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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금개구리를 찾아라' - 영축산 암자기행

'금개구리를 찾아라' - 영축산 암자기행

 

자장암입구

 

닷새 만에 영축산통도사를 찾는다. 낼 상경해야하는데 그냥 떠나기엔 발걸음과 마음길이 찌뿌드드해서다.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를 뻑적지근하게 걸으며 송림불토(松林佛土)의 향기에 허벌나게 멱 감으면서도 다시 와야겠다는 미련은 오히려 봄물 오르듯 했다.

무풍한송로

 

내 언제 통도사의 멋들어진 무풍한송들을 다시 만날지를, 그들과 같이 호흡할지를 모르겠기에 간단한 요깃거릴 싸들고 행장(行狀)에 나섰다. 전철-택시-시내버스를 좇아 세 시간을 허둥대서야 무풍한송로산문(山門)에 들었다. 일욜이어선지 송림불토에 어슬렁대는 사람들도 많다.

 

내 허벅지만한 놈부터 내 몸뚱이보다 더 큰 놈까지 잘도 어우른 적송(赤松)들이 추는 공생의 춤사위에 나는 미쳐버린다. 한 줌의 햇살로 숨 쉬며 한 치의 공간을 공유하면서 파란하늘을 향하는 놈들의 삶의 지혜는 부처(). 때론 서로 기대고 보듬으며 한 몸이 되기도 한 놈들의 일생은 보살이다. 하여 그들은 몇 백 년을 거뜬히 산다.

남생이 갑골로 단장한 적송은 사슴뿔까지 달고 멋을 냈다

 

내가 살기위해 상대를 짓누르고 억압하며 독불 생존하려는 우리들보다 달관된 생을 살고 있는 소나무들한테 미쳐버리는 순간 발걸음은 일주문에 닿았다.

세상에 이런 호사스런 행차는 좀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새모래로 잘 다져진 무풍한송로는 발바닥말초신경을 맛사지하는 살아 숨쉬는 길이다.

 

 

게다가 요철 한 군데 없어 눈 감고 오감을 열어재치고 나를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오늘은 송림불토를 헤집으며 고즈넉이 숨 쉬고 있을 산사의 풍정에도 취하고 싶어 들썩이는 궁뎅이를 달래는 산행인 것이다. 성보박물관 앞의 일란성쌍둥이 귀목은 떨어져선 외로워 못살 것 같았던지 연리목이 되어 노쇠한 몸뚱일 서로 지탱하고 있다.

성보박물관 앞 귀목의 사랑

 

귀목의 스킨십이 부러웠던지 삼성반월교 건너 외로운 적송도 몇 차례나 보듬어 에로틱한 사랑의 유희를 과시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천왕문옆 가람각(伽藍閣)을 기웃댄다. 통도가람을 수호하는 가람신을 뫼신 조그만 사당인데 통도사12법당 중 젤 작다.

가람각(우측)

 

가람신은 우리의 전통토속신앙인 땅의 신을 의미하며 성황당에 뫼시기에 일반사찰엔 없는 독특한 전각인가 싶다. 부처도 전래토속신앙과의 궁합 맞추기를 외면하지 않은 걸 보면 신앙의 문도 역시 불이문인 것이다. 불교의 위대함인 것이다. 범종루 뒤 만세루 옆의 목조수통(木造水桶)2쌍도 눈길을 끌었다.

목조수통

 

대가람 통도가 구름처럼 밀려드는 불자들의 해갈을 위해선 거대한 수통 몇 개론 어림반푼어치도 없었을 테다.

영산전벽화(靈山殿壁畵)52점은 보전이 양호해 윤곽이 또렷하지만 외벽의 벽화는 오랜 풍화(風火)로 훼손이 심해 아쉽다. 내부벽화는 석가모니불과 고승들의 행적을 그림이라.

 

 

소의 경전과 예술성, 종교성, 시대성 등을 반영하는 18세기대표탱화란다. 영각(影閣)앞의 370여살 먹은 자장매화가 힘이 부치는지 살랑바람에 꽃잎을 날린다. 아니다, `나라에 젤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 노릇하느라 설중매(雪中梅)를 자임한 탓일 것이다. 하여 오늘도 찍사들의 마음과 눈길을 붙잡아 어수선하다.

 

자장매화

 

임란 후 사찰을 중창한 우운대사는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축조하고 1643년에야 소실된 역대조사의 진영을 모신 영각을 세웠다. 상량식을 끝냈을 때 마당에 기이하게 매화 한 나무가 절로 자라더니 매년 섣달 납월에 분홍꽃을 피웠단다. 이 매화를 불자들이 통도사 창건주인 자장율사의 가피라 여겨 자장매화(慈藏梅花)라고 하였다.

 

 

설중매는 구도자의 모습과 자장스님의 지계정신을 발현한다고 여겼던 게다. 1749년 용암대사가 지었다는 관음전과 원통방을 일별하며 대웅전을 향한다.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관음전벽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있고 기둥 없는 넓은 공간은 특이했다. 나는 짝사랑에 얽힌 전설의 두 개의 핏빛바위-호혈석(虎血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응진전(應眞殿) 옆과 극락전(極樂殿)북쪽에 있는 호압석(虎壓石)이라고도 하는 붉은 바위다. 백운암에 젊고 준수한 스님이 강백(講伯, 스님에게 불교 경전을 가르치는 스님)이 되려고 수행 중이었다. 어느 날 산나물을 채취하다 길을 잃은 아랫마을 아가씨가 갑작스런 폭풍우에 백운암으로 피신하게 됐었다. 인기척에 스님이 문을 열었다.

핏물이 선연한 호압석

 

스님은 단칸방 아랫목을 비 젖은 아가씨에게 내준다. 폭우는 밤새 쏟아졌다. 비 그친 담날 귀가한 아가씨는 밤새도록 경전을 외던 스님의 모습에 반해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사연을 알아챈 아가씨부모가 스님을 찾아가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며 딸과 혼인해 주길 애원했다.

이팝,개나리,진달래가 영산회상을 치장했다

 

스님은 완강히 거절하여 강백이 됐지만 한을 품은 아가씨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강백이 된 스님이 청중들한테 첫 강의를 하는 날 홀연히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렁댄다. 기겁한 청중들이 설왕설래, 호랑이를 달래려면 스님 한 분이 나서서 가사를 벗어던져 호랑이를 달래야 한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호식(虎食)이 되라는 거였다. 할 수 없이 스님들은 가사를 벗어던지자 호랑이가 강백스님의 가사를 물고 으르렁댄다. 기꺼이 희생양이 되기로 한 강백스님이 마당으로 나가자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스님을 낚아채 영축산정상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사람들이 스님을 찾으려 온 산을 수색한 끝에 백운암 아래 바위에서 스님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 피 묻은 바위를 통도사경내에 두면 호환을 예방할 수 있다 해서 핏빛바위 두 개를 안치했단다. 이뤄질 수 없는 처녀의 짝사랑의 비련이 호혈석으로 남아 통도사의 전설 한 토막으로 회자됨이라. 중생이나 스님이나 집착은 화근의 단초임을 호혈석을 말하나 싶었고, 아까 통과한 불이문을 다시 되돌아보게 했다.

점심시간 공양간은 만원사례

 

일로향각 뒤 공양간은 난장판을 벌렸다. 점심공양을 받으러 밀려든 인파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흡사 용트림 같다. 절밥이 맛있는가? 옷깃을 스쳐도 전생에 몇 백겁의 인연이란 데 밥을 같이 먹는 인연이란 대단함 아니겠나! 모두들 식도락에 빠지며 소중한 인연 맺기 위한 고차원행위일 테다.

안양암

 

다릴 건너 안양암(安養庵)을 향한다. 얕은 언덕빼기의 잘 생긴 귀목이 발길을 붙든다. 아미타불을 모신 암자의 불전은 북극전(北極殿) 내지 보상암(寶相庵)이라고도 한단다. 불전은 안양동대(安養東臺)에 있는데 통도사 8경중의 하나다. 

 

제석천과 위태천을 여러 신중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그린 불화<안양암 함풍11년명 신중도>가 유명한데 비단에 채색한  1861년도 작품이란. 수도암(修道庵)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구부정한 소나무들이 코발트하늘에 그림으로 탄생한다. 자연은 시시때때에 걸맞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수도암

 

통도사의 암자들은 어지간한 사찰규모 못잖단다. 무려 열아홉 개의 암자가 영축산총림을 이뤘다니 그 멋들어진 산사들을 기웃거리는데 며칠이 걸릴까? 산잔등에 올라서니 영축산 바위능선과 하늘이 땅따먹기 하며 애간장 태우느라 푸르뎅뎅하다. 벚꽃 터트린 수도암은 인적이 없다.

 

암자의 벚꽃도 충매쟁이가 없다. 젤 작은 암자여선지 호젓하기 그지없다. 남새밭엔 웃자란 시금치가 모두 고갤 떨어뜨리고 있다. 시금치의 꿈은 누군가의 입맛을 호강시켜주는 것일 진데 주인장은 선에 들었는지 그의 꿈을 무참하게 외면해 버렸다. 시금치가 처연하다.

서운암의 장독대

 

구릉을 내려서니 반들반들한 항아리의 요람인 서운암이라. 저 수 많은 배불뚝이 항아리 속엔 뭐가 들어있을까? 간장, 된장, 장아찌 등이 맛의 궁극을 향해 숙성을 하고 있는 걸까? 암자가 많으니 별의 별 암자도 있다. 맛의 원조에 야생화도 향을 더하려 함인지 주위는 온통 산괴불주머니천지다.

 

며칠 후면 항아리들은 산괴불주머니꽃수레를 타고 그윽한 향을 갈무리 할 것이다. 언덕빼기의 장경각을 향하자 흰 공작 한쌍이 자웅을 맞대고 춘정을 구가한다. 놈들은 인간의 비뚤어진 사랑에 본성을 잃고 자유까지 잊어버렸다. 길들여진 건 자연스럽지가 않아 썩 이쁘지가 않다. 어째 놈들이 측은해 보인다.

장경각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인가부다. 장경각은 팔만대장경을 도기에 써서 구운 장경고다. 팔만대장경이 소실 될 경우르 대비한 역사(役事)치곤 낭비다 싶게 어마어마하다. 하긴 자기에 한 글자씩 쓰고 굽는 과정이 구도와 수행의 길일 테니 그 지난한 작업이 선정이었지 싶었다. 장경각의 대장경판고 미로(迷路)를 걷는 자체 만으로도 행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경고의 도자기장경판

 

장경각의 기둥 주춧돌은 애초에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사용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참 대단한 불사였다. 장경각 넓은 마당은 탐방객들의 휴게처다. 마당에서 조망하는 영축산의 원경은 한 폭의 병풍이 된다. 서운암에서 장경각에 이르는 넓은 구릉에 산괴불주머니가 초롱초롱 꽃봉우릴 달면 일대는 장관일 것이다.

대장경각에서 조망한 본사방향의 골,

 

사명암은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암자다. 연못에서 솟은 듯한 일성대와 또 하나의 멋들어진 정자인 무작정(無作停)이 있는데 등산객들이 하루 전세(?)들었나 떠들석하다. 매화향이 흩날리고 자색모란이 꽃수술을 터트리려는 찰나에 연분홍이 환하게 유혹하니 산님들이 싱숭생숭한 맘 겉잡을 수 없지 싶었다.

사명암

 

거대한 귀목이 코발트휘장을 두르고 중천하는가 하면 전나무는 벼락을 맞아 앙상한 모습으로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 골에 다락논 몇 마지기가 길을 내어 암자 하나를 앉혔다. 소나무가 양 옆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그 안에 순 우리말 이름 '큰 빛의 집'이란 법당이 있는 옥련암(玉蓮庵)이 자리했.

옥련암

 

대광전, 또는 대광명전을 뜻하는 암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단다. 옥련암에 있었다는 장군수(將軍水)라는 우물을 먹으면 기력이 왕성해져 옥련암승려들 힘이 장사였다. 하여 본사 승려들이 질시하여 그 우물을 메워버렸단다. 승려들의 속물근성도 성불하기 전까진 시정잡배나 한속인 셈이다.

백련암의 은행나무

 

400백살 넘었을 은행나무가 유명한 백련암에 들어섰다. 1374(공민왕 23) 창건했다는 백련암은 260여년 후 1634(인조 12)에 현암스님에 의하여 중건하여 선방으로 거듭나서 백련정사(白蓮精舍)라고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원(禪院)으로 유명 선승들치고 여기서 선정들지 않은 이 없을 만큼 선풍(禪風)를 날렸단다. 

영각과 귀목

 

경허, 만해, 운봉, 구산 등 큰 스님들이 수행한 곳이라니 대단한 도량이다. 흰 천의 깃발이 대웅전 앞 마당에 열병처럼 늘어선 서축암(西鷲庵)은 법성계를 쓴 천을 한 깃발씩 읽으며 무량수전으로 오라는 듯 싶었다. 잔디마당에 다보탑과 석등이 있고 넓고 평평한 경내는 잘 다듬어진 오엽송을 비롯한 정원수가 멋들어지게 운치를 더한다.

 서축암

 

이 정갈한 서축암이 한때 굴지의 아파트건설업체인 성원건설 회장이 창건`희사한 거란다. 회장네 가족은 독실한 불자였다. 그래 여러군데에 큰 불사를 많이 했는데 그 중에 통도사 서축암은 성원건설이 지은 대표적인 절이란다. 그 성원건설이 IMF때 부도가 나서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서축암다보탑과 약수, 정원수가 빼어났다

 

부처님 생존시 수닷타라는 장자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주는 선행을 많이 하여 급고독(給孤獨)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독지가였다. 급고독이 불경에 귀의 기원정사를 지어 희사하자 부처님은 25안거를 여기서 머물며 설법도 했었다.

 

허나 급고독도 불행이 겹쳐 지난한 세월을 보내다 다시 일어서 영상회상에서 열락하게 되었는데, 불현듯 성원건설회장이 오버랩 되는 거였다. 석가모니불이 주불로 모신 금수암(金水庵)은 수행도량이어선지 철문이 닫혀있다. 인적 없는 경내에 법당과 팔각정자와 석탑, 석등 등이 배치되어 있다. 잘 가꾼 조경수들이 암자에 스님이 있음을 일깨운다.

 

금수암

 

자장암(慈藏庵)을 찾는다. 물길이 바윌 씻어내길 수 억겁인 깊은 계곡에 소나무의 포퍼먼스가 기차다. 좁다란계단이 소나무사일 뚫고 가파르게 오르다가 뜬금없는 원통돌문을 내세워 고개를 숙여 경건심을 일깨운다. 글곤 다시 석문을 만들어 비로서 자장암에 들어서게 했다. 암자치곤 껄세가 심상찮다.   

 

자장암의 석통문

 

경내에 들어서니 거대한 단애가 다가서는 데 선이 뚜렷한 마애불이다. 높이가 4m쯤 된단다. 난 적잖이 놀랬다. 여태 통도사마애불 얘길 듣지 못해서다. 우리나라 으뜸 가람인 통도사자장암의 이 거대한 마애불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은 건 조성된지가 일천해서일 것이다. 1896년 조성기록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자장암경내 입구 석문

 

통도사 가람내의 유일한 마애불은 법당과 자장전 사이에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는 통도사를 짓기 전에 여기 단애(斷崖)아래에서 수도했었다. 자장율사가 수행을 하면서 사찰을 창건했는데 소실, 그 후 회봉(檜峰)스님이 중건하였고, 1870(고종 7)에 한 차례 더 중수를 했다. 1963년에 용복(龍福)스님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영축산능선이 자장암의 병풍이 된다

 

자장암이 유명한 건 또 있다. 법당 뒤의 단애에 금개구리가 살고 있다는 설화다. 그 단애 밑 암벽에서 청정 석간수(石間水)가 솟아나오고 그 위엔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작은 바위구멍이 있다. 석간수는 자장율사의 식수인데 개구리 두 마리가 자꾸 그 물을 흐려놓았다.

석벽에 금개구리가 은신한 구멍이 있다(관세음의 '음'자와 동선상에~)

 

심사가 꼬인 스님이 바위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개구리를 들어가게 하였단다. 지금도 그 구멍에 살고 있는 개구리 한 쌍은 몸색깔이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때론 벌`나비로 변신하기도 한다. 이 신통한 개구리가 불자들의 관심을 끌 것은 명확관화, 입소문은 금개구리를 보러오는 신도들로 야단법석이 났다.

 

마애불

 

근디 이 개구리는 좀채 구멍에서 나오지도, 그래 산문(山門)밖을 나가지 않는단다. 중간에 어떤 불한당이 며칠을 망보다가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고 봉한 다음 사타구니 불나게 달아났다. 한참을 뛰다 궁금해 손에 든 봉함을 열어 보니 흔적도 없잖은가? 지 불알 안 떨어진 것 만으로도 행운이었다.

 

금개구리 은신처인 석벽들

 

기상천외의 금개구리설화는 오늘도 많은 참배객들이 와서 보살개구리라면서 친견(親見)하고자 한단다. 하지만 석벽구멍속의 개구리를 보는 사람도 있고, 못 보는 사람도 있어서 불심(佛心)의 경중을 시험하는 금개구리로 불리고 있단다. 이젠 석벽구멍에 사람의 접근을 막고, 사진촬영도 금하고 있다. 

 

자장암전경

 

사람의 접근이 성가셔 금개구리가 영영 두문불출할까 노심초사한 자장암의 비상수단이 내려진 거였다. 자장암은 523칸의 건물에 법당은 4칸의 조그마한 인법당(因法堂)이며, 법당 왼쪽에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자장전(慈藏殿)과 독성각(獨聖閣)이 있고, 법당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있으며, 암자 입구 쪽에는 최근에 지은 선실(禪室)이 있다.

자장암 요사채

 

글고 계단을 다 오르면 단청 안한 신축요사채가 소나무를 향해 묵언중이다. 네가 죽어 나를 낳음에 감사한다고~!

암자를 내려선다. 바윌 더듬는 골짝물소리가 청량하다. 열아홉 암자 중 열세 암자를 거지꼴로 동냥하듯 대충대충 들랑거렸나 싶다. 나머지 암자는 언제 찾을 수가 있을까?

 

유난히 푸른 하늘이 밤으로의 길을 잊고, 나는 이 산사에서 푸른하늘 아래를 걸으며 며칠을 숨쉬고 싶다. 홍매가 파란하늘에 오팔처럼 박혔다. 본사찰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영축산의 본명은 축서산(鷲栖山)이었는데 자장스님이 문수보살께서 전수받은 부처님진신사리와 가사 한 벌을 안치하면서 영축산(靈鷲山)으로 개명된다.

 

 

축서산이 불타가 법화경을 설법한 인도마가다국의 영축산과 닮은 꼴에 기운이 통한다 해서였다. 산이름이야 어쩌든 난  산세가 품은 금개구리 같은 적송군락이 유토피아 같다.

오후6시를 향한다. 무풍한송로에 석양빛이 찾아들어 밤으로의 여정을 속삭인다. 이 어둔빛은  밝고 찬란한 내일을 위한 순간의 쉼표라고~!  

 

 

"願此鐘聲遍法界 鐵圍幽暗悉皆明"(원컨데 이 새벽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철벽 같은 어둠을 밝게 하소서)

만공(滿空) 스님이 자장암에 머물면서 두 번째 깨달으며 남긴 게송이다.

 

만공스님이 맞은 석양이나, 울들이 맞는 새벽이나, 스님이 들은 새벽종소리나 우리가 듣는 종소리가 하(何)여일(餘日)함이고, 분별이 없는 불이문이 늘 열려있는데~.

 

시목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시신이 닮을 수 있는 길이 뭘까?

 

아이고! 난 그냥 똥개로 사는 게 좋을 듯 싶다. 지금이 좋다. 해방구에서 똥개마냥 쏘다니며 아무것이나 포식하는 삶이 좋다. 산문을 나선다. 어둠이 깔렸다. 그림자는 항상 나를 보필하느라 보디가드 역을  잊은적 없다. 그래 늘 홀로이면서 홀몸이 아닌 내가 행복하다. 오늘 본찰(本刹)에서 잠시 통도가람이 품은 보석 같은 얘기들을 소개해 준 해설사涍님께 감사묵념 올린다.   2019. 03. 25

 

마애불

통도사일주문과 통도천

금강계단과 석존진신사리탑

11시~13시까지 탑돌이 할 수 있다. 사진촬영금지. 요소마다 안내원이 서 있었다

장경각터를 닦으며  돌출된 바위를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했다

 

 

사명암의 연못과 정자

상수리나무는 겨우살이와 공생하며 꽃을 피웠다

몇년 만에 마주친 얼레지, 얼마나 반갑던지~ 금수암에서 모셔왔다

금수암의 정원

사랑은 붙잡고 붙들어 보듬고 또 보듬어 한 몸 되다 자유롭게 놔 주는 게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암자의 오후, 내가 있어야 남도 있다? 그래서 이 여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