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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 ~ 그 알갱이

오디서리

오디서리

 

희미한 여명이 틀 무렵 신 새벽녘의 민낯 그대로를 잠자리에서 정감(情感)할 수 있는 기회는 여름철만의 선물일 것이다. 열대야에 뒤척인 짧은 밤의 새벽녘엔 열어놓은 모든 창을 통해 침실로 한기(寒氣)가 촉수를 내민다.

깊은 잠결 속에 비몽사몽 하던 나는 이불을 끌어 덮다 밤의 인기척에 의식의 벽을 깨우곤 한다.

오늘 새벽엔 주적주적 내리는 부슬비소리가 침실 가득, 여름밤의 달콤함 속에 자장가처럼 흐르는데 휴대폰이 짓궂게 울어댔다. 달콤 나른한 잠결 속에서 “여보세요”

“매형, 일어나셨소?”

“으응, 왜~ㄴ일-?”

“오디 따러갑시다. 오늘 어디 안가시지요?”

“응, 무슨 오딘데” 단잠을 훼방 노는 처남이 옆에 있담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일곱 시 반까지 갈게요”라고 말하던 수화기는 딱 끊겼다.

 눈 뜨고 보니 6시를 막 지났다. 옆에 누워있던 아내가 아침은 먹고 오는지 궁금하다고 구시렁거리다가 통화를 하더니 김밥 사서 먹고 점심까지 싸온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단다. 또 비오는 일요일에 집에서 쉬지 무슨 오디냐? 고 면박하는 아내에게 비오는 날이 오디 따는 날이라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는 처남의 기습에 우리내왼 억지기상을 해야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비옷과 바구니를 챙겨 약속시간에 나타난 처남내외의 승합차에 올랐다. 까맣게 잊고 살아온 오디나무, 아니 본 기억조차 아스름한 뽕나무열매를, 그것도 자생뽕나무에서 직접 딴다는 오디, 내가 갖고 온 바구니 두 개가 너무 작다고 빈정대는 처남에게 우리내왼 헤픈 웃음으로 유구무언 해야 했다. 그러다 곧 웃음마저 거둬야 했던 건 비올 때라야 사람이 없어 따기가 좋다는 거였다.

맹랑한 핑계는 뽕나무임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호한 곳을 찾아다니며 따는 땜에 궂은 날이 좋고, 가보면 알게 된다면서 관망대쪽으로 빗속을 질주하는 거였다.

작년에도 아낸 친구를 통해서 (뽕나무단지에서 수확한)오디를 구매하여 오디주를 담았었다. 술맛을 모르는 난 어쩌다 한두 잔을 먹곤 하는데 몸에 좋아서보다는 말할 수 없이 검붉은 그 신비한 색깔과 향에 반해 음식 반주로 기분 좋게 딱 한 잔 마시는 거다.

내가 오디를 따먹은 기억은 초등학교시절로 거슬러간다. 그땐 집집마다 양잠을 하느라 뽕나무를 키웠었다. 어린 우리들은 뽕잎에 부정 타면 누에농사 망친다는 어른들 눈을 피해, 오디서리를 한 추억이 켜켜이 묵은 기억창고 맨바닥에 깔려있을 뿐이다. 그 추억을 꺼내 타임머신을 타고 야릇한 흥분에 젓고 싶어진다. 비 내리는 농촌의 푸른 들판을 어슬렁거리던 차는 신작로갓길에 멈췄다.

가드레일 안쪽에 뽕나무 두 그루가 다른 활엽수들 속에 파묻혀있고, 놈들은 빨갛고 새까만 오디를 수없이 매단 채 빗물에 젖어 윤기 자르르 흐르고 있잖은가!

물기 젖은 채 탱글탱글한 오디를 입안에 넣고 지그시 으깨물 때의 육감과 달디 단 맛과 기묘한 향까지를 음미하는 최초의 입맛은 하도 오랜 된 어릴 적의 그 맛의 기억을 살려내지 못했다. 빗물에 범벅 안 된 오디면 얼마나 달까? 바구니에 따 담다 오지게 큰놈이면 입안에 넣기 바빴다. 좋은 건 우선적으로 내 입에 넣어야하는 원초적인 욕심까지도 즐기며 오디 따기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도, 시간도, 도둑질일지도 모른단 두려움도 까마득히 잊었다.

손에 잡히는 가지의 오디를 다 따곤, 처남은 준비해 온 모기장그물을 뽕나무 밑에 깔고 나무에 올라가서 흔들자 후두두 떨어지는 오디 반의 물 폭탄 세례! 그 재미에 철저히 몰입에 빠진 탄성의 순간은 짐짓 오랜만에 향유하는 순수한 동심 이였다.

우린 그 짜릿한 순수에 취몽하기 위해서도 주적주적 퍼붓는 비를 헤치며 굼뜬 늘보처럼 신작로를 기다가 뽕나무만 나타나면 멈추곤 했다. 뽕나무라고 다 오디가 열리는 거 아니었다. 열에 한 나무 정도랄까. 홍건이 적신 채 신작로를 더듬고 뽕나무와 씨름하며 시간을 줘 담다보니 오디도 네댓 관은 족히 땄다.

부안 내변산 자락까지 훑다보니 오후3시가 지났다. 오랜만에 가진 순수한 꿈같은 시간이 여간해선 갖기 어려운 추억거리란 걸 인식하자, 아까 새벽잠을 깨운 처남의 불청이 이젠 그리 고마워지는 거였다.

천연 날것 그대로의 오디! 술 안 좋아하는 나더러 오디를 한 줌씩 비닐봉지에 넣어 냉동 보관 후, 꺼내 요구르트를 희석하여 분쇄기에 갈아 복용하면 맛과 영양이 그만이란다.

귀가한 아내와 난 오디를 성근 채에 올려 청수에 살짝 담가 오물을 걸러내선 물 빠지기를 기다려 비닐봉지에 한줌씩 나눠 냉동실에 넣었다.

앞서 싱싱 오톨톨한 오디를 요구르트와 섞어 갈아 즙으로 마시는 그 맛과 향과 시원함에 미처 빠져드는 황홀한 미감의 세계를 오래도록 붙들고 싶어 눈 감곤 했다.

인터넷에 뜬 ‘오디술과 즙에 대한 예찬’은 여기 죄다 옮길 순 없다. 그것보다는 훔치는 스릴이 더 감칠맛 나듯, 나는 오늘 빗속의 오디 따던 정황과 정감, 탱탱한 오디 몇 알을 입안 가득이 넣고 씹을 때의 넘치는 육즙과 상큼한 맛깔을 오래도록 되새김질 하고 싶다.

그 순수한 자연의 민낯들이 주는 추억은 영혼을 살찌우는 보약이라. 행복한 삶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건 동심에 빠져드는 일이다. 많은  용도,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어도 동심의 파도는 탈 수가 있다.

이젠 6월이 오면 난 도둑고양이 처럼 농촌들판을 어슬렁거릴 거다. 특히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관망대주변 신작로에 미친놈처럼 빗속을 헤맬 거다. 그리고 싱싱한 검붉은 오디를 한 줌 따서 입안에 처넣고 지그시 으깨며 넘치는 육즙의 오묘한 맛과 향에 눈감고 하염없이 비를 맞고 있을 터다. 명년, 내후년에도, 내 내후년 여름에 - 유월 비오는 날엔 말이다.

2013. 0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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