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 - 1 Save 9
양력 섣달그믐이 낼 모래다. 뭘 했지 싶게 한 해가 훌러덩 가버리고 애꿎은 나잇살만 보탠다. 세월 붙잡을 묘책은 없을까? 문득 내 어릴 때 섣달그믐밤이 생각난다. 엄마아부지가 오늘밤은 눈 붙여서는 안 되니 뜬 눈으로 세워야 한다고. 깜박 잠들었다간 눈썹이 하얘진다고 주의말씀까지 하시면서다. 그땐 뭔 말인지도 모르고 하얀 눈썹 안 되려고 졸음 쫓던 기억이 새롭다.
섣달그믐은 한 해의 마지막 날밤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하얗게 지킨다는 말로 수세(守歲)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철들어 알았다. 섣달그믐을 하얗게 뜬 눈으로 보내며 해돋이를 맞으면 눈썹도 안 하얘지고, 마지막 날과 첫날이 없으니 나잇살도 보태지질 안했을 텐데 하고 애달파 하며 엄마아부지 생각을 해봤다. 이번 섣달그믐엔 뜬 눈으로 여명을 맞아야 되겠다. 한 살 더 안 먹어 나이는 그대로일 것 아닌가?
며칠 전엔 초등동창모임에 나갔다. 코로나19팬데믹에 움츠러들고, 혹한(酷寒)에 방콕하다 나온 친구들은 모처럼 함박웃음 얘기꽃을 피우며 주름살을 더 만드는가 싶었다. 나한테 섣달그믐 하얗게 보내라던 엄마아부지 보다 더 늙어버린 친구들이 나더러 심부름꾼 좀 하란다. 친구들 사이 메신저노릇을 말이다.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고개 숙였다. 내가 지네들 보다 쬠 팔팔해(?) 보였나? 싶어 우쭐하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를 잇는 심부름꾼도 나 같은 무지렁이한텐 좋은 일을 하는 기회다.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늙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죽는 일 밖에 없을 노인이 해낼 수 있는 최선의 기회는 자신의 주검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길일 것이다. 섣달그믐을 맞아 '1 Save 9'란 말을 되새김질해 본다. 뇌사자 한 분이 아홉 분에게 새 생명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죽음이 주검이 아닌 새 생명으로 거듭 나는 섣달그믐이 우리 앞에 와있다. 2022. 12. 29
# https://pepuppy.tistory.com/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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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속의 그림들은 안산자락길의 겨울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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