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길- 문화유적 길
우측부터 찻길, 자전거길, 물소리길이~
오전10시를 넘겨 양수역에 내렸다. 아내가 뜬금없이 시골길을 걷고 싶다고 꼬드겨 나선 발길이었다. 4년 전 이맘때 논두렁, 밭두렁, 냇길과 산길, 글고 기찻길과 자전거길 사이를 들락날락 걸었던 ‘양평물소리길’이 떠올랐던 거였다. 눈부신5월 햇살이 초록이파리에 부셔진다.
남한강에 발목 담근 가정천길목에 들어서는데 일단의 바이커들이 휙휙 지나친다. 날렵한 젊음이 싱그러운 초록들판 속으로 사라진다. 남한강변의자전거전용도로는 바이커들에겐 꿈길(?)일 게다. 논과 밭, 강과 산 사이를 질주하노라면 철도와 터널이 교차해서 달려왔다 사라진다. 그 길목엔 적당히 쉼터가 있어 자전거전용도로 최적이어서 말이다.
아낸 자전거를 못 탄다. 겁이 많아 아예 배울 생각조차 안했다. 커플바이커들이 질주하는 걸 보면 나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아내와 나는 안 맞는 것도 많지만 용케도 고래심줄 같은 부부의 끈은 놓질 않고 있다. 용담교를 지나 가정천변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내가 호들갑을 떨었다. 뽕나무 아니 오디나무에 검붉은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어서였다.
갓길 것은 이미 손이 탔고 씨알도 작지만 우린 가지를 움켜 잡아당기며 시합하듯 따먹는다. 달다름한 맛은 맨 처음 두서너 개를 입안에 넣었을 때다. 어쩜 그 맛보단 시골길에서 오디를 따 먹는다는 생소한 기분이, 그것도 도둑질 하듯 후딱 헤치고 내숭떨어야 한다는 알싸한 흥분이 좋다. 그런 야릇한 흥분은 까마득한 옛적 초등시절의 추억을 꺼내 씹는 달다면 더 단 거였다.
물가수초사이에 허수아비처럼 서서 모가지 빼들고 송사리동정을 살피는 두루미의 정중동은 5월이 자랑하는 그림이다. 그 그림에 훼방꾼노릇도 울`부부를 신나게 한다. 하지만 능청맞게시리 놈들은 눈길도 안주고 살짝 자릴 옮겨 물가에서 한쪽 발을 들곤 모가지를 길게 빼는 거였다. 우릴 약 올리기라도 하듯~.
놈이 거느리고 있는 여백은 풋풋한 자연의 충만(充滿)이라. 모심기를 끝낸 무논은 태양을 안아 수온을 높이느라 탁해졌다. 거기 논두렁에도 두루미가 망을 보고 있다. 늦둥이 애기똥풀 한 무더기가 노랑똥꽃을 피우며 바람에 소식을 띄우고 있다. 벌`나비 어느 놈이 재수 좋아 이 소식을 접할 텐가? 허나 애기똥꽃은 수정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냇가 언덕에서 쥐똥나무군락이 고혹(蠱惑)스런 향기를 들판에 뿌려대고 있어서다. 꽃은 작을수록 향기가 짙다. 작은 꽃일수록 모듬 피워 짙은 향으로 촉매쟁일 초대할 수가 있기에 쥐똥나무는 사력을 다하고 있어서다. 우린 쥐똥나무를 잡아끌어다 냄새를 맡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고혹의 향기가 오장육부를 뒤집는다.
부용리야산까지 헐고 별장촌이 들어섰다
쥐똥나무는 가지를 찢어지게 붙들고 있는 아내를 싸가지 없는 짐승이라고 욕바가지로 할 테지만 말이다. 씨알은 작지만 오디나무는 간간히 나타나 울`부부입술에 벨벳`루즈로 남는다. 비상에듀양평의 어느 기숙학원입구의 씨알 굵은 오디나무는 울`부부를 뿌듯하게 해줬다. 오디를 날것 그대로 나무에서 몇 주먹 따먹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낮의 따가운 햇살 속을 한 시간쯤 어슬렁댄 것도 오디 따먹는 재미였다. 부용교를 건너 산자락에 들어서니 한음(李德馨)선생의 행장비각이 나타났다. 오후 1시였다. 행장비각 옆 벤치에 배낭을 풀고 끼니를 때운다. 식빵에 토마토와 쨈을 넣어 커피를 곁들이다말고 아내가 탄식(?)을 했다.
한음 이덕형선생 행장비각
계란후라이를 잊었단다. 허나 그건 푸념일 뿐이었다. 전원풍경에 취하는 오붓한 우리만의 점심자린 최상의 레시피였으니까. 앙증맞은 구름다리 너머로 산비탈을 깎아 조성한 별장촌은 기이할 정도였다. 오직 골짝의 맑고 청정한 산수 땜에 가파른 산비탈에 집을 짓다니? 멍멍이를 끌고 나온 두 여자한테서 해답을 찾았다.
산수도 좋지만 구정승골(아홉 분의 정승이 나온 곳)명당 터인데다 양수역까진 자동차로 10분 거리고, 넓은 주차장은 무료주차라서 큰 불편이 없단다. 하드래도 가정천과 샘골에 느라비 선 별장은 여유있는 부자들 얘기라고 치부하고 싶다. 천재소년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일찍 급제했던 선생은 승승장구 요직을 거치면서 결코 정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올곧고 완고한 선비였다.
가정천, 폐비닐 등 일회용품 쓰레기가 곳곳에 방치 돼 눈쌀 찌푸리게 했다
다섯 살 연상이면서도 단짝이었던 오성(李恒福)선생과의 수많은 일화는 누구나 한두 개는 알고 있을 테다. 어느 날 두 개구쟁이는 둥지의 새를 갖고 놀다 죽자 무덤을 만들고 ‘새에 바치는 재문’을 썼었다. “짐승이 죽었다고 사람이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나, 너는 우리 땜에 죽었기에 죽음을 슬퍼한다”라고.
말끔히 단장한 물소리길
두 소년의 생명존중사상은 광해군시절 이이첨의 사주로 영창대군처형과 폐모론이 대세로 굳어지자 선생이 이를 극력 반대했던 데에서도 읽힌다. 당쟁이 극에 달해 영창대군을 옹호하면 멸문지화를 당할 판에 소신을 굽히지 않자 광해는 선생을 삭탈관직 시켜 용진(龍津)으로 보내고 영창대군도 강화도로 귀양보냈다.
한음선생사당
선생은 용진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줄차게 올리며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 앞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으로 질주해오던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를 만나 담판하러 적진에 단신으로 달려갔으나 고니시가 나타나질 안해 돌아서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한음선생묘역
선조가 평양으로 피신하고 왜군이 대동강에 이르자 다시 겐소를 찾아가 회담`항의 하는 대담한 선비였다. 그러나 왜적이 물러갈 기미가 없자 오성과 함께 명나라에 건너가 구원병을 요청하여 조명연합군을 편성 평양탈환에 이어 한양수복에 으르게 하는 외교를 펼쳤다.
그 후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명`제독 유정을 설득 같이 남하 통제사이순신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했다. 사람은 난놈, 든놈, 된놈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난놈은 출세(?)를 위해 거짓, 모함, 폄훼와 편 가르기를 밥 먹듯 하는 요즘의 막말정치인들인가 싶고, 든놈은 시류에 아부하여 양지를 쫓는 줏대 없는 사이비지식인일 것 같다.
된놈은 소신이 바르고 명예와 대의를 삶의 지표로 삼는 참된 지식인으로 오성과 한음 같은 분들일 것이다. 물소리-문화유적길은 우리한테 난놈과 든놈과 된놈을 생각케 하는 스토리텔링의 산책길이라. 부용산자락을 내닫는 물소리산길구간이 상당한데 지자체에서 재초를 말끔히 해놓은 통에 숲길 걷기가 한층 상쾌하다.
샘골고개를 넘으면 신원리인데 여기도 전원주택들이 많이 들어섰다. 몽양`여운형선생생가를 훑고 신원역사에 닿았을 때가 오후3시를 넘어서였다. 운길산역에서 어느 노익장께서 승차 동승했다. 다산선생유적지를 둘러보고 오신다며 담에 동부인해서 오겠단다. 목민심서에 심취했다는 여든한 살이신 노익장은 나를 감동케 했다.
그분은 짬만 나면 스토리가 있는 둘레길 찾아 걷는 재미로 일정을 짠다고 하셨다. 그렇게 공부도 하고 건강도 챙긴단다. 대단하신 분이셨다. 왕십리에서 20여 년간 횟집을 운영했었는데 최저임금과 시간외 수당 등으로 적자가 쌓여 가게를 접었노라고 자영업의 애로를 실토하셨다.
경제가 어려운 건 정부가 넘 과욕부리는 탓일 것 같다고-. 글면서 허튼소리만 내지르고 일터(국회)를 팽개친 ‘난놈’들을 지탄하시는 거였다. 유들유들한 막말꾼 - 난놈들은 절대 뽑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왕십리에서 그분은 내렸지만 내 맘 속에선 언제쯤 내리실지 모르겠다. 암쪼록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2019. 06. 02
* <양평 물소리 길 낙수>종주편'을 아래 블로그주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epuppy.tistory.com/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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