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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창덕,창경궁의 설경(雪景)

창덕,창경궁의 설경(雪景)

창덕궁후원 입장시간이 10시로 늦춰져 한 시간 남짓 창경궁관람을 하러 입장권을 샀다. 매표소입구 낙선재의 승화루가 하얀 소복으로 단장한 채 넘실대는 아침햇살에 부시시 기저개를 켜며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이 고혹스럽게 아름답다. 눈부신 햇살에 모처럼 단장한 하얀 옷이 바랠까 걱정이 된다. 

승화루 옆모습
성정각의 설경

후원과 창경궁을 찾는 들머리에  성정각이 있다, 창경궁은 왕대비들을 편히 모시기 위해 지은 내전이다. 열세살 어린나이에 등극한 성종은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그 할머니와 어머니인 소혜왕후, 숙모인 인현왕후 등 세 분의 대비를 편안하게 모시려 지은 궁궐이다. 세종이 상왕 태종의 거처로 지었던 수강궁터에 창경궁을 세운 성종을 기리기 위함인지 언덕배기에 성종태실비가 있다.    

성종의 태실비
바람의 방향을 가늠한 풍기대의 적설을 치우고 있다
성종태실비에서 춘당지를 가는 숲길은 모처럼 눈꽃을 피우고 작은 관목들은 목화꽃을 만발했다

춘당지는 애초엔  영화당 앞의 넓은 터에 있던 연못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의 나라에서 임금을 비롯한 신료들은 농사짓는 법을 알고 나아가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려고 직영 농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가 지금의 춘당지였다. 일제강점기에 궁궐을 파괴 동물원으로 만들고, 내농포를 파해쳐서 규모가 큰 연못을 만들었다. 1980년대에 주변에 울창한 숲을 조성하여 각종 새들의 보금자리로, 창경궁의 아름다운 관광명소로 태어났다. 

목화 만발한 춘당지는 관람객과 사진쟁이들한테 젤 인기 좋은 곳이다

▲춘당지의 팔각칠층석탑▼

춘당지의 많은 새들은 어디서 겨울을 날까? 천연기념물인 원앙은 어디서 겨울보금자릴 만들어 사랑을 나누고, 청둥오리떼의 행방은 어딘지 궁금했다. 아마 살 판 난 놈들은 얼음장 밑의 물고기들일 것이다. 언제 포식자들한테 낚아 채일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보단 빙하의 겨울철엔 그런 불안 없으니 행복할 것이다. 

대온실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일제는 창경궁전각들을 헐고 순종을 위한다는 핑계를 대며 동`식물원을 만들었다.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꿍꿍이 속셈이었다. 대온실은 그렇게 1909년 문을 연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었다. 지금의 대온실에는 야생화, 자생식물과 천연기념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철골 유리건물 앞의 소정원도 서양식의 전형을 땃다.  

대온실과 온실 뒤 관덕정엔 고양이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함인정 천정에 사시(四時, 四季)가 걸려있는데 이 시(詩)는 고개지(顧愷之)의 사구(四句)에 있는 시란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물은 사방의 연못에 가득하고 / 하운다기봉(夏雲多奇峰) 여름의 구름은 뭉게뭉게 기이한 봉우리를 만들었다 / 추월양명휘(秋月揚明輝) 가을 밤 휘영청 밝은 달은 유난히도 빛나고 / 동령수고송(冬嶺秀孤松) 겨울 산마루의 외로운 소나무가 홀로 돋보인다"            - 도연명 사시(四時) -

경춘전 처마 끝 담장의 소나무와 그 뒤로 낙선재의 취운정{좌)과 한정당(중앙)의 지붕의 선이 멋지다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은 내전으로 왕실 대비(大妃)들의  거처다.  현판'통명전'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할 심산으로 전각 주변에 흉물을 묻고 굿판을 벌렸던 곳으로 결국엔 숙종이 대노하여 사약을 내려 사지로 보낸 곳이다.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 에로스사랑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랑학일 것이다.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涵仁亭)은 임금과 왕족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었다. 연산군때 왕의 남자로 회자된 공길이 공연한 무대가 여기였다. 함인정 뒤로 경춘전(景春殿)이 보인다.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거처인데 연산군에겐 할머니면서 어머니를 폐위시킨 원한이 사무친 할망구이기도 하다. 하여 연산군은 부러 함인정에서 떠들썩하게 연회를 벌려 인수대비 가슴에 비수를 꽂는 앙갚음을 했다.

담장넘어 낙선재 취운정(중앙)과 한정당의 기와지붕이 멋지다
금천(옥천)

창경궁궐 앞에는 춘당지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있는데 금천 또는 옥천이라고 한다. 궁궐의 뒷산과 어울려 길지를 이뤄 왕권을 신성시한다. 창경궁의 옥천 주변에는 앵두, 자두, 살구나무를 심어 봄철엔 꽃의 향연을 즐겼다.

옥천의 회화나무는 사도세자의 비명이 서린 문정전을 향한 몸부림을 보는 듯하다 
홓화문과 옥천교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영조는 1750년 5월 19일 50여명의 백성들을 홍화문 앞에 초대하여 '세금폐단' 문제를 토론하는 대면정치를 했다. 영조는 호포(戶布)와 결포(結布)에 대해서 말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어떤 세금정책이 좋겠는지를 하문했다. 호포는 반상 구분 없이 집집마다 내는 세금이고, 결포는 경작토지 면적에 세금을 차등 징세하는 제도로 조정의 주요 세원이었다. 근디 백성들이 의외로 호포제에 찬성했다.

호조판서 박문수가 홍화문 앞에 초대한 백성 50여명을 미리 만나서 왕의 질문에 '호포제가 좋다'라고 겁박하다시피 다짐해놓은 탓이었다. 의구심이 생긴 왕은 두 달 후 80여명을 다시 초대 진종일 난상토론을 했으나 결론을 못내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임금이 백성들과 대면 직접정치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토론에 대해 사관은 “성군(聖君)이 앞에서 나라를 모유(謨猷)하는 신하가 불충했다. 통탄함을 견딜 수 없다”고 기술했다. 박문수의 불충을 적시한 실록이다.

270여년 전에 영조가 펼쳤던 직접민주주의를 현대의 우리네 지도자들은 까마귀귀신이 들렸던지, 아님 해바라기 박문수호판의 출세술에 반했던지 시행착오 민주주의를 수십년 동안 해왔던 거였다. 지금도 최고지도자 앞에서 어용벼슬하러 직언을 꺼리는 고관들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명정전과 문정전과 숭문당(좌측에 현판 글씨가 보인다)전각의 회랑▼

명정전 옆 문정전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7일동안 가둬 죽인 비극의 장소로 한 때 휘녕전(徽寧殿)으로 불리기도 한 통한의 마당이 꽤 넓다. 사도세자의 비명도 당파싸움이 원인이었다. 문정전 옆의 숭문당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다. 현판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란다.

▲명정전일대의 전각의 지붕▼
명정전의 좌후모습

명정전(明政殿 국보제226호)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임금과 신하들의 하례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고, 외국 사신을 영접하던 장소다. 성종 때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소실되어 1616년 광해군이 다시 지은 원형 그대로의 정전이다.

집복헌과 영춘헌

정조24년(1800년6월 28일),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7475)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실록 정조54권) - 

집복헌(集福軒)은 영조11년1월에 사도세자가 탄생한 곳이다.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이씨 소생으로 세자의 비명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리오.

성정각 일원
낙선재 원경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침소로 중궁전이다. 태종5년(1405년)에 지은 건물은 소실되고 그 뒤 수차례의 화마로 중건을 거듭했다. 현 건물은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긴 건물이다. 대조전이라는 이름은 임금(大)을 만드는 처소란 뜻이다.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음을 말한다. 침실 주위에 왕과 왕비의 잠자리를 수발드는 상궁들의 방이 있다 

대조전

대조전은 창덕궁 내전 중 가장 큰 건물로 조선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대조전 뒤쪽의 긴 행각은 경훈각과 연결됐다. 후정은 장대석을 층쌓기 하여 화단을 만들고 검정벽돌과 붉은 벽돌로 무늬쌓기를 한 굴뚝은 멋지다. 왕비들의 휴식공간으로써 후정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힐링장소였지 싶다.

대조전의 〈봉황도〉는 궁실 장식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오일영과 이용우의 합작품이란다. 하늘엔 붉은 해가, 땅엔 봉황이 깃든다는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있다. 계곡의 폭포와 바다 파도속의 괴암들, 하늘을 비상하는 봉황이 환상적이다  

대조전 서쪽벽의 〈백학도〉는 김은호씨의 작품이다. 거센 파도 위의 바위와 꽃, 바다로 흐르는 계곡의 소나무와 학은 장수의 상징이다.  〈백학도〉는 맞은편의 〈봉황도〉는 신선의 경지를 암시한다.

▲대조전 뒷뜰(후정)▼
보춘정

 성정각(誠正閣)에 있는 보춘정(報春亭)의 '報春'은 ‘春'이 옴을 알린다(報)’이다. 봄은 동쪽, 곧 동궁을 의미한다. 보춘정은 왕세자의 공부방으로 왕자가 머리를 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건물을 앞으로 돌출시키면서 밑에 기둥을 세우고 정자를 만들었다. 하늘로 치솟는 처마끝이 동궁의 비상을 뜻하나 싶다

낙선재(樂善齋)는 왕비들을 위한 건물들로 단청을 안 한 소박하고 온화한 사대부집안 풍정을 자아낸다. 1847년 헌종은 사랑하는 후궁 경빈을 위해 석복헌을 세워 처소로 삼고, 자신의 서재와 사랑채도 만들었다. 수강제는 순원왕후(순조의 비)을 위한 집이었다. 석복헌에서는 순정효황후가(순종의 비)1966년까지 살았다.

낙선재전경
 

헌종은 첫번째 왕비 효현왕후김씨가 16살에 요절하자 왕비간택에 직접 참여한다. 마침내 삼간택이 정해지고 그 중에서 경빈 김씨를 점찍었다.  허나 왕비결정권을 가진 대왕대비는 효정왕후 홍씨를 간택한다. 헌종은 효정왕후가 3년이 되어도 후사가 없자 그걸 핑계로 새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았다. 경빈 김씨한테 첫눈에 홀딱 반한 거였다. 경빈 김씨는 사대부출신으로 후궁이 됐지만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 보다 더한 사랑을 받아 헌종은 석복헌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선물했다. 조선 판 '축소 타지마할'이랄까? 

“善, 당신은 나에겐 ​그런 존재였습니다. 만월문 사이로 비치는 뒷모습만으로도 60년의 기다림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림과 글 속에 갇힌 버거움과 외로움은 이젠 화계(花階)에 내려놓으시고 아련한 600일의 기억만을 간직하소서​”   - 경빈김씨가 헌종에게, <樂善齋記>에서 - ​

헌종이 오매불망 3년 동안 품은 연정은 2년간의 불꽃사랑을 위함이였던가! 헌종과의 순정한 사랑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삭히는 60년간의 경빈김씨는 행복한 여인이란 생각이 든다. 짧지만 한 남자의 진솔하고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는, 그 그리움을 사랑하는 여인은 행운녀다.  

“첫 눈에 반한다(一見鐘情)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소.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오래 기다리게 함을 서운해 마시고 이젠 나의 ​곁에 머물러주기를

당신의 ​온기와 당신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복을 드리니

멈추어라! 아름다운 모습이여!”                     - 헌종이 경빈에게, <錫福軒記>에서 -

18살에 한 여인을 점찍어 3년동안 연정을 품다 21살에 그 그리움을 사랑으로 꽃피운 임금. 사랑이 만개하기도 전 23살에 요절한 왕의 순정한 순애보에 감동한다. 왕의 한 여인을 향한 5년간의 연모와 오롯한 사랑은 5천년 우리의 역사속에 누구였던가?  

 
▲낙선재후원▼

낙선재후원은 왕비들의 휴식공간으로 아름다운 정원이다. 낙선재와 석복헌과 수강재 뒷뜰에 화단을 만들어 꽃나무를 심고  괴석을 올리고 상랑정과 한정당과 취운정을 세워 멋들어진 휴식공간처를 만들었다.

낙선재후원
낙선재 언덕의 승화루
낙선재

낙선재는 왕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 국상 후 왕과 왕비들이 소복차림으로 은거하는 공간이었다 1884년 갑신정변 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됐다, 일제때 순종이, 1963~1970년까지 영친왕 이은, 1966~1989년까지 이방자여시가 기거했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8~1989년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죽음을 맞았다.

낙선재후원 담장 너머로 멋진 상당정이 보인다
선원전;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양지당과 영의당 사이의 통로
양지당;임금이 제사 전 날 왕림하여 머물던 어재실이다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숙장문과 호위청
돈화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