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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푸른 다도해를 향한 한풀이 억새 춤 - 천관산

 

푸른 다도해를 향한 한풀이 억새 춤 - 천관산

 

 

 

23번국도를 타고 남하하다 보성만을 안고 다도해를 파고든 장흥반도를 달리다보면 담소원주차장이 있다. 천관산장천재 나들목이다농무 속을 버스는 잘도 헤엄쳐 온 셈이다. 열시반쯤에 장천재를 향한다.  

오호통재라장천재의 심벌이다 싶은 태고송(太古松. 전라남도 기념물 제245호로 지정)이 고사목이 됐다.

 

-고사목 된 태고송-

 

6백여 년을 피사의 사탑처럼 버텨오며 천관산의 아픔을 지켜본 명품송이 수령을 다했단 건가?

년 전에 영양주사를 맞고, 더는 고사된 나지에 웬 참나무가 기생한다는 불길한 소식을 접하긴 했었는데 말이다. 고사목 그대로 앞으로 6백년을 더 수호신 해줬음 좋겠다 하고 염원해봤다.

 

 

-관산들 너머 해무 속의 보성만-

 

골짝 좁은 개울에선 정다운 물의속삭임이 일상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환영 나온 동백이 한껏 푸르러 남녘의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헌데 금강굴 오르는 산길이 은근슬쩍 된비알이다. 관산의 황금들판이 푸르른 해무를 걷어내고 있다. 올망졸망한 섬들이 농무 속에서 세수를 하는성싶고~

 

 

 

 

선인봉을 밟고 한 시간쯤 헐떡대며 금강굴에 들었다. 검푸른 산릉에 빌딩처럼 솟은 하얀 바위 숲이 천관산이란 걸 일깨운다. 태곳적 옥황상제는 자신의 면류관을 여기다 놔두고 갑옷들은 저만치 달마산에다 벗어놓았을까? 흩어진 면류관잔해들 속을 비집고 올라서서 사위를 조망하는 쾌거는 거기 그 자리에 서본 자 만의 맛깔이다.

 

 

-종봉에서 본 구정봉일대의 바위군들-

 

나는 오늘 리이와 동행하며 그 특별한 레시피를 만끽하는 뿌듯함에 취했다. 리이는 몇 개월 전 용추봉 사령관동굴 찾기에 동행하며 면식했었는데 용케도 오늘 재회하여 기쁨이 곱빼기다.

용추봉가마골에서 한 시간여를 헤맨 소회를 되씹으며 동행한 나는 천관탐험과 은빛억새파도타기에 달떠있었다.

 

 

 

다행인 것은 리이가 도전에 과감한가 싶고,  끈기가 있단 점이 나를 매료시켜 동행꾼으로써의 느낌을 공유할 것 같았다.

종봉 하단엔 금강굴이 있고 그 안엔 석간수가 흘렀단다. 종봉에서 바라보는 구정봉의 바위군은 감청산록에 점점이 수놓아 있어 특별하다. 천관산 명경(名景)이 펼쳐진다.

 

 

 

아홉 개의 바위봉우리가 모여 하나의 군을 이룬 구정봉(九頂峰, 685m)은 주능선과 지장능선 그리고 천관산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흩어져 있는데, 각각의 봉우리 이름은 대장봉, 천주봉, 보현봉, 대세봉, 선재봉, 관음봉, 신상봉, 홀봉, 삼신봉이다. 이들 바위미궁(迷宮)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하루쯤 붙잡았으면 싶었다.

 

 

-금강굴입구-

 

횐희대에 섰다. 연대봉을 향하는 능선의 억새들은 한낮의 햇살을 이고 은빛춤사윌 벌리고 있는 거였다. 보성만의 푸르름과 거금도쪽의 다도해가 아직껏 해무의 이부자리 속에서 설 잠을 헤맨다. 우린 억새 숲 바위에 걸터앉아 점심자릴 폈다. 한 떼의 미풍이 억새를 애무하다가 나의 목덜미를 스친다. 시원하다.

 

 

-구정봉-

 

육지를 야금야금 파먹은 바다는 장흥과 고흥반도를 만들고, 억새 숲 저 아래 관산일댄 또 사람들이 바다를 야금야금 메꿔 황금들녘을 일궜다.

해무(海霧)의 하품이 들녘을 훑고 억새머리칼을 흩날리며 산릉엘 올라와 점심자리의 나의 뺨을 간질거린다. 그럴 때마다 억새들이 부스스 경련하고, 그 떨림은 파도가 돼 구릉을 넘어 다도해로 줄달음질치는~ 아! 낭만속의 점심이라니!

 

 

-주능선과 지장능선, 삼신봉능선이 만나는 지점에

아홉 개의 바위봉우리가 군락을 이룬 구정봉 전경-

 

리이는 공교롭게도 친정이 나의 처갓집 이웃 이였다. 아내완 한참 만의 후배일 터다. 억새 숲을 산보한다. 억새의 순정은 정오의 햇살이 부끄러웠던지 고갤 숙이고 일제히 외면한다. 그 미동의 파장이 다시 은빛파도를 일궈내고 있다.

다도해를 향하는 은빛파도 - 너울춤의 사연을 알 것도 같아 리이에게 얘길 꺼냈다잘난 채 함일까?를 쭈빗거리다가-.

 

-억새 뒤로 연대봉-

 

몽골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는 항복하고 개경천도를 행하자 삼별초는 항몽항쟁하며 강화도에서 쫓겨 진도에 진을 쳤으나 여몽연합군

에 폐퇴한다. 원종 14(1273)엔 제주도에서의 잔류삼별초군이 완전 진압되자, 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 일본정벌에 나선다면서 고려에 여몽연합군을 실어 나를 900척의 전선(戰船)을 건조하라 명한다.

 

 

 

900척의 배를 만들기 위해 남벌된 나무가 장흥 천관산과 부안 변산의 소나무였다. 당시의 조선소가 합포(마산)와 장흥에 있었던 것이다. 몽골의 일본정벌을 핑계 삼은 배주문으로 천관산의 울창한 소나무들이 벌목돼 민둥산이 됐고, 대머리 산은 치유되지 못한 채 억새의 아지트로 변했던 것이다.

 

 

 

아까 들머리 초입 장천재의 주인 이였던 존재 위백규 선생(1727~1798. 조선 후기 실학자)이 여기에 올라서서 민둥산이 된 그 비극적인 사연을 한탄하기도 했었고, 고사목 된 태고송은 그런 트라우마를 안고 600여 년을 버텨온 산증인 이였던 셈이다.

 

 

 

천관산억새의 사연을, 트라우마를 아는지 모르는지 산님들은 억새춤에 신바람이 났을 테고, 나도 그 잔치마당에 희낙거리고 있음이다.   연대봉(723m)표지석 앞에선 인증샷하려는 산님들로 늘아빌 섰다.   리이도 줄을 서겠단다. 봉수대에 올라 거금도 쪽 다도해를 조망하며 이 좁고 긴 리아스식만이 배를 만들기에 얼마나 좋은 장소인지를 리이와 얘길 했다.

 

-환희대에사 본 주능선-


연대봉의 봉수대는 고려 의종 것으로, 왜구들이 침범할 때마다 봉화불을 올렸던 곳이다. 이곳 봉화대는 장흥 억불산(510m)과 병영의 수인산(561.3m)과 연락하며 불꽃은 릴레이로 서울남산봉화대에 이르렀을 테다.  또한 제주와 강진을 오가던 신호로 사용되기도 했단다.

 

 

우리나랄 원조한다는 명목의 선심은 예니 지금이나 지네들한테 이익 없인 천만에 콩떡일 것이다. 나부터도 손해 볼 짓 하면 미친놈 소릴 듣는데 나라끼리 명운을 거는 도박에 공짜원조가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억새는 그 사연을 알기에 매년 한풀이 춤판을 벌리는지도 모른다.

억새의 리드미컬한 춤사위는 그래서 우리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마을

을 정화시켜준다.

 

-정원암-

봉황봉쪽으로 하산한다. 바닷가 간척으로 황금들녘이 된 곳이 옛날 징발된 백성들이 간벌된 소나무들로 전선을 만드느라 피땀 흘린 한 맺힌 포구였을지도 모른다.

시루떡바위가 모진세파에 떨어져나가 멋있는 정원석이 됐다. 천관산의 바위들은 기하학적인 바위들이 모이거나 쌓여서 걸작을 낳았다.

 

 

 

양근암(陽根岩)은 좀 밋밋하긴 하지만 대물로 아들 낳길 소원한 여인들 손바닥 빌어닿게 했을 테다. 금방 촛불 켤 것 같은 등잔암을 휘둘러보고 하산길에 내달렸다. 문바위에 탑마루여산님 두 분이 지친 표정으로 하산걱정이다. 한 시간쯤 걸려도 괜찮다고 인심쓰는(?) 난 시간이 빠듯해서 잽싼 걸음질친다.

자꾸만 해찰하는 나를 지겹도록 기다렸을 리이가 여간 고마웠다. 사실 나와 동행하자면 배창시 한 자쯤은 빼고 느긋해져야 한다.

 

 

-양근암-

 

그래서 난 누구더러 동행해달라고 터놓질 못한다. 리이가 눈 딱 감고 있었을 게다. 예기치 못한 해후에 이은 그녀의 배려가 오늘 나를 여간 흐뭇하게 한 거였다.

천관산이라 칭함은 천관보살이 살고 있어 '지제산(支提山)', 하늘에서 내려온 봉황이 날개를 접고 쉰다고 하여 '천풍산(天風山)', 가끔 흰 연기 등 상서로운 서기를 내뿜는다고 하여 '신산(神山)', 관음봉형상과 89개의 암자 속에서 많은 고승을 배출한 산이란 의미로 '불두산(佛頭山)'이라고도 했단다. 또한 "돌 모양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산정에 항상 자줏빛 내지 흰 구름이 떠있다"고 천관산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기술했다.

 

 

 

천관산에 눈이 내리면 온 산이 붉게 타 오른다고 어느 시인이 읊었다.

천관산에 가을햇살 내리면 온 산이 너울춤을 춰 한풀이를 한다,’고 읊고 싶다.

80여개의 구슬 같은 바위들을 박아놓은 천관산, 금강산과 더불어 부처님의 진신사리89개를 안치한 사찰을 거느린 천관산을 유람케 한 탑마루님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끝까지 잘도 기다려준 리이님의 배려는 오늘 나를 한껏 뿌듯하게 함 이였다.

                                2015. 10. 17

 

 

 

 

  -문바위-

-위석규 유재비-

-고사목 된 태고송-

 

-금강굴-

-거북바위-

-노인상-

-환희대에서 연대봉을 잇는 능선-

 

-천상의 대화-

-진죽봉-

-황금들 된 간척지가 엣날엔 조선소였을 터-

-해무 속의 다도해-

-등잔암인가?-

-문바위에서-

 

 -위, 아래 필자사진은  탑마루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