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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백악산의 여름정취

백악산(白岳山)의 여름정취

한양도성은 북한산으로 치닫는다

엊그제가 처서(處暑)인데도 한낮의 무더위는 푹푹 찐다. 명산(名山)이 서울을 쫙 휘둘렀는데도 피서산행 나서기 겁나 산자락둘레길만 소요한 올 여름이었다. 북한산행을 맘먹고 나선 나는 전철 속에서 촉새 같은 변덕이 발동해 경복궁역에서 내려 백악산으로 목적지를 틀었다. 한양도성과 연애질하는 취병(翠屛)울타리 길의 소나무춤사위를 즐기면서 초록숲속의 서울을 조망하는 망서(忘暑)의 한량이 불현 듯 떠올라서였다.

청와대 영빈관과 북악산
무궁화동산 뒤로 인왕산치마바위가 보인다

경복궁돌담길을 걷는다. 높은 담장과 우람한 가로수 사이로 뻥 뚫린 길에 사람그림자도 안 보인다. 영빈관 옆 무궁화공원에서 대여섯 분이 수다를 떨곤 칠궁돌담길부턴 또다시 고독한 산보자(散步者)가 됐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 길은 풀숲에 끊겼다 이어지길 반복한다. 경복궁은 높은 담장에 용마루까지 숨기고, 인왕산 치마바위가 치마폭을 열고 하얀 속살을 눈부시게 들어내고 있다. 그 치마폭바람이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칠궁
경복궁돌담을 타는 등산로는 점점 폭을 좁혀 숲 속에서 꼬리를 감춰 갸우뚱하길 몇 번은 해야 한다

푹 젖은 티셔츠를 겨드랑이까지 올리고 치마폭바람에 나도 배통을 맡긴다. 나 홀로란 특혜를 즐기는 신바람이다. 드뎌 춘추문길과 합류점인 백악정에 닿았다. 오늘 내가 처음 맞는 산님인지 안내원이 반갑게 맞는다. 언뜻 안내원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를 가랭이에 끼고 서울을 관망하며 피톤치드 맘껏 마시며 치유의 시간을 향유할 테니 말이다. 백악정쉼터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식수 느티나무가 양편에 있다.

▲백악정 쉼터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양편에 있다, 안내원이 부럽기도 했다▼

청와대전망대를 끼고 한 바퀴 원형으로 도는 일방통행 소나무숲길은 해찰하기 딱 좋다. 혹서에 인적 끊긴 숲길엔 나비와 박새가 오두방정을 떤다. 진정 백악산을 즐기려면 여름이라야 호젓한 산행맛과 멋을 만끽하겠거니~! 소나무들 퍼포먼스 사이로 스치는 서울은 참 아름답다. 만세동방길에 들어서 중년커플을 만났다. 산행을 즐기는 한량부부모습이 보기도 좋다. 음용불가라? 손만 씻으라는 만세약수를 나는 받아 마셨다.

인왕산정상과 기차바위(우)가 닿을 듯싶다
청와대기와지붕 앞에 경복궁, 그 앞에 빌딩숲 시가지와 남산, 그 뒤로 멀리 청계산과 관악산이 하늘금을 그었다

바위가 짜낸 석간수라 시원하다. 고종임금도 마신 약수인데! 문득 노량진수산시장 활어수조 바닷물을 마시던 국회의원들 모습이 스쳤다. 그들은 생수 대신 바닷물을 상용하고 있을까? 기시다 일본총리가 고맙다고 후쿠시마 오염수를 공짜로 무제한 보내줄 듯싶다. 억대년봉의 의원세비에다 물까지 공짜로 마실 테니 그들은 국회가 노다지판인 셈이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닷물이 공짜인데 그들은 왠지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될 궁리는 안할까? 의원년봉보다 더 많은 수입일 텐데.

만세동방 약수터
'만수동방 성수남극'은 나라의 영원무궁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의 글이다

청운대를 향한다. 빡센 계단이다. 청운대 전망대에도, 쉼터에도 햇살만 난무한다. 청운대에 세 사람이 얼쩡댄다. 안내원과 중년커플이었다. 두 번째 마주치는 산님도 부부다. 백악산의 여름은 부부산행의 요람인가! 백악마루를 향하는 도성 길에 김신조 일당한테 15발의 총탄세례를 받은 1.21사태소나무가 건재하다. 남과 북이 다시 그때의 냉전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작금의 세태를 소나무는 어찌 생각할까?

영원한 적도, 동맹도 없다는 걸 역사가 증명한다지만 36년간 나라를 빼앗고, 이름도 강제로 개명시킨 채 온갖 핍박과 수탈로 식민지노예로 만든 일본을 무조건 보듬으면서, 동족인 북한은 6.25전쟁 발발했다고 적군으로 명시하며 군비증강`대치하는 윤통정부를 역사는 어찌 기록할까? 군비증강은 분쟁을 야기하고 전쟁이 인류평화를 이뤄낸 적 없다. 평화는 배려와 타협에서만 가능했음을 역사는 가르친다.

노쇠가 '탐방로 없음' 팻말을 앞세우고 있다
청운대 쉼터
백악산엔 멋인지 DNA탓인지 이런 기괴한 형상의 소나무가 부지기수여서 놈들을 훑어 보는 것 만으로 빡센 오름을 견딘다
'각자성석'은 도성공사 책임자와 감독, 전문석공의 이름과 언제 축성하고 보수했는지를 새긴 성돌의 내용이다.
성곽과 취병을 이룬 소나무들 춤사위 속을 소요하는 힐링산책은 백악산만이 옹골차게 보시한다
1.21사태 때 15발의 총탄을 맞은 소나무, 탄흔적이 여실하다
▲백악산정상의 필자▼

백악정상에 섰다. 초록산자락 속에 펼쳐진 서울의 아름다움을 한 바퀴 돌면서 조망한다. 엄청난 인파와 작열하는 태양의 열섬 같은 콘크리트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싶다. 화강암 북한산이 파란하늘을 차일치고 그 차일 위로 하얀 뭉게구름이 멋진 그림을 그린다. 그 뭉게구름 바람 한마장이 나를 애무한다. 사이다 바람이라! 오늘 백악산 오르기를 참 잘했다. 백악산을 온통 나 혼자 전세 낸 뿌듯한 기분을 감당하기 벅차다. 한 무리의 산님들이 나타났다.

백악정상 인증샷도 생판 모른 산님과의 품앗이의 선물이다. 그 분이 먼저 제안했다. 행복하려면 먼저 손을 내밀라!
▲정상의 범바위▼

곡장(曲牆)을 향한다. 아까 청운대서 왔던 도성 길을 되짚어 하산한다. 곡성에서 관망하는 한양도성의 꿈틀대는 형태는 형현할 수 없을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백악을 기어올라 창의문으로 급살 맞게 내달리다가 인왕산 대머리를 향하는 하얀 성곽은 더위도 잊게끔 멍 때리는 산수화다. 향로`비봉`승가`문수`보현봉이 줄 차게 달려와 성곽에 이른다. 지 멋대로 꼬부라진 소나무들의 퍼포먼스에 덩달아 성곽도 춤추듯 흐느적대며 서로서로 연애질 한다.

정상에서 조망한 서북부 시가지

소나무와 성벽은 백악산의 상징이다. 소나무 낀 도성 길을 소요하는 낭만을 백악산만큼 즐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싶다. 숙정문(肅靖門)루에 섰다.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숙정문은 음문(陰門)이라고 기우제(祈雨祭)때 열곤 줄곧 닫았다. 게다가 여인이 출입하면 바람난다고 금단의 문이 됐는데 정월대보름 전에 세 번 오르면 액땜을 한다고 정초엔 통문 했다. 푸른하늘로 비상하는 듯한 처마선이 여인의 치마폭 같이 아름답다.

곡장에서 조망한 한양도성, 백악마루를 치닫아 통과 후 인왕산을 기어 오르고 있다

말바위 안내소에 닿았다. 몇 년 전만 해도 경비병에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아야 등정이 가능했던 위병소였다. 그땐 위병들이 요소마다 불침번하고 있어 음산했다. 청년 사병들이 백악산을 불침번하지 않으면 청와대가 습격당하고 서울이 전쟁터가 된다는 듯 청년들은 자유를 담보하고 군복무를 그렇게 했었다. 위정자들의 메카시즘 탓이었다. 독재자는 위기조장의 명수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컴플렉스를 위장하면서 애국자인냥 선전하고 합리화 시킨다. 그런 상징적인 말바위 안내소가 지금은 산님들의 평안한 쉼터가 됐다.  

백악곡장에서 조망한 북한산 영봉들 - 족두리, 향로, 비봉, 승가, 문수, 보현봉이 다가서고 있다
백악곡장은 효과적인 방어지점 내지 시설관리 요충지점에 성벽을 돌출시커 쌓은 전망 좋은 성곽을 이름한다

안내소 벤치에 앉아 숲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슬바람에 나를 맡긴다. 네시간의 산행이 준 행복을 되새김질 한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스탬프찍고 내달린다. 참 좋은 때다. 솔바람이 그들 등짝을 밀며 응원하나 싶었다. 청춘들의 뒷모습에서 ‘순성놀이’생각이 난다.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온 선비들이 한양도성을 돌면서 과거급제를 기원하는 데서 비롯된 순성놀이는 위안과 자신감을 고양하는 멋진 소요문화였다.

곡장에서 본 북악 팔각정

그 순성놀이에 장안의 상인들도 동참해 사업번창을 기원하는 행사(?)가 됐고, 도성을 한바퀴 도는 걸 하루에, 눈`비`태풍속에서도 꼭 끝내야만 했다. 백악산은 그렇게 사람들의 심신과 희망을 고양시키는 명산이었다. 일제가 도성을 허물고 훼방놓기 전까진 말이다. 세월의 더깨속에 ‘아름다운 신앙’처럼 자리매김한 순성놀이는 지금 정월에 시민들의 즐거운 나들이가 됐다. 명년초엔 나도 순성놀이로 옹골찬 하루를 보낼 테다.          2023. 08. 25

경비대 막사 지붕 위로 솟은 소나무, 백악산 소나무는 보호수다
촛대바위
울창한 솔숲 쉼터에서의 한량노릇은 아무나, 어디서든 흉내낼수도 없는 열락의 시간이다
▲숙정문▼
숙정문은 음문이라고 여인들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바람 난다는 게다. 지금은 상시 열려 통문할 수 있는데 그래서 간통사건이 많아졌을까?
옛날 삼엄했던 말바위 안내소는 이젠 쉼터로 단장하여 산님들의 알뜰한 휴식터가 됐다
삼청공원으로 이어진다
대고각, 신문고를 흉내 낸 북전각
경복궁돌담과 양비즘나무 사이의 인도가 하 멋진데도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