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깨말구구리길 - 봄내길2코스
금년장마는 신물이 날만큼 지긋지긋하다. 하루도 빤한 날이 없이 두 달을 뭉그적댈 모양이다. 오늘은 ‘장미’란 이쁜 이름의 작은 태풍이 남해에 상륙해 울산 쪽으로 빠진다니 서울`춘천까지야 어쩔라고? 간단한 멜빵을 메고 집을 나섰다. 불현듯이 구곡폭포생각이 나서였다. 세 번 열차를 갈아타고 2시간 만에 강촌역에 도착했다.
회색하늘에 잔뜩 주눅 든 초목들은 풀죽어 웅크리고 있다. 물깨말구구리를 훑고 온 냇물은 무슨 억하심정이 아직도 남았는지 검붉고 성난 얼굴로 내달린다. 아뿔사! 성난 물살 탓에 구곡폭포입구는 출입금지 인줄을 휘둘렀다. 안내소직원도 손사래를 친다. 성난 구곡폭포 구경하러 왔는데 허사라니! 발길을 돌려 주차장을 어슬렁대니 봉화산-문배마을-구곡폭폴 휘도는 봄내길2코스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한 바퀴 도는데 8km쯤되고 어쩌면 구곡폭포도 볼 수가 있겠다는 내 나름 알량한 속셈을 했다. 근년에 다듬었을 문배마을 가는 임도는 잘 가꾼 숲길이다. 골짝물길 따라 구불구불 깊은 산속을 헤집는 호젓한 낭만은 이내 불안감이 솔솔 지피고 있었다. 골짝을 내달리는 물살의 장쾌한 노래는 매미들의 가냘픈 합창과 크로스오버하며 웅혼한 오케스트라전당이 됐다. 매미들의 노래가 사뭇 청승맞다 싶은 건 잔뜩 흐린 물기 젖은 숲속에서의 울음 이어서다.
고작 1주일 남짓 살 운명인데 단 하루도 청명한 날씨를 못 보고 죽어야하나 싶어서다. 그나저나 이 깊은 산속의 오케스트라를 나 홀로 감상한다는 뿌듯함과 을씨년스러움에 기분이 영 묘해 졌다. 봉화산 갈림길 팔부능선쉼터에 앉았다. 오후1시가 지나쳤다. 요기를 하다말고 씨알 굵은 도토리를 발견했다. 햇 알일까 싶어 깨물어봤다. 앙팡지게 여문 알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잖은가! 나잇살 먹은 도토리나무 서너 그루가 잿빛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벌써 가을인가? 과일 싸온 비닐봉지에 이 삼십 개 알을 주어 담았다. 금년 가실 알도토리로 아내를 놀래 켜주고 싶었다. 부슬비가 내린다. 꼬부랑산길은 가늠할 수도 없다. 모퉁일 돌면 모퉁이고, 또 돌면 또 모퉁이다. 직선거리로는 바로 눈앞인 걸 알아챌 때 힘 빠지곤 한다. 그렇게 십 여리쯤을 다람쥐 채 바퀴 도나 싶었다. 긴 장마와의 싸움에 나자빠진 나무들이 한 두놈이 아니다. 덩치 큰 놈이 넘어지면서 덤으로 부상당한 놈들은 아픈 상처 그대로인 채 울부짓고 있다.
억세게 재수없는 놈들은 흡사 우리네 생존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튼실한 어른 아래야 걱정 없이 산다. 무너진 절개지 흙더미에 깔린 초목은 개죽음이다. 몇 군데 조그만 산사태들은 지자체가 잽싸게 복구를 했어도 검붉은 상처에서 피고름이 베어나오고 있다. 수마에 할퀸 이재민들의 상처의 아픔도 저럴테고 그 트라우마는 평생동안 멍애처럼 따라다닐 거다. 문배마을에 들어서는 고개길은 황토진창으로 엉망이 됐다. 그 진창길을 빠져나오자 빗발이 굵어진다. 옛날엔 이 진창길도 없는 하늘만 뻥 뚫린 오지 중의 오지마을 이였다.
장마에 주눅 든 산촌집들이 땅바닥에 바짝 웅크리고 있다. 어색하게 간판도 아닌 현수막 하나씩 걸친 채다. 하늘 아래 오지라서 비행기를 향한 문패 겸 상호인가? 6.25전쟁이 있었는지도 몰랐던 산촌이다. 근년까지도 차(車)를 못 보고 일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산 곳이란다. 그 순박한 산촌에 현수막을 걸게 한 건 알량한 도회사람들이 민박이란 이름의 돈뿌림 탓이다. 마당에 들어서 아주머니께 물었다. “시내 나가는 버스를 어디서 탑니까?”라고.
“여긴 버스 없어요.” 봄내길 들어서 처음 말문을 연 나는 아주머님의 의외의 대답에 어리둥절했다. 여기서 우중 산행을 끝내려던 나는 낭패였다. 죽으나 사나 빗속의 트레킹을 계속해야만 했다. 구곡폭포길을 찾으려는데 이정표도 마을길도 흐지부지하다. 몇 해 전에 와본 기억을 되살려도 영 시원찮다. 사람 대신 개새끼만 사납게 짖어댄다. 왔다 갔다 하다가 가까스로 구곡폭포길에 찾아들었다. 빗물살에 패인 언덕길을 오르는데 도토리알밤이 흩뿌려져있다. 조생종 도토리여서일까? 강원도고산지대라 가실이 빠른 걸까?
빗발은 점점 굵어진다. 급경사내리막길은 야자포대를 깔아놔 다행이었다. 하늘을 가린 잣나무 숲이 음산하다. 나무가 넘어져있고 돌멩이가 튀어나와 은근히 산사태공포가 지폈다. 초소밖에서 사내 두 명이 뭔가 수리하나 싶은데 못 본채 지나쳤다. 골짝이 웅~웅~ 우는 소리가 역력해진다. 구곡폭포가 가까워졌다는 징조다. 폭포감상 기대감보다 골짝에 물난리 날까봐 걱정이 됐다. 세찬비가 몇 분만 뿌려도 골짝 물은 인도까지 넘칠 덴 테? 하는 기우를 떨치질 못했다. 불안감은 내리는 빗발기세에 비례해졌다.
기우는 기우였지만 구곡폭포를 향하는 길은 통제되어 실망했다. 잔뜩 부풀었던 폭포구경은 골짝을 흔드는 웅장한 소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수록 나는 어리석고 단순해 탈이다. 이 장마비속에 산사태로 전국이 난리인데 폭포구경하겠다고 우중산행에 나섰으니 창시 빠져도 몽땅 빠진 놈인 것이다. 구곡정에서 잠시 비를 피하면서 아까 정문안내소에서 손사래 쳤던 안내원이 나를 알아볼까 걱정을 했다.
‘어떻게 들어갔느냐?’고 힐난하며 야단칠 텐데 말이다. 그럼 난 ‘봄내길 트레킹하는 참이다’라고 응수하면 될 터이다. 빗발이 가늘어지자 물길을 따라 내려온다. 끝,깔,꼴,끈,꾼,깡,꾀,끼,꿈이란 쌍기억(ㄲ)음의 9자가 띄엄띄엄 갓길에 서있다. 쌍 기억글자 한자씩으로 운 떼어 재밌는 구담을 하면서 구곡폭포추억을 담으라는 뜻이란다. 누군가 상대가 있는 산책길일 때 재미 삼을만하단 생각을 했다.
도둑 아닌 도둑놈 된 기분으로 안내소를 통과 ‘물깨말구구리’길을 빠져나왔다. 장미는 어디쯤에서 꼬리를 감추는지 부슬비를 뿌린다. 강촌역에 닿았을 때가 오후4시15분이었다. 빗속에서 구곡폭포주차장 – 봉화산입구 – 문배마을 – 구곡폭포 – 주차장을 빙 도는 12km코스를 옹골지게 홀로 즐긴 셈이다. ‘강촌=물가마을=물깨말’의 변천 음에다 폭포가 골짝 구구마을 쪽에 있다 해서 ‘물깨말구구리’라 부른다. 2020. 08. 10
# https://pepuppy.tistory.com/455 에서 물깨말구구리길 겨울풍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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