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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지리산 칠암자를 찾아서

지리산 칠암자순례길

 

 

오전9시 반쯤의 지리산골짝 함양 마천면 삼정리는 풋풋했다.

찌푸린 하늘이긴 하지만 간밤에 내린 비가 등산하기 좋은 날씨를 연출하고 있었다.

촉촉이 젖은 풀섶을 밟으며 영원사를 향한다. 양정마을을 벗어나 검푸른 푸나무골짝등산로에 접어들자 물의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짙은 녹음의 울창한 숲 사이로 언뜻언뜻 스치는 합창단원들의 모습도 보인다.

 

 

바위와 하얀 물살, 이끼와 돌멩이, 드러난 나무뿌리와 풀이파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비벼대며 어르고 달래면서 티끌 하나도 남김없이 씻어내는 오페라를 열창하고 있는 거였다.

실로 얼마 만에 오케스트라의 전당에 입장한 나인가! 회색구름마저 낮게 드리워 그들의 합창은 더욱 절묘한 울림이 된다.

한껏 물먹은 나무들이 번들거리고 물봉선은 빨간 입술을 앙증맞게 내밀고 줄 차게 따라나서고 있다.

 

 

하늘도 이를 악물고 경청하느라 비 내리는 걸 잊은 모양이다. ~! 기분 좋은 날씨다.

반시간을 그렇게 취했다. 영원사(靈源寺)가 다섯 칸 선방에 요사 채 하나를 거느리고 맞는다. 신라 때 영원대사가 창건했대서 영원사라 부르게 됐다는데 한 땐 너와집인긴 했지만 아홉채의 집에 백칸이 넘는 선방이 있었단다.

서산, 사명대사 같은 고승들이 109명이나 수도를 했던 해발 902m의 경내는 왠지 스산해보였다. 요사채 뒤의 거대한 쌍갈래귀목이 이데올르기로 찢긴 우리들의 깊은 트라우마를 몽땅 안고 보여주는 듯했다.

 

-영원사선방-

 

다시 골짝으로 들어서니 몇 백 년을 버틴 전나무가 영원사를 굽어보고 있다. 아니다, 몇 백 년씩을 살아남은 거목들이 곳곳에서 세월의 아픔을 몸에 바르고 시윌 하고 있는성싶었다.

난 그놈들에 정신 팔려 노예가 돼 걸핏하면 일행에 뒤처지다 따라잡느라 헉헉대기 일쑤였다.

어른 세 명이 팔 벌려야 겨우 안을 느티나무 앞에선 이 놈 본 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하다고 중얼댔다.

아니 일행들을 불러 놈과 악수하라 권했다. 그들은 뭘 생각했을까?

 

-영원사경내 귀목-

 

누군가가 되뇌였던가! 요세미티국립공원의 천년을 산 메타세콰이어를 보는 듯하다고~. 놈들도 정녕 행운아란 생각이 들었다.

빨치산소탕작전 때 용케도 살아남아 있으니 말이다. 물먹은 너덜오르막은 숨이 차.

날씨가 흐리고 선선해서망정이지 비지땀 흐를 된비알코스라. 그래

도 거목들의 기묘한 자태에 홀려 삼정산정상 턱밑에 올라섰다.

 

 

오늘코스 중 전망이 으뜸인 곳이라고 송선생(흙산악회장)이 가르쳐준다. 좌측 천황봉능선이 잿빛하늘을 파면서 달리고,

우측엔 연봉 뒤로 노고단이 흰구름 모자를 쓴 채 얼굴을 내밀고 있다.

정오가 안됐지만 점심을 예서 하잔다. 자릴 펴고 입을 즐기는데 천황봉쪽 산자락이 하얀 운무로 퍼포먼스를 벌리고 있는 거였다.

검푸른 산록을 무대삼아 하얀구름으로 갖가지모양을 연출하는 신기는 산 밑의 삼정(상정,중정,음정)마을의 작품일지 모른단다.

 

-삼정마실에서 지피는 안무에 가린 천황봉-

 

입과 눈을 동시에 즐기는 천상의 오찬장이라! 누가 오늘 비 온다고 산행을 포기했던가? 송회장은 아침에 비가 개일 것 같아 하느님은 늘 우리 편이라고 자족했었다. 우리를 되씹어봤다.

삼정산을 오른다. 거대한 바위가 주상절리를 이루며 적송과 동거중인 산정은 누군가 인줄을 쳐놨다. 금지구역은 더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출입금질 시키려면 저 밑에서 확실하게 할 일이지?”라고 인줄 친 누군가를 나무라며 우린 금역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삼정산정의 암송-

 

삼정산정은 숲 탓에 시야가 좁았다. 우측으로 영원령을 벗어나면 토끼봉이 있고 넘어 골짝은 뱀사골일 테다.

우린 빠꾸하여 상무주암을 향한다.

거친 돌로 석축을 쌓은 위의 상무주암 입구는 나무로 가로막고, 마당 저만치 단출한 암자토방에서 노스님이 햇빛 없는 오후를 즐기고 있어 엿보기만 했다.

높은 석축위의 앉은뱅이돌탑이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창건한 상무주암(上無住庵)이라고만 말하는 것 같았다.

 

-상무주암-

 

누구도 머물거나 경계 지을 수 없는 자리~? 저쪽의 빨간 해우소가 너무 호사스럽다.

원시림 같은 푸나무숲은 다시 이어진다. 빗물에 세수한 돌너덜길도 놓아주길 않는다. 나무들은 늙은 세월만치 천태만상의 표정을 지어 눈길을 붙잡는데 말이다.

송회장 하는 말이 산자락을 휘돌면 좌측벼랑 석축위 비탈에 그림 같은 암자가 있단다. 또 하나의 상무주암인 문수암(文殊庵)을 말하고 있었다.

 

-문수암 원경-

 

석간수샘터를 옆구리에 찬 천인굴(千人窟. 일명 천용굴)이 있는데 스님말씀따나 사람들이 오랫동안 거처로 사용해서 부른 이름일 테다. 84년부터 31년째 수행하고 있는 도봉스님이 마당에 나오셨다가 인사 끝에 뒤에 또 계세요?”라고 묻는다.

없습니다.”

오늘은 익산에서만 오신 모양 이예요. 비가 안 왔으면 시끄러울 텐데-.”라고 질문과 자답을 하신다.

비가 많이 왔습니까?”라고 묻자

그럼요, 밤에 요란했어요. 일로 와보세요라며 앞장서서 암자 뒤로 가시더니 커다란 프라스틱통을 가르킨다. 지시락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목례를 하고 돌아서 축대 아래로 내려서자

거기 종이를 치우시지요.” 하신다. 방향표시시그널 종이를 두고 하시는 말씀 이였다.

 

-문수암 도봉스님-

 

스님의 행복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어리석은 나를 찾을 뿐이다. 한 달

이면 모를까 반평생을~!? 스님의 삶은 죽음에로의 즐거운 산행일까? 다시 삼정산 팔부능선옆구리를 더듬는다. 너덜 길은 적당히 오르내리고 나무들은 가을 옷 챙기느라 실바람과 속삭댄다.

이 암자길이 가을 옷으로 갈아입으면 얼마나 고울까? 식생이 다양한 활엽수인데다 간간히 바위와 연애질을 하고 있어서다.

 

-영원사경내-

 

송회장에게 청했다. 명년가을에 한 번 날짜를 잡아 동행케 해달라고-. 반시간이 훌쩍 지났다. 산 옆구리 모퉁일 들어서자 벼랑위에 흩어진 암자 서너 채가 나타났다.

삼불사(三佛寺). 비구승들의 참선도량이란다. 워낙 적막하여 지팡이

를 들고도 부도인지 비석인지까지 접근을 못했다. 축대 밑에 용담처럼 핀 자주꽃술에, 오랜만에 보는 비자열매에 눈 팔다가 빗발을 맞는다.

 

-삼불사의 용담?-

 

판쵸우의를 꺼내 입었다. 모두 다 떠났는데 약수암동행할 분이 안 보인다. 아침에 그분과 나는 여기서부터 삼정산능선을 타고 약수암까지 훑기로 약속했는데 행방이 묘연하다. 생각해보니 점심때부터 못 뵌 것 같았다. 비까지 내려 나홀로의 약수암행을 포기했다.

각박하게 쌓은 돌계단에 이끼가 무성하고 비까지 내리니 이채롭게 아름답다. 사람발길이 뜸하니 돌계단은 이낄 키우는 모양인데 이처럼 고운계단을 본적이 없다. 자연은 촌음도 허투루 시간을 까먹질 않는다.

 

-삼불사 이끼계단-

 

하산의 너덜 길은 가파르고 미끄러워 여간 신경 곤두서게 한다. 해도 이슬비 맞으며 홀로산행의 맛에 빠졌다.

이 가파른 돌너덜길을, 그땐 원시림처럼 울울창창했을 텐데 갓 스무 살인 조경실은 어찌 버티며 피신생활을 했을까?

난 아까부터 사랑땜에 지리산에서 비극적으로 요절한 두 여인생각이 문득문득 나는 거였다.

 

-운무 쓴 노고단-

 

제주도바바리 출신인 조경실은 광주 어느 병원의 간호사였는데 육군중위 김지회가 입원하자 서로 눈이 맞아 사랑의 포로가 된다.

불꽃을 튀기던 두 연인은 김지회가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하여 쫓기며 지리산으로 피신하자 덩달아 따라나서 반란군에 휩싸인다.

애인을 따르려 사랑의 포로가 돼 지리산에 숨어 든 그녀는 빨간스웨터를 곧잘 입었다. 그게 언론에 포착돼 빨간스웨터의 여두목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육사3기 동기생인 김지회와 홍순식은 패잔반란군 천여 명을 이끌고 1948.10.25. 지리산문수계곡에 아지트를 만들고 활동하다, 49.4.9일 뱀사골반선지역에서 국군과 총격전을 벌인다.

이 반선전투에 서몽실이란 또 하나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마을 손준기영감의 다섯째 첩으로 술도가(양조장)를 운영하고 있었다.

서몽실의 내연남이 반란군토벌에 나선 한웅진대위 3연대의 정보참모 김갑수상사였다. 눈 먼 사랑은 그렇게 급박한 전쟁통에도 피어난다.

 

-몇 백년 산 귀목일까?-

 

김상사는 실상사에 머물며 반란군이 나타나면 알려달라고 애인에게 벼갯머리 맞대고 당부했던 바다. 양조장에 들이닥친 김지회일당이 서몽실의 (계획적인)후대를 받으며 기갈을 해소하고, 술까지 맘껏 퍼먹어 휴식을 취하며 나가떨어지자 몽실은 조동철을 시켜 애인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국군의 새벽기습을 받아 일망타진 된다. 사살된 홍순석은 발견 됐으나 김지회와 조경실의 행방이 묘연했다.

 

-사자바위-

 

부상당한 애인을 찾아 며칠을 헤맨 조경실은 달궁에서 생포되고, 며칠 후 연장리골짝에서 발견된 부패된 시신이 애인 김지회라고 증언하게 된다. 며칠 전인 음력7.26(1949)에 이 소식을 접한 반란군은 양조장을 은밀히 침입하여 서몽실과 그녀의 심부름한 조동철,남두희,손양섭을 붙잡아 끌고 가서 돌멩이로 떼려 죽였다.

조경실도 군재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애통한 비극의 현장이 지리산이고 바로 여기쯤이다.

 

-삼정마실-

 

뱀사골반선에서 실상사를 걸쳐 삼정산능선을 따라 토끼봉(빨치산대장 이현상이 사살 된 곳)을 반란군과 빨치산은 수없이 내왕했을 터다

아까 영원사도 그때 여순반란군소탕작전에 입은 참화를 아직껏 털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이데올르기는 누굴 위해 존재한 거였을까?

비는 추적추적 흩뿌리고 있다. 그들도 그때 그날 비 맞은 장닭의 초쵀한 몸꼴로 나라를 생각했을까? 군자천물길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잘대며 흐른다.

 

 

3시쯤의 도마마을 정자 뒤풀이는 오붓했다. ‘하나님은 늘 우리 편이다.’ 는 송회장과 같이 할 수 있어 다행 이였다.

오늘 비가 오면 어찌할까? 하고 엊밤 고심했는데-. 더구나 6년 전 책 20권을 지인들께 선물한다고 했던 송선생의 과분한 친절까지 받은 나 였었다.

2015. 09. 12

-필자-

 

-흙 산님들-

-영원사의 쌍귀목-

 

 

-위 아래, 연리지목인데 잘못 가져왔다-

 

-누군가 삼백 년쯤 산 비자나무랬다-

 

 

 

 

 

 

 

 

 

 

 

 

 

 

-문수암 너와집해우소-

 

 

-문수암천인굴의 석간수-

 

 

-천인굴에서 본 전경-

-삼불사 칠성각=

-삼불사-

 

-비자-

 

 

 

 

 

 

-상무주암 석축위의 고티 나는 석탑-

 

-천남성열매-

 

 

 

 

 

 

 

-도라지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