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산 (용문사- 가섭봉- 대장봉- 상원사)
추석연휴 몸 풀이로 나선 용문산행은 용문역사를 나서자마자 빗발이 하나씩 날렸다. 필시 번지수 잘 못 알고 구름떼가 찔끔찔끔 흩날린 새우(崽雨)였지 싶었는데 용문사일주문을 들어서도 그 모양새였다. 은행나무가 그 새우로 새안하고 번들거리며 천왕문 대신 나를 반긴다. 은행나무도 천오백 번쯤 맞은 추석 잘 쇠었지 싶다. 태풍여파로 용문계곡의 풍부한 청정수에다 스님들도 추석음식으로 배설량이 늘어 해우소(解憂所)에 영양분이 넘칠 테고, 스님들이 명절탁주를 몇 말이나 보시했을 테니 말이다.
용문사은행나무는 그렇게 청정수골짝과 해우소에 뿌릴 뻗어 천 오백 년을 무탈하게 버티며 높이67m에 둘레는16m가 넘는 유실수로 동양의 최장수거목이 됨이라.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망국의 한을 품고 서라벌을 빠져나와 금강산을 향하다가, 여주신륵사에 들러 행장을 꾸릴 때 은행나무가지를 꺾어 지팡이삼아 용문산으로 왔었다.
사천왕문 앞에다 그 지팡이를 꽂아두고 며칠 후 금강산을 향했는데 그게 싹 틔워 자란 거다. 마이태자는 사라졌지만 그의 지팡이는 살아나 천년의 애환을 파노라마 시킨다. 1907년 정미항쟁 때 소실 된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천왕목(天王木), 온갖 수난에도 버텨온 호국목(護國木)은 부인들이 쌀 한 말 시주하고 치성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아 대를 이을 수 있다하여 사랑목으로 회자되기도 한다.
또한 매년 10가마정도의 은행 알을 수확케 하는 상서로움을 기리려 주민들이 영목제(靈木祭)란 축제를 지낸다. 용문사경내를 일별하고 물길 따라 계곡을 파고든다. 풍부한 강수량에 물소리가 웅혼하다. 용문산계곡에 들면 흙길 밟기가 서울도심 보다 더 어렵지 싶다. 온통 바위와 돌너덜뿐 이어서다. 바위와 돌멩이를 어르고 뛰어넘는 물살은 물보라까지 일으켜 용문계곡을 뒤흔든다.
그 물바람에 깊은 골짝의 푸나무들이 춤추고 있다. 무생물인 바위와 돌너덜은 어떻게 해서든 푸나무를 키워 살아있는 척 한다. 깊은 계곡에 살아있는 건 물길과 흔들거리는 이파리와 다람쥐와 이름 모를 새들이다. 놈들의 동작 하나의 울림이 새소리와 하모니를 이뤄 오케스트라전당을 만드는 거였다. 그 자연교향악에 취해야 험하고 가파른 바위돌너덜길을 징검다리 밟듯 가뿐히 오를 수가 있다.
계곡에 전시한 기암괴석과 귀목은 한 폭의 사생화로 눈호강 시킨다. 내가 홀로산행을 즐기는 소이다. 일상의 소음과 사회생활의 스트레스 탈출을 위해 찾은 산행이 동행하는 이를 의식해선 오롯한 일상탈출을 기대하기 난망이라. 홀로산행이 위험하지만 그만한 열락에 취할 수가 있는 매력을 놓치고 싶질 안해서다. 마당바위에 올랐다. 완만한 오름의 바위돌너덜길은 여기서부턴 빡센 오르막길로 바뀐다.
물의 노래가 자지러질 만한데 화음은 그대로다. 골짝이 좁아 물길이 합수된 땜이려니! 여태껏 산님들 두 커플과 홀로 산님 합쳐 다섯 분과 마주쳐 인살 했다. 2019년 겨울산행 때와 별다를 게 없이 인적이 뜸한 건 용문산이 상당한 악산인 땜인가? 3년 전 겨울 정상부근까지 오르다가 되돌아섰었다. 적설량이 많고 인적이 뜸해 겁이 났었다. 근디 오늘은 등산하기 딱 좋은 날인데도 적요하기까지 하다.
빡센 계단 올라 능선에 서면 무한대의 사위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뇌까리게 한다. 삥 휘두른 안무 속에 산릉들이 구름 한 자락을 걸치고 파도처럼 밀려온다. 골짝의 오케스트라 대신 장엄한 우주창조의 얼개그림이다. 산만이 주는 마력이다. 정상에 섰다. 아니 지금도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어수선하다. 안테나와 송신탑과 레이더와 창고와 막사가 철조망을 치고 치외법권인냥 당당하다.
그 철조망 옆에 어설프게나마 정상 맛을 보라고 은행잎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했다. 가섭봉의 은행잎! 마의태자혼백이 쓸쓸하게 서성댈 것도 같았다. 경기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문산(龍門山,1157m)의 옛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었으나, 태조 이성계가 날개 달린 용이 들고나는 산이라고 해서 용문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허나 저 아래 신라 신덕왕(913년) 때 창건한 용문사가 있어 용문산으로 불렸다는 설이 정설일 것이다.
하산코스를 장군봉을 밟고 장안사 쪽으로 택했다. 좀 원거리코스지만 내겐 미답(未踏)의 길이어서다. 8~9부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밟는 산길에 투구꽃, 구절초, 물봉선, 초롱꽃등의 야생화가 번갈아가며 추파(?)를 던진다. 나를 꼬셔서 어쩌자는 건지? 암튼 나는 놈들의 화사한 미소에 기분 좋은 산행을 한다. 장군봉은 이름과는 딴판으로 시시하다. 장안사로 내달리는 하산길이 줄곧 바위사이로 난 가파른 길이라 여간 조심해야 했다.
철재가이드라인과 밧줄에 매달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한 사람도 마주 치지 않은 이 코스를 선택한 무모함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용문산은 어느 코스건 신경 곤두서게 한다. 1천m가 넘는 산세가 깊고 가파른데다 바위길인 상원사코스를 어떤 정보도 없이 도전한 나의 무식을 반성케 했다. 이런 험악한 산세가 은둔지로 적합하여 쫓고 쫓기는 게릴라전쟁터로 각광받았지 싶었다.
1907년 항일의병의 발아 점이었던 양평은 용문산이 의병의 아지트였던 탓에 사나사와 상원사와 양평지역 남한강가의 일백리길 안의 마을이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참사를 당했다. 이 험악한 바위벼랑을 오르내렸을 정미의병들의 고난의 행군을 상상해 봤다. 당시 영국신문 기자인 F. A. 멕켄지(Fredric A Mckenzie)는 이곳까지 와서 의병들의 활동을 취재했는데 아래 대화내용 한 구절을 소개한다.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봉기한 정미의병들이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치르며 항전하기 알맞은 지형과 지세를 갖춘 용문산에서 사즉생의 의기로 혈투 산화했던 것이다.
일본군에 의해 항일의병이 진압된 후 용문산의 사찰들은 의병들의 활동을 지원한 탓으로 사나사와 상원사는 일본군이 사그리 불질러버렸다. 나는 오늘 그 통한이 서린 상원사를 들러보고 싶어 미답의 등산길을 택했는데 험준한 산세가 의병들의 아지트로 딱이란 공감이 들었다. 상원사 계곡도 깊고 웅숭하여 물의 노래가 낭창했다. 11시에 시작한 산행이 오후4시에 상원사에 이르렀다. 근년에 창건한 사찰들이라 청갈했다.
대웅전안을 기웃거려본다. 6.25사변 때 남침하는 북한군의 아지트로 사찰이 이용돼 그걸 예방키 위해 아군은 강원도 월정사 등의 사찰을 소각시키면서 후퇴했었다. 상원사에도 국군이 들이닥쳐 절을 소개시키려 했다. 대웅전서 좌선하던 주지스님 한암이 군인들의 닥달에 가사와 장삼을 차려입고 법당에 정좌한 채 "자, 이제 불을 지르게."라며 엄숙하게 일갈했다.
해도 군인들이 막무가내로 퇴실을 강요하자 "당신들은 군인이니 명령을 따라 불을 질러라. 나는 불제자이니 내 몸도 함께 태워서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할 수 없다는 듯 국군장교는 상원사의 문짝을 떼어내서 불 지르고 물러갔다. 이 일화는 당시 인근부대에서 군무한 장교 선우휘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후에 <상원사>라는 소설로 썼다. 고승들의 숭고한 불심은 호국불교사상으로 승화되어 중생들의 귀감이 돼었다.
상원사를 빠져나와 포도를 걷다가 아차! 뒤늦게 길 잘 못 든 걸 알았다. 용문사쪽 산길을 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포도가 상원사행 주도로여서 어느 쯤엔 마을과 버스정류장이 있으리란 기대에 차 냅다 잰걸음 질했다. 오후4시반이 지나쳤다. 4km쯤 될 포도를 질주하느라 다리와 발바닥이 불편했다. 용문면 연수리 버스종점에 닿았을 땐 5시20분. 10분 전에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다음 버스는 7시10분이다. 낭패였다. 택시를 호출하려는데 경찰순찰차가 나타났다. 손을 들었다.
차를 세우고 차창을 연 운전석의 경찰이 "왜요?"라고 물었다. "초행인데 시내행 버스가 2시간 후에 있네요" "여기 타세요" "괜찮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정거장에 내려주시면 됩니다" "어디 가시게요?" "서울행 기차요" "혼자산행입니까?" "예, 장안사에서 용문사로 갔어야 했는데 초행이라---" "저도 산행 즐깁니다만 혼자산행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예, 암튼 고맙습니다"
두 분 경찰님들은 나를 용문전철역사 앞에 내려줬다. 황송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주춤거리다 아까 "명함 있으면 주실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용문파출소 권병정ㅇㅇ"이라고 했던 성함을 다시 확인하고 헤어졌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다'란 말을 실증한 공복들이었다. 낯선 이를 불신하는 게 당연시 하는 세태에, 코로나팬데믹에 선뜻 호의를 베푼다는 일이 가당치 않은데 두 분 경찰님은 나를 감동케 했다. 명함을 달랬던 건 졸작이지만 나의 산행에세이 책 <숲길의 기쁨을 좇는 행복> 한 권을 선물하여 성의에 답하고 싶어서였다.
땅거미 내려앉는 오후6시11분발 전철에 올랐다. 얼굴도 모르는 두 분 경찰님이 나의 뇌리를 붙잡고 뿌듯하게 한다. 성실한 분들로 해서 세상은 살맛이 나고 발전하면서 역사는 이어진다. 먼저 다가서 포용하고 베풀면 세상은 밝고 살판날게 빤히 보이는데 우리네 위정자들은 왜 그짓에 인색할까? 공정과 상식은 립`서비스용어가 아님일 텐데? 오늘도 두 분의 지팡이 호의로 더더욱 행복한 피날레였다. 피곤이 전신을 애무한다. 차창에 기대 스르르 눈을 감았다. 2022.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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