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산(高臺山)에서 즐기는 엑티비티
끊긴 경원선중단점인 신탄리역전에 발 디딘 게 오전11시경이었다. 5월의 맑고 청량한 공기가 한가한 산촌(山村)역사 앞에서 홍건하게 밀려왔다. 기지개를 한껏 펴고 배터지게 들이마신 후 고대산을 향했다. 검푸른 산록에서 짜낸 골짝물길 따라 박힌 산촌은 궁상맞게 짜잔 한데 캠핑촌은 문명의 때가 덕지덕지 얹혀 이색적이다. 그 골짝을 찔끔찔끔 흐르는 물길은 한탄강에 몸을 풀 것이다.
고대산숲길 제1,2,3등산로에서 제2등산로를 택했다. 말등바위에서 제3등산로 약수터로 빠져 표범폭포-정상-삼각봉-대광봉을 밟고 제2등산로로 하산-칼바위능선을 타는 환 종주산행할 참이었다. 숲길을 한참 더듬다 빡센 오르막에서 ‘제2등산로 공사 중 출입금지’란 현수막과 맞닥뜨렸다. 덱 계단공사 중이었다. 공사 중인 계단을 조심조심 오르다 인부 두 명과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쫌만 더 오르다 제3등산로 약수터로 빠지겠습니다.”
“저 밑에 출입금지 현수막 안 보셨어요? 사고날까봐 그러지요” “조심하겠습니다. 사고 나더라도 누 끼치지 않겠습니다.” “----.” 어이없다는 듯 시큰둥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그들 앞을 지나 공사 중인 계단을 오른다. 전망대 앞 벼랑의 계단을 오르려니 또 인부 네 분이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잖은가? 헐떡거리는 숨소리에다 도둑질 하다 들키기라도 한 낭패감에 나의 몸꼴은 그렇게 짜잔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위에서 약수터 쪽으로 빠지겠습니다.”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때론 노코멘트 하는 얼굴이 더 무섭다. 의중을 살필 수가 없어서다. 전망대 정자에 들어서고 싶었지만 못 볼 걸 본 사람들처럼 멀뚱멀뚱 주시하는 그들 앞에서 서성댈 용기가 없었다. 미친놈은 나였다. 나는 산에만 들어서면 꾸꿈스런 짓을 하려든다. 어린애 같은 호기심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길 좋아한다. 애초에 되돌아서 제3등산로를 택했어야 했다. 미완성 계단을 올라서자 제3등산로와 연계된 이정표가 나타났다. 해방구를 찾은 기분이 됐다.
약수터를 향한다. 하강 길이 워낙 급살 맞다. 하긴 아까 빡세게 올랐으니 당연지사다. 철재가이드 로프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 벼랑에 거암이 두 곳에 버티고 있어 눈요기하느라 로프에 매단 게 위안이기도 했다. 제3등산로에 들어섰다. 녹음터널을 이룬 계곡은 음습하고 돌`바위길은 어두컴컴해, 잘린 햇볕덩이가 어슬렁대지 않음 어스름한 밤 풍정일 듯싶었다. 흡사 태곳적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골짝을 훑는 바람에 놀란 이파리는 몸살을 앓고, 신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별 희한한 불협화음이 된다. 그래도 그 바람소리가 싫지를 않다. 약수터에 닿았다. 거대한 절애(絶崖)가 젖 짜듯 하고 있다. 넝쿨식물들이 뒤엉키고 양치식물들이 늘어선 바위 길은 점점 고도를 높인다. 갈참나무와 다래넝쿨 녹음터널 속에서 쪼개진 하늘은 별처럼 반짝거린다. 지독한 갈수 탓에도 골짝의 초록생명들은 미소를 잃지 않고 꿈틀댄다. 표범바위를 찾아들었다. 표범은 어디 숨었을까?
표범폭포를 찾는다. 폭포수는 하늘로 빨려드는가? 하늘로 치솟은 폭포바위는 폭포수는 없고 이끼 옷을 걸치느라 침만 질질 흘리고 있다. 표범폭포를 앞세우고 있는 표범바위는 웅장한 바위산이다. 바위색이 표범처럼 얼룩무늬라 명명했지 싶다. 어쨌거나 나는 폭포 앞 바위에 배낭을 풀었다. 바위무덤을 뚫고 솟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참 멋있다. 놈은 표범바위의 호위와 표범폭포수에 생계걱정 없이 몸단장만 한 탓에 몸짱이 됐지 싶었다.
정상을 향한다. 숲을 뚫는 된비알 오름길은 줄기차게 이어진다. 천연석계단에 이은 통나무계단의 빡센 등로는 숲이 끝나 하늘과 맞닿아야 사라질런가. 군 시설철책 갓길에서 처음으로 여성 산님 한 분을 마주쳤다. 가끔 홀로산행을 즐긴다는 그녀의 하산 뒷모습을 눈여겨봤다. 참 대단하다. 또 하나 나의 시선을 붙잡은 건 토치카 앞에 핀 빨간 야생화 앵초다. 오늘 딱 한 번 마주친 이쁜 앵초의 강열함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토치카에 초병이 머문다면 ‘초병과 꽃의 사연’은 필시 시(詩) 한 절을 잉태하지 싶었다.
오후1시, 드뎌 정상에 섰다. 사방의 시계는 막힘이 없다. 첩첩산릉은 수평선 쪽으로 파도처럼 밀려 운해 속으로 흐른다. 북서쪽 산릉안의 분지가 철원평야다. 2억 평의 철원평야를 차지하기 위해 아군은 중공군과 열흘간 12차례의 전투로 395고지를 24회나 뺏고 빼앗기는 혈투 끝에 사수했다. 김일성은 철원평야를 빼앗긴 걸 천추의 한으로 여겼단다. 그 395고지가 '백마고지(白馬高地)'다. 몇년 전에 백마고지 턱 앞까지만 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정상에선 홍괴불나무가 붉은화환을 빚어 영접하고 있다. 빨간 병꽃도 한 살이고 철쭉은 파장이다. 노린재나무가 하얀 꽃 수술 옷을 걸치고 짙은 분향을 내뿜고 있다. 나무는 꽃망울이 작을수록 항이 짙다. 화려하지 않은 꽃 대신 짙은 향으로 매파를 유인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또한 고산일수록 꽃망울이 작다. 아마 기온 탓일 것이다. 근데 의외로 수풀 속에 으아리꽃 두 송이가 방긋 웃고 있다. 고대산은 식생이 다양키로 유명한데 그걸 실증하나 싶었다.
삼각봉을 향한다. 능선을 타는 등산로는 편편하고 사위가 트여 해찰하기 딱 좋다. 게다가 바람까지 시원하다. 대광봉 팔각정이 저만치서 다가선다. 동송저수지(東松貯水池)와 학저수지(鶴貯水池)가 선명하게 다가선다. 몇 년 전 백마고지안보관광 때 답사했던 정황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동송저수지는 물고기어획을 불법화해 저수지 속엔 물 반, 고기 반일 거라고 안내원이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 저수지를 하늘에서 조망하다니~! 아니 철새들의 낙원이기도한 저수지~!
제2등산로로 하산한다. 칼바위능선에 대한 기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부러 하산코스로 택했는데 오후3병시반을 지나치고 있었다. 철원평야를 훑고 오는 북서풍이 드세졌다. 2코스는 좁은 바위능선을 타는 통에 전망도 좋은데 세찬 바람 탓에 잠시 버티기도 힘겹다. 게다가 능선을 타는 바람소리는 짐승울음소리로 변하고 갈참나무는 커다란 잎 땜에 가지가 꺾여 날린다. 흡사 태풍전야 같다. 칼바위능선을 올라탔다. 칼바람과 칼바위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오직 철재가이드와 쇠줄 덕이었다.
급살 맞은 칼바위벼랑길은 긴장감까지 더해 나를 온전히 잊게 한다. 한고비를 무사히 통과하곤 바위에 숨어 사위를 조망하는 흥분은 야릇하다. 포효하는 바람, 요동치는 나무들, 동강난 햇볕 그림자에 흔들리는 듯하는 바위를 헤쳐 가는 담대한 산행은 좀체 맛보기 어려운 찬스다. 친구 J가 나에게 고대산행을 추천한 까닭을 알만했다. J는 군복무를 여기서 한 탓에 고대산의 속살을 꿰고 있었다. 내겐 생소한 고대산을 오늘 처녀산행 하게 한 거였다. J가 새삼 고마웠다.
고대산의 울창한 산림은 지금도 백년을 넘겼을 갈참나무, 소나무가 많다. 옛날 숯 만드느라 남벌했을 텐데도~. 고대산의 어원도 신탄(薪炭새숯)지명에서 연유된,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땔감을 불 지펴서 연기와 불이 나가는 고랑을 ‘큰 방고래’라 하는데, 큰방고래가 있는 골이 깊고 높은 산인지라 고대산(高臺山)이라고 했단다. 또한 첩첩산록에선 숯 만드는 목재가 풍부해 자연 산촌이 형성되고 주막이 생겨 신탄막(薪炭幕)이라 부르는 신탄리가 탄생함이라.
신탄리는 표범폭포에서 발원한 물이 동막골 유원지를 지나 동서방향으로 나눠흘러 차탄천(車灘川)을 돌아 한탄강에 합류 임진강(臨津江)으로 흘러든다. 하여 살기 좋은 산동네에 은신처 좋기로 입소문이 나서 일제 땐 항일의병들이 궐기한 민족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고대산의 깊고 험준한 산골은 의병들의 아지트와 요새로써 항일전을 펼치기가 용이했을 테다. 이젠 북녘으로 달려 백두산까지 닿는 철마의 웅지처가 될 참이란다.
하산 길은 잠시도 방심을 허락 않는 지난한 코스였다. 2코스가 정비중이라 말등바위에서 아까 우회한 3코스로 하산을 했다. 오늘 별나게 고행과 스릴을 즐길 수가 있었던 건 울창한 숲과 계곡, 빡센 오름과 급살 맞은 하산 길이 칼바위능선이었고, 다양한 식생이 눈길을 붙잡아 주어서였다. 등산의 온갖 묘미를 맛볼 수 있게 하는 고대산은 산님들껜 엑티비티(activity)를 흠씬 즐기게 할 명산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 많이 내린 여름철에 표범폭포 물폭탄을 맞으러 올테다. 멋진 피서처일 듯~!! 2022. 0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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