나무 몇 그루가 겨울햇살을 좇느라 짙푸르다. 부용산과 청계산갈림길인 안부를 지나 샘골고개를 넘기까지 J는 그의 궁뎅이를 몇 번이나 숲가에 주저앉히며 궁시렁 댔는지 모른다. 코로나19에다 무릎수술을 앞둔 아내까지 방콕생활을 강요하는 통에 운동부족으로 힘 부쳐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어린애처럼 보챘다.

몽양생가

그러면서 왕년엔 등산마니아였다고 목청을 돋운다. J의 등산이란 게 음주 방가하는 재미에 빠졌다면서 말이다. 암튼 J가 동반하여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듯 내뱉는 자리라야 신명이 난다는 걸 나는 몇 차례의 경험에서 공감했다.  애주가인 J와 나는 금년겨울에 세 네 차례 술좌석에 동석했는데 나는 두 번이나 중도에 뺑소니쳤었다. 그래 힐난 할만도 한데 내색도 안 해 더 미안했다. 도량 넓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진정한 한량이다.

몽양생가길 거목엔 정초부의 넋이 비들기가 되고

C의 말따나 오늘 보약(산행)맛 뵈줬으니 낼 부턴 J는 걷기운동 열심히 해야 함이다. 물소리길 찾는 산님이 많은지 산길도 반질반질하다. 몽양기념관입장에 앞서 시장기 때우려 식당엘 갔다. 매운탕에 소주를 곁들었는데 배고파선지 매운탕맛이 괜찮았다. 점심을 오후4시 넘겨서 먹는 셈이다. J는 소주잔을 붙들고는 C와 나더러 몽양기념관엘 갔다 오란다.

소주잔에 J를 맡겨놓고 우린 몽양기념관을 찾아들었다. 근데 오늘 매표시간(오후5;00)이 끝나 입장을 할 수가 없단다. C가 벼르고 벼른 몽양기념관 탐방은 바깥풍경을 한 바퀴 돌아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신원리 태생으로 한문수업을 하다 10대에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몽양기념관 지상관

그렇게 신학문에 접하여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체 조건, 말 솜씨, 글씨 쓰기, 판단력)을 갖춘 훌륭한 사람이됐다. 그는 부유한 명문 집안출신에 명석한 두뇌로 교육을 받아 진보적 학문을 일찍이 깨쳤으며, 한학과 영어를 터득했다. 영어회화와 웅변에 뛰어났으며 수려한 외모에 세련된 멋쟁이로 기지와 제스처에도 능란하고 인정미도 남달랐다.

21세에 부친이 별세하여 부를 상속을 받았는데, 빚 받을 문서와 노비관계의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종들을 모두 불러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다”라고 일갈하고 각기 살길을 마련해 주었으며, 혼인하지 않은 종들은 짝을 맺어 주었다. 평생 농민과 노동자를 사랑하고 집 사랑채에 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에 힘썼다.

몽양선생기념관터는 옛 광동학교터였다

1914년 중국에 간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외교위원을 맡다가 이견차이로 임시정부입각을 거절하고 상해교민단장의 일을 보았다. 일제말기 3년간 투옥생활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뒤,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몽양기념공원에서의 C

해방격동기 몽양은 건국동맹을 모태로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위원장을 맡고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앉혔다.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정부 실현에 앞장서고 1947년 5월엔 좌우합작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지원하던 중 여운형은 극우청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졌다. 선생을 진보 이상주의자라 일컬을 만했다.

몽양선생친필과 송원선생송덕비

C가 몽양선생을 흠모하게 된 동기는 해방 후 강씨문중(姜氏門中)의 침체기가 선생의 죽음과 연관 되어서였다. 나는 그런 깊숙한 사연은 몰랐는데 C의 강문에 대한 애정에 숙연해졌다. 암튼 격동기해방과 6.25란 암울한 시대에 촉망받는 인재들을 많이 잃은 건 수은강항(睡隱姜沆)의 후예들에게 비운이었다. 밝아 보이지 않은 C의 표정을 몽양기념공원에 사진으로 담아봤다.

묘골애오와공원부조 앞의 C

선생의 생가를 오가는 부용산길을 노비시인 정초부(鄭樵夫)가 시를 읊으며 나무를 하러 다녔다. 정(鄭)씨네 노비 나무꾼[樵夫]은 주인의 책 읽는 소리를 귀동냥하여 글을 깨우치고 시를 지어 산길을 걸으며 읊었던 것이다. '서당개 십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그 여운형생가 부용산길[어록길]을 빠져나와 신원역에서 서울행열차에 올랐다. C는 언젠가 다시 선생의 기념관탐방을 약조하면서~!                              2021. 02. 19

부용산

# 양수역 -가정천 - 한음 이덕형 신도비 -여기소 - 부용산과 형제봉사이 골짝 -신원리약고마을 - 몽양 여운형 생가 - 몽양 선생 어록길 - 신원역(1코스 9.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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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 가정천이 발 담구는 남한강
몽양(사진)과 묘골공원부조석
부용산골짝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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