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의 수묵화 - 세미원 & 두물머리
한 달여간 눈 내리지 않아 건조한 서울에 새벽녘부터 청승맞게 함박눈이 내린다. 우수(雨水)를 그냥 맞을 순 없단 절기(節氣)의 시샘일까? 하염없이 쌓이는 눈발 앞에 나도 그냥 있을 순 없어 군것질을 챙겨 열차에 올랐다.
차창에 달라붙은 눈꽃이 허무하게 흩날리는 눈물이 된다. 그래도 회색하늘은 눈꽃세례를 멈출 것 같지는 않다.
세미원
눈꽃세례를 눈물범벅으로 차환시키는 시간의 여백을 감상하면서 오늘이 우수란 걸 달가워하고 싶질 안했다.
양수리역사를 빠져나올 때도 눈발은 나비처럼 날리고 있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은 발 딛는 순간 물컹대며 물 반 눈 반이 된다. 우수는 그렇게라도 삐집고 들어와야만 하나보다.
가정천연지숲의 고니떼
가정천용담호연지(蓮池)숲엔 이 순간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는 듯 고니
(백조)떼가 수선을 떨고 있다. 눈이 녹고 얼음이 녹아 물 반인 살얼음호반에 발 담군 고니 떼가 허공을 몇 바퀴 선회하다 내려앉는 동료들을 환영하느라 ‘고니~고니~’외치며 훼를 친다. 놈들은 비행할 때도 꼭 쌍쌍이다.
그들을 환영하는 무리가 또 있었다. 예 일곱 명쯤 되는 사진쟁이들이다. 호숫가에 삼각대카메라를 설치하고 놈들의 동정에 숨소리마저 죽인 채 초점 맞추느라 시간을 잊는다. 고니는 몽골에서 월동하러 우리나라엘 와 3월초 귀소(歸巢)하기 위한 중간 경유지로 팔당호 두물머리에서 휴식을 하고 있다는 게다.
세미원수로
몽골습지서 2600㎞를 날아온 진객(珍客)들로 두물머린 볼거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두물머리 호수엔 고니의 먹잇감인 수초와 연뿌리 등이 많아 우수를 전후해 모여든단다. 여기서 휴식을 취한 고니는 몽골로 귀소, 늦봄에 짝짓기 하여 3~5개의 알을 낳아 암컷이 알을 품고 수컷은 둥지를 지킨단다.
용담호에 뜬 큰섬
한 달쯤 후 부화하여 3년쯤 돼야 검정털이 흰털로 변신 어른고니(백조)가 된다. 고니 네 마리가 어디서 왔는지 공중을 서너 번 선회하더니 동료들 옆에 내려앉는다. 두 커플인지 따로따로 짝지어 우아하게 내려앉는데 선착한 무리들이 술렁대고 훼치는 놈도 있다. 뜻하지 않게 고니 떼의 정중동을 지켜보다 세미원(洗美苑)을 향했다.
하얀 설원의 회색하늘과 엷은 물안개가 거느린 정물(靜物)들은 다분히 몽환적이다. 누런 갈대와 난삽한 연 줄기 뒤로 펼쳐진 연회색호수, 그 호반을 어렵푸시 휘두른 그림자 같은 산이 파노라마 치는 장대한 수묵화는 신비스럽다. 세미원도 하얀 눈사태에 푹 빠졌다. 한반도둠벙을 에워싼 나무들이 눈꽃을 피웠다.
장독대분수는 얼었고 페리연못가 빨간 산수유열매는 눈물을 달고 영롱하게 반짝댔다. 백련지(白蓮池)를 종단하는 일심교(一心橋)는 흰 융단을 깔고 나를 첫손님으로 환대한다. 어째 발자국남기가 민망스럽다. 맘이 고와야 발자국도 곱게 찍힐 텐데~? 순정에 티를 남기나 싶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설원을 껑충댔던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었다.
설원은 차가운 만치 마음도 순수케 한다. 세심로(洗心路)는 누군가 두 사람이 족적을 남겼다. 하얀 눈길을 밟으며 그들은 마음을 씻었던지 발자국은 벌써 눈물이 고였다.
그들 발자국에 상처 나지 않게 모네의 정원을 향했다. ♡속에서 청둥오리 한쌍이 유희를 펼친다. 사랑의 연못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주위를 담아내는 데칼코마니작업에 빠졌다.
모네의 정원 ♡속에 청둥오리 한 쌍이 유희를 펼친다
구름다리에 올라 그 작업을 엿보는 나까지도 그대로 찍어놓는다. 단정하지도 순결하지도 않다. 세한정(歲寒亭)을 향한다. 이 하얀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 추사선생이 쉬는 곳이다. 세한정마당의 노송과 담 밖의 소나무 세 그루는 세한정그림에서 옮겨 심었나 싶다.
세한정의 세 그루 소나무는 세한도를 연상케 하고~!
연회색우주에 달랑 서 있는 두 소나무사이 여백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사유케 한다. 나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고 또 누군가는 그 말꼬리에 어떤 댓글을 쓸지 궁금하고 두렵다. 저쪽 북한강을 건너면 다산선생유적지와 생태공원이 있다. 오늘 짬나면 거기까지 발길을 옮길 예정이다. 용늪배다릴 건넌다.
용늪을 가로지르는 배다리
분수를 뽑아 강 얼음을 녹이고 있다. 눈이, 얼음이 녹아야 우수가 아니던가! 쇠기러기와 청둥오릴까? 울음소리가 청둥오리 같다. 한 무리가 살얼음 강바닥을 차며난다.
철새가 사라진 회색여백에 큰섬이 실루엣처럼 아른댄다. 남한강은 흐르지 않는 강이다. 모든 건 죽어있는 듯 정지된 채다. 멀리 앙상한 느티나무가 회색허공에 박혀있다.
국사원숲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움직일 뿐이다. 느티나무는 400살이 넘도록 두물머리 지킴이마냥 서서 누가 촐싹대는지를 감시하는지도 모른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반갑게 보듬으면서도 느티나무 체면 탓에라도 흐르지 않는 듯 흐르는 수밖에 없지 싶다. 느티나무 아래서 사람들도 도도한 정중동의 세계에 자신을 투영시커 되돌아보는지도 모른다.
느티나무는 400년동안 두물경에 몸담고~!
오늘은 황포돛대 대신 기막힌 데칼코마니로 두물경에 취하게 한다. 여기에선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번잡이 사라진다. 주위가 그윽하다. 한 없이 여유롭다. 끝없이 넓은 하늘과 강과 산야가 가슴을 넌지시 열개한다. 두물머리의 겨울은 연한흑백으로만 채우는 몽환적인 세계-담대한 수묵화라.
설원의 빈 둥지는 철새들의 등대일까?
느티나무쉼터에서 감상하는 겨울수묵화는 일품이다. 사시사철 내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두물경이라. 두물머리는 금강산자락에서 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함수되는 곳으로 양수리(兩水里)라고도 한다. 합수된 한강물은 도도하기 그지 없다.
두물경 앞 족자도
400살의 느티나무가 지켜보고 있는 양수리나루터에서 마주하는 이른 아침에 지피는 물안개와 일출, 해질녘의 황혼은 사뭇 몽환적이다. 그리고 황포돛배가 강가에 여울대는 실루엣은 탄성을 자아낸다. 그 두물경에 홀로서서 수려한 풍광에 취한 나머지 자신을 관조하는 순간은 여태 망각했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기도 할 것 같았다.
그윽한 침잠에 빠져들게 하는 거였다. 푸근한 날씨는 우수편이었다. 질퍽대는 눈길은 발바닥에 봄의 전령소릴 전한다. 네 시간동안 회색빛 두물경에 파묻혔다가 귀소행 열차에 올랐다. 고니는 내게 상상 저편의 환영객이자 환송객으로 남았다. 놈들이 있어 흐뭇했고 나비 춤추듯 눈 내린 우수여서 행복했다.
# https://pepuppy.tistory.com/613 에서 여름철의 두물머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두물머리 양수리에
물안개가 피어나면
황포돛대 바람타고
추억 따라 마음 맡기네
세미원 연꽃 정원
두리둥실 어우러져
피어나던
추억의 두물머리 사랑
남한강 북한강 만나듯이
언제 또 우리 만날까
-후략-” 노래<두물머리>에서
2019. 02. 19
홍련지
백련지를 종단하는 일심교
세한정 밖의 소나무
세한정과 노송
세한정 전시실의 세한도와 추사초상화
황포돛배는 돛대만 두물경에 박고 우수 오기만 기다리나?
사랑의 정원
우수를 맞는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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