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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본관

간헐적으로 흩뿌리는 가랑비가 가을을 최촉한다. 더딘 가을빛 낙엽이 하나씩 유영하는 초록숲길 산책 끝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들었다. 토욜 이어선지 관람객이 많고 특히 청소년들이 태반이다. 어떤 젊은 아주머니는 어린애들한테 한 장면씩 설명을 하느라 신명이 났다. 나도 두서너 번 찾아왔었지만 일행들에 묻혀 주마간산 훑듯 하여 아쉬움이 있었던 참이라 오늘은 한량노릇 오지게 할 테다.

1908년 건축된 경성감옥은 해방까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근대감옥으로, 해방이후 1987년까진 민주화인사들이 수감된 질곡과 통한의 공간으로써 서대문구치소로 불리다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안양교도소)하면서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칭됐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불굴의 신념을 되새기는 추념의 역사관이 되어 장년세대와 청소년들이 많이 찾는 쉼터 - 관광지가 됐다.

을사늑약 후에 설치된 조선통감부(1906년)
해방 전의 서대문형무소(좌상) 해방 후의 서대문형무소(좌하). 을사늑약 원문(우)

보안과청사 1층 전시관 간수들의 업무공간에 첫발을 디딘 나는 형무소역사와 영상실을 일별하고 2층 민족저항실에 들어섰다. 3.1운동까지의 항일독립운동가의 유물과 사상범으로 수감된 4,800여장의 사진으로 이뤄진 파노라마 사진벽, 사형장지하 시신 수습실 모형을 관람했다. 지하 전시관엔 수감자를 조사하고 취조했던 정황의 밀랍조형과 열악한 취조 공간이 있고 생존자의 육성증언도 들을 수가 있다.

창고
청산리전투(좌상)과 상해임시정부(좌하), 순종인산일에 독립만세를 부른 권오설열사의 철판관(우)은 유족들이 시신을 못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부끄러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여기 돌을 세워 선생의 이름을 새김은 검수도산(劍樹刀山) 무릅쓰고 조국의 자유를 추구한 그 의기가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며 민중 민족을 위하여 물불도 가리지 않았던 그 사상과 정신이 진실로 사무치게 그리운 까닭인 따름이다."            <권오설 선생 기적비(紀蹟碑)>

창고, 옥사, 여옥사(시계방향) 뒤로 안산정상과 송신탑이 보인다

 중앙사는 간수들이 수감자을 통제한 공간이다. 소수의 감시자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수용자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감시형태의 감옥으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 부른다. 파놉티콘은 ‘진행되는 모든 것을 감시할 능력’을 의미하는 말로 영국의 철학자 겸 법학자인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 건축양식인데 서대문형무소 중앙사가 10,11,12옥사를 감시하는 파놉티콘 형식이다. 10옥사 감방72개, 11옥사 감방56개, 12옥사 감방46개가 벽돌칸막이로 이뤄졌다.

1926610, 순종의 인산일에 30여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5~6백명의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를 하자 전국으로 전개되어 212명이 체포되었고 권오설,권오상,이선호,유면희 등 관련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4월 권오설열사가 옥사했는데 일제는 고문흔적을 감추려고 시신을 철관에 봉인 유족이 열어보지 못하게 했다.

의열단 곽재기 의거지인 조선총독부와&nbsp; 나석주 의거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좌)와 융희황제 장례식

수감자들이 노역을 했던 공작사는 1923년에 건축됐단다. 2층 벽돌건물의 8개의 방에서 목공, 의류가 제조되고 일용품과 군수용품을 생산했는데 그런 기록과 유물이 전시됐다. 음울하고 답답한 붉은 벽돌옥사를 빠져나오면 탁 트인 푸른 세상이 밀려온다. 회색구름이 낮게 내려오긴 했지만 초록초지 위를 걷는 시원한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없다. 반시간도 채 안된 감옥에서의 탈출(?)은 자유란 어떤 것일까?를 의식하는 호강에 멋쩍어 했다. 얼마나 많은 수감자들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옥에서 더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신간회 나주지회 발회식 기념사진

그들은 누구를 위해 영어의 몸이 됐던가? 일제36년의 온갖 핍박과 수탈도 모자라 영혼까지 말살하려했던 일본은 사죄는커녕 반성도 없는데 무조건 포용하는 윤석열정부의 꿍꿍이 속셈은 뭘까? 얼마 전에 일본은 군함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걸 한국외교에 대한 승리라고 기염을 통했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강제노역자가 102만명, 군함도에서 1925년~1945년까지 사고사로 화장한 기록된 조선인이 122명이다. 또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사도섬에 끌려온 조선인이 2,000여명이니 군함도의 조선인 수치는 상상불허다

물고문

6.10만세운동과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 중인 권오설과 강달영은 1927.10.16일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중에 고문을 받아 항의하며 고등계 주임 미와(삼륜(三輪和三郞)를 고소했으나 일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취조실(가운데 선 사람은 통역?)

“군함도는 지옥섬이 아니다”, “강제동원과 강제노역은 없었다”, “군함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의식주를 함께 한 하나의 탄광 커뮤니티였으며 가족처럼 살았다”고 일본정부는 주장하면서 한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염장을 불지르는데 윤석열정부는 오염수 방출이 과학적이라 괜찮다고 한술 더 떠 옹호까지 한다. 사형장을 향한다. 1910년대에 건축된 사형장엔 올가미가 늘어져있고 시신은 지하에서 수습 시구문을 통해 외부로 연결 공동묘지로 갔다. 사형장 옆엔 사형장의 증인인 미루나무가 쓸어져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의 트라우마를 통감케 한다.

손톱빼는 형틀(좌), 인두로 지지는 고문과 주리트는 고문(우)

비행기 태우기고문은 두 손을 뒤로 수갑을 채워 묶고 밧줄로 천정에 매달아 놓는 고문으로 굳어진 팔을 잘못 내리면 부러지기 일쑤라 두 팔을 전문으로 내려주는 잡역이 옆에서 거들어 줬다. 또한 홀라당 벗기곤 가죽채칙 매칠하기, 의자에 묶어놓고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코에 고춧물 붓기, 시멘트바닥에 무릎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는 고문을 했다

상자고문[箱拷問]은 상자안쪽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놓고 사람을 상자 안에 넣어 흔들어 못에 찔리게 하는 고통의 고문이다. 사람처럼 잔인한 동물이 있을까?
독방

운동장에 격벽장이 있는데 수감자들의 운동시설로 격벽을 설치하고 그 안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게하는 감시와 통제가 용이한 부채꼴형의 적벽돌 구조물이다. 높이 10m의 감시탑은 6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2개 남아있고 그 망루 밑의 한센병사는 문둥병자들의 격리옥사다. 그 아래에 우물과 사각 못은 빨래터였다. 여성 수감자들의 여옥사는 북쪽 구석에 있고, 높이4m의 형무소의 붉은 담장은 앞쪽161m, 뒤쪽214m가 남아있다. 창고, 취사장, 뮤지엄샵을 일별하고 형무소벽돌담장 밖으로 나왔다. 세상을 향한 출소(?)다.

12옥사 징벌방(먹방)과 벽관고문(우)에서 벽안의 사내가 스팩체험을 하고 있다

12옥사 징벌방(懲罰房 먹방)은 2.4㎡넓이의 감방으로 3개가 있다. 빛이 차단되어 ‘먹처럼 캄캄하다’고 하여 ‘먹방’이라고도 했다. 마루널판 끝에 구멍을 내어 용변을 처리하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됐다. 먹방에선 밤낮 구분이 없어 심리적인 고통은 상상을 절했으리라. 벽관고문(壁棺拷問)은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시켜 앉을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의 고문으로 벽을 마주보고 있어 벽관이라 한다.

옥사

 짙푸른 수목들이 살랑살랑 춤을 춘다. 인공 못에선 청둥오리 떼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놈들의 자유는 우리에게 낭만을 일깨운다. 유관순열사의 동상을 끼고 독립관 앞 소나무숲에 섰다. 수많은 시민들이 자유를 휴일을 즐기고 있다. 그럴 수가 있는 건 선열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자유를 향한 독립운동에 희생된 음덕일 테다. 독립국일 때 누리는 자유가 참 자유란 걸 처절하게 절감했을 선각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증명하고 있음이라. 정부고위층들 해외연수나 시찰 대신 서대문형무소에서 2박3일만 수감자생활 해봤음 싶다.                     2023. 09. 16

간수사무실, 형무소 운영조직과 인력배치 등 감옥운영 현황을 전시한다
중앙사에서 감시하는 옥사 복도
합방 감옥
11옥사

감옥은 3평~5평 정도였으며 지하감옥 독방은 한평 남짓이다. 내부수감 가능인원은  3,200명이었다

11. 12옥사 밖의 모습, 중앙 지붕건물이 파놉티콘형의 중앙사
12옥사
사형장 정문
교수대
시신수습 지하통로
지하에서 수습한 시신은 벽돌담밑 시구문을 통해 공동묘지로 갔다
사형장의 비극을 수백년 지킴이 하다 쓰러진 미루나무, 사형수들이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도 한다. 1950년대에 심었단다. 2020년 태풍에 쓰러졌는데 2016년4월 뿌리에서 새 순이 돋아나 현재 2세가 자라고 있다
사형장에서 본 격벽장, 뒤로 인왕산정이 보이고 아파트단지는 수감자들 면회객들의 투숙지로 여관과 여인숙이 즐비했단다.
▲부채꼴 모양의 격벽장, 수감자 운동시설로 감시와 통제를 용이케 하려고 격벽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게 했다▼
▲수감자 중 한센병(문둥이 병)에 걸린 환자를 격리시킨 한센병옥사와 망루▼
우물터, 식수와 빨래용 등에 사용됐다
사각연못, 일제 때 나전칠기공장이 있던 곳으로 1979년 빨래터로 사용하려고 만든 못이다. 뒤 안산골짝에서 흐르는 물로 마르지 않는다. 옥사지붕 뒤로 인왕산정이 보인다. 연못 뒤 건물은 공작사
초기 사형장터

위 사진의 연못은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장했을 때의 최초의 사형장자리였다. 사형은 감옥 안에서 비공개로 집행돼 감옥 깊숙한 안쪽에 있었고, 교수대를 2개 설치하여 지하실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연못은 그 지하자리다. 이강년, 허위, 이은찬, 이인영 의병장과 이재명, 강우규 의사 등 290명이 여기서 사형집행 됐다. 1621년에 옥사를 확장하면서 현재 사형장위치로 이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는 강우규, 권오설, 김구,김경천, 박진홍, 신채호, 안창호, 양전백, 유관순, 윤봉길,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이회영, 백정기, 차금봉씨 등이 있다. 

9옥사(태극기 벽)와 10옥사 (좌)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두환정권에서 내란음모죄 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이곳에 수감됐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도 박정희 군사정권에 수감된 바 있었다.문익환조봉암, 윤이상등도 이곳에 투옥됐으며, 문세광이나 김재규, 그리고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도 이곳에서 유명을 달리 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출구
안산봉수대에서 조망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관
독립운동의거탑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군함도. 강제징용된 천여 명의 우리 선조들의 비명을 외면하는 듯한 윤대통령의 대일외교를 규탄한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조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