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佛巖山) 헤집어보기
모처럼 서울하늘이 맑다. 지긋지긋한 장마전선이 남하하면서 생색내느라 하늘청소를 했을까? 오늘만큼은 서울에 비 뿌리는 행패는 없을 거라고 기상캐스터가 웃었다. 간단히 배낭을 챙겨 불암산(佛巖山)을 향했다. 상계역사를 나와 불암계곡을 파고든다. 골짝을 달리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몇날 며칠을 목욕만 했을 초목들도 물소리 따라 살랑살랑 때깔자랑 하는 통에 숲은 싱그럽다.
띄엄띄엄 뵈는 산님들 발걸음도 가벼워보인다. 장마에 갇혀 방콕 하느라 엉덩이에 뾰루지 날판이었으니 신바람 날만하다. 부처님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는 불암산 이기에 볼 것도 많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다. 정암사에 들어섰다. 인적 없는 암자석탑 앞, 짙푸른 숲속에 펼쳐지는 강북시가지는 도봉산과 북한산을 병풍으로 휘둘러 장대한 사생화를 만들었다.
정암사의 속살은 대웅전 뒤 벼랑의 바위굴속의 산신전과 관음전일 것이다. 찾는 이 뜸한데다 장마로 음습하고 으스스하여 얼른 들어서기 뭐하다. 다시 숲길을 헤치며 불암산 등정에 오른다. 후덥지근한 숲길은 숲 바람 한 점 없이 땀샘만 자극한다. 툭 터진 바위등걸 소나무그늘에서 배낭을 풀었다. 불암산은 온갖 바위로 폼 잡는다. 바위 빼면 산님들 발길 끊겨 생명 없는 시체이기 망정이다.
소나무와 연애질하려고 반들반들하게 단장한 바위한테 산님들은 염치 좋게 달라붙어 러브스토리를 엿듣는다. 정상의 태극기가 펄럭댄다. 바람맞으러 발걸음을 서둘렀다. 파수꾼 곰바위도 고갤 쳐들고 나붓대는 태극기바람을 탐하고 있다. 산님들이 밧줄을 잡고 정상에 서서 태극기바람에 양팔을 벌리고는 곧장 다음 산님에게 그 신선자릴 내준다. 정상에 선 자는 뒤에서 응원해 준 산님을 위해 곧 내려온다. 배려의 미덕이라.
나를 정상에 서게 해 준 수많은 뒷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근디 높은 자리에 오른 누군가는 지 잘나서 정상에 오른줄 알고 뒤에서 후원해 준 사람들을 깔아뭉개나 싶어 슬프다. 오를 땐 내려올 궁리를 하여 정상에 섯을 때의 희열을 즐기며 하강해야 된다. 준비 안 된채 정상에 서면 모두가 불행하다. 누군가처럼 말로만 공정과 상식을 뇌까리며 '국민'을 팔아먹는 위선 점령자가 되선 큰 코 닥치기 쉽다.
석천암을 향한다. 석천암골짝의 바위들은 집체만한 바위들의 전시장이다. 그 바위들은 6.25전란의 트라우마 탓에 무서우리만치 침묵한다. 6.25전란에 육사1`2기 생도들과 7사단소속 군인들이 ‘호랑이 유격대’를 만들어 1950.6.29.일부터 90일간 북한괴뢰군과 격전 산화하여 남침을 지연시킨 아지트다. 수많은 바위굴은 그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간직하고 있어 6월6일엔 불암사에서 천도`위령제를 지내고 있단다.
그 영가들의 진혼곡이라도 된 듯 짙은 녹음 속에서 매미들의 합창이 골짝을 울린다. 일주일, 많아야 보름 남짓 살아가는 매미들의 짝을 찾는 절박한 울음인데~! 7년여를 땅 속에서 내공들인 청음(淸音)이라 열창은 애절하기까지 하다. 석천암 느티나무의 매미들 세레나데는 파란하늘만큼 맑고 울림이 크다. 그래선지 마애불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는 마곡사와 남한산성에서 수련 중인 승병들을 이끌고와 수락산과 불암산 학도암에 진을 치고 한양으로 침입하는 왜군들을 막아내는 승전고를 울렸다. 학도암엔 1819년에 조성된 청신여월영의 탑과 취근선사의 탑 - 마애부도 2기가 있는데, 6.25전란에 호랑이유격대와 유격전을 벌리던 북한괴뢰군의 총탄에 마애부도 일부가 총탄에 파손돼 취근선사의 당호를 영구불명케 했다.
마애불상 옆 암벽엔 몇 군데에 암장(巖葬)이 있다. 바위를 사각형으로 쪼아내서 화장한 분골을 안장한 탁월한 바위묘소인데 우리들의 장례문화로 거국적으로 자리매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묘지나 납골당이 필요 없는 자연친화적인 암장문화 말이다. 석천암과 불암산 사이 계곡인 수 없이 산재한 거암들이 독특한 모형을 하고 있는데 화장 후 암장할 부도석으로 훌륭하다. 불암산을 국립 천연부도밭으로 조성하면 어떨까!
불암산 계곡 바위부도밭은 암장하기 좋은 바위가 널려있는 암산이라 자연훼손염려가 적어 관리하기도 좋을 것이다. 암장면적을 통일하고, 취사를 금지한다면 바위부도밭을 자연친화공원으로도 훌륭하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처럼 공원묘역이나 납골당이 빚는 자연훼손 내지 과도한 유지비용을 줄일 수가 있다.
불암사(佛巖寺)경내에 들어서자 공사가 한창이다. 지중국사가 창건, 도선국사가 중건한 후 무학대사가 삼창했다니 고승들 이름만으로 숙연해진다. 특히 1673년 지십(智十)스님이 석가모니 일대기와 불법전파 사실을 목판에 새긴<석씨원류응화사>가 보물제591호로 지정 장경각에 보관돼 있단다. 장경각 앞면의 ‘大雄殿’ 현판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불암사가 조선조 때까지 우리나라 삼대사찰에 들었다니 위세를 가늠해 볼만하다.
학이 내려앉아 노니는 자연동굴이 있어 학도암(鶴到庵)이라 부르는 암자엔 명성황후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조선시대 무공대사(無空大師)가 세웠다는 학도암 뒤 거대한 단애에 관세음보살좌상이 있다. 높이 13,5m가 넘는 관세음보살상엔 내밀한 사연이 있다. 명성황후는 16살(1866년)에 왕비간택을 받아 15살의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허나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이씨와 사랑에 빠져 첫날밤도 귀인이씨와 딍굴었다.
더구나 이태 후엔 이씨가 고종의 첫 아들 완화군을 낳자 맘고생이 극심했다. 이때 어느 궁녀가 부처님을 만들어 기도를 하면 가피로 소원하는바 이룰 수가 있다고 진언했다. 명성황후는경복궁을 복원하던 석공들을 불러 명당으로 회자 되는 불암산 학도암 큰 바위에 관세음보살을 조성하는 불사를 열었다. 그래 선가? 고종의 사랑의 발길도 잦아져 왕자 이 척을 낳으니 애가 곧 순종이라.
관세음보살상은 명성황후에게 고종의 사랑에 이어 왕자까지 얻어 세자에 오르는 가피를 주었다. 사랑과 자식과 자식의 성공이란 세 가지 행운을 준다는 관음상의 영험이 인구에 회자되어 ‘명성황후 마애불’로도 불리는데, 장안의 부인들과 목하 연애중인 연인들이 사랑을 결실을 기원하는 기도처가 됐다. 첫째 사랑을 얻고, 둘째 자녀를 낳으며, 셋째 자녀가 성공하기 비는 참배객들 속엔 수험생 학부모들도 많단다.
오전10시에 시작한 산행은 오지게 해찰한 탓에 오후3시에 원점 회귀했다. 장마에 흠뻑 젖은 산골의 푸나무들은 여름과의 이별을 서두르는 듯했다. 나는 이 여름철에 뭘 하고 가을을 맞을 수가 있을까? 초목들은 다시 태어난다는 확실한(?) 순환의 법칙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지혜를 안다는 사실에 경외한다. 하여 그들이 나보다 행복할까? 한정된 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자유스럽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오늘 걷는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래 오늘도 행복한 하루였다. 2022.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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