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水落山) 물소리 따라
장암역사를 나와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선생고택에 들어선 건 10시쯤이었다. 수락산행 때마다 서계고택을 찾았지만 사납게 짖어대는 견(犬)공들 탓에 울타리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근데 오늘은 잔디손질 하는 아주머니 허락에 견공들의 위협이 한풀 꺾여 후딱 경내를 일별했다. 450살의 은행나무가 고택의 애환을 말하는 듯하다. 1660년, 선생은 32세에 증광시(增廣試)에 장원급제하여 입직하지만 당쟁에 회의를 느껴 40세에 보따리싸들고 낙향한다.
이곳 장암동에서 농부들과 농사를 지으며 터득한 애민(愛民)사상을 담은 농학서 ‘석경(釋經)’을 저술하는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나아가 사서삼경을 해석 저술한 사변록(思辨錄)이 집권세력이었던 노론 송시렬의 폄훼와 왜곡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비참한 운명이 됐다. 인후하고 고매한 선생을 찾는 교우들과 수려한 계곡을 소요하며 풍류를 즐겼던 흔적이 석계골짝에 많다. 고택을 나서면 바위골짝을 흐르는 물소리가 선생을 기리는 세레나데로 차환 댄다.
장마로 선연해진 낙수(落水)음률은 등산초입부터 세심(洗心)에 이른다. 노강서원(駑江書院) 홍살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가 물소리 따라 석림사를 향한다. 장맛비에 씻긴 절간이 짙은 녹음 속에 산뜻하다. 종각을 휘돌아 골짝을 파고들수록 바위길을 달리며 떨어지는 물소리가 수락산의 진면목을 체감시킨다. 근데 골짝을 파고들수록 세레나데 물소리는 사람들의 불협화음에 엉망이 된다. 등산객이 아닌 피서객들의 난장은 낙수일품의 장소를 다 차지했다.
주위를 의식 않는 청정물길 속에 더위를 쫓는 피서의 희열이 부러웠다. 그러는 나는 연신 땀을 훔치고 배낭 맨 등적삼은 땀이 비 오듯 흐른다. 깔딱고개를 파고든다. 빡센 바윗길은 물기 젖은 데다 후덥지근하여 헉헉대는 내 숨소리가 물소리보다 더 크다. 능선에 오르면 바람 한 가닥이 반겨줄까? 드뎌 수락산정과 기차바위 쪽으로 갈라서는 동막골코스 안부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람은 없어도 탁 트인 전망과 청량한 공기는 더없이 상쾌했다.
하늘문바위 뒤 정이품(?)솔을 건사하고 있는 바위에 배낭을 풀었다. 도봉산이 구름화환을 둘러쓰고 의정부시가지는 엷은 안개 속에 가물댄다. 그나저나 수락산바람 한 가닥이 아쉽다. 기차바위동아줄 연결공사는 아직도 미완성인 채다. 싸가지 없는 어느 청년이 정상석을 무너뜨리고 밧줄을 끊은 지가 언젠데? 시도 때도 없이 발길에 밟히는 기차바위가 불쌍타고 몽니 부린 싸가지 청년을 동정하려 함일까? 수락산정상의 태극기도 더위에 풀죽었나 싶다. 저리 풀 죽은 수락정상의 태극기 마주하기가 몇 날이나 될까?
엉덩이 가까스로 걸친 등산객들도 자릴 쉬이 뜰 폼이 아니다. 창 구멍을 등받이 하고 있는 산님에게 사진 찍어도 되느냐? 고 묻자 엉덩이 쬠 떼다말고 웃으며 고갤 끄덕인다. 거길 차지하려 쏟은 땀이 얼마큼인데? 라고 뻐기는 폼이 위트 넘친 코미디였다. 기갈 해소할 마땅한 자린 눈 씻고 봐도 없다. 이 무더위에 산행이라니! ‘물 떨어지는 소리의 산’이란 이름에 홀려 바위산을 힘겹게 올라 온 산님들은 아닐 텐데! 학생또래의 청춘등산객들이 하 많다. 산정에서 풋풋한 그들을 보기만 해도 뿌듯해진다.
코로나19가 선사한 유일한 멋진 풍류일 것이다. ‘숲속의 기쁨을 좇는 행복’의 산행은 자연사랑의 길이라. 철모바위 모퉁이에 배낭을 풀고 기갈을 때웠다. 그 많은 바람은 누가 다 납치해 갔을까? 꼬끼리바위, 하강바위, 치마바위, 도솔봉, 탱크바위, 용굴암, 학림사를 들러 당고개로 빠질 참이다. 용굴암(龍窟庵)답사는 오늘산행의 주안점이다. 애기코끼리를 찾다 건너편의 도솔봉에 눈길이 멈췄다. 한낮 무더위에 도솔봉에 많은 산님들이 올라 고함치는 듯한 소리가 울리고 있어서다.
도솔봉엔 시원한 바람이 찾아들었을까? 허나 내가 도솔 오부능선 깨를 관통하는 숲길에 들어서도 바람의 행방은 묘연했다. 에둘러 탱크바위를 지나 장맛비에 흐지부지된 산길을 더듬어 용굴암을 찾았다. 골짝절벽에 옹색한 절집이 포개지듯 얽혀있다. 가파른 계단 위 대웅전 옆에 제법 깊은 자연석굴이 전기불빛에 화려(?)하다. 시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으로 궁지에 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설상가상으로 임오군란(1882년)의 난을 피해 여주 사가로 피신하던 길이었다.
시중드는 상궁이 용굴암과 인연이 있어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찾아들었던 동굴이었다. 황후는 동굴에서 7일간 머물며 기도를 올리고 환궁한 후 하사금을 내려 동굴 옆에 법당을 세우게 됐다. 그렇게 난을 피한 명민하고 지혜로운 여걸 명성황후는 일제가 눈엣가시로 여겨 일본낭인들의 시해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나는 용굴암에서 140여 년 전에 이 깊은 골짝을 상궁 하나 앞세우고 찾아들어 컴컴한 동굴에서 기도드린 대단한 여성이 끝내 비명에 간 통한을 그려봤다.
여인이 경복궁에서 여기까지 울창한 숲길을 헤쳐야 했던 비장한 피난길~! 당시엔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도 우글대던 시절이었다. 우측에 불암산이 청계산과 관악산을 잇고, 앞의 북한`도봉산은 백악산을 뻗어 남산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산세가 그나마 불운한 명성황후의 심난함을 위무해줬을지 모른다! 그렇게 평정심에 이른 명성황후는 배불숭유정책 속에서 불암산 학도암의 마애불상조성을 후원했지 싶다. 용굴암에서 1.3km숲길을 헤치면서 인적 뜸한 골짝물소리에 취하면 학림사가 나타난다.
학림사(鶴林寺)는 원요대사가 창건하여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수도정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산세가 학포지란(鶴抱之卵)형이라 학림사라 명명했다는 사찰경내에 무더위 탓인지 인적이 없고 똥개 한 마리가 불손하게 짖어댄다. 종루 옆의 160여 살의 반송(盤松)이 학림사의 주인장인지 그늘을 빚어 나를 맞아줬다. 언제 찾아도 수려하고 융숭한 바위산 수락산은 품고 있는 비장의 역사가 흥미롭고, 우리들 삶에 귀감으로 되새김질 하게할 일화가 풍성하다. 오늘 땀 흠씬 짜낸 만큼 산행후기는 새록새록 오래 추억 될 테다. 2022. 07 .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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