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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왕들의 사냥터 검단산(儉丹山)

왕들의 사냥터 검단산(儉丹山)

현충탑에서 산행 들머리했다

검단산자락 곱돌계곡의 아침은 풋풋했다. 연둣빛 새싹들이 진초록이파리로 물들어가는 골짝에 내려앉는 햇빛이 신령스럽다. 짙은 향 뿜어내는 아카시아꽃다발이 계절의 여왕 5월을 찬미한다. 싱그런 초록숲길에서 감지하는 자연의 신비스러움은 행복의 순간이 어떤 것인가를 어렵프시 깨닫게 해준다. 호국사를 찾아드는 호젓한 숲길은 오색연등 퍼레이드를 펼쳤다.

호국사입구
호국사종각의 석탄 봉축등불

이 계곡의 곱들약수가 회자되지만 호국사약수는 비장수(秘藏水)다. 한 모금 축이고 종각을 휘돌아 숲속을 뚫은 계단을 오른다. 이 비밀스런(?) 숲 계단은 검단산정상에 이르는 곱돌계곡능선길이라고 보살님이 알려줬다. 비밀계단 끝머리에 동자상들을 품고 있는 원만불(圓滿佛)석상이 있다. 배불뚝이 좌상은 빙그레 치뜬 눈웃음이 익살맞다.

천원짜리 지패를 품은 석불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질 않는다
호국사 종각 뒤에서 원만불석상을 오르는 계단, 이 계단이 정상으로 통하는 호젓한 등산로이기도 하다

앙증맞은 원만불은 곧장 뒤편에 빼곡 찬 송림(松林)바다로 바톤을 넘기는데 산릉을 올라타는 갈지자 등산길은 삐둘빼둘 여간 가파르다. 인적이 뜸한 호젓한 숲길은 소나무와 갈참나무의 세상이다. 짙푸른 갈참나무 이파리에 잘린 햇빛이 녹음터널을 기웃대고 어디선가의 인기척이 간헐적으로 숲을 배회한다. 저 아래 골짝에서 사람소리가 맥놀이 됨이라.

호국사을 벗어나면 울울창창한 잣나무밀림지대와 맞딱드린다
글참나무의 향연, 검단산은 굴참나무 군락이 많다

문득 골짜기에서 병사들이 산짐승들을 능선으로 몰아 협공사냥 하는 수렵대회 생각이 났다. 그런 수렵대회는 군사훈련의 연장선으로 왕이 직접 참가하는 수렵을 강무(講武)라 했는데 조선조에 여기 검단산에서 자주 행해졌다. 세종대왕도 여기서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한 강무기록이 있다. 특히 태종은 검단산의 강무를 즐겼단다.

전망대에서 조망한 하남시가지와 한강의 팔당대교

태종재위14년 3월 18일에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어 광주(廣州)의 성황(城隍)과 검단산의 신(神)에게 제사지냈다. 다음 날, 병사들을 풀어 신하들과 사슴 8마리를 사냥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사냥가기 전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음을 짐작케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검단산은 한성백제(漢城百濟)때부터 제사를 지냈던 위례성의 숭산(崇山)이며 진산(鎭山)이었다.

싱그럽고 푹신한 굴참나무 숲길▲은 때론 발마사지를 위한 바위길▼로 이어져 기분 좋게 한다

왕은 위례성의 외성(外城)이던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온조왕 때부터 근초고왕 26년까지 370년을 도읍으로 삼았던 곳으로, 짝수 해 음력10월 초하루에 검단산 산신을 위한 산신제를 지냈단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북서쪽엔 북한산과 관악산을 비롯한 높은 산들이 휘둘렀고, 동남쪽엔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요새다. 8부 능선쯤에서 처음으로 노익장 홀로산님을 조우했다.

두물머리와 팔당호가 조망된다

“검단산정상 가는 길이 맞습니까?”라고 내가 묻자 “예, 주등산로가 아니고 가팔라선지 산님들이 안 다녀 호젓하다”고 웃으면서 친절을 베풀어 줬다. 전망바위 갈참나무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하남시가지와 한강일대가 한 폭의 전원도시로 액자에 담긴다. 강바람일까? 갈참나무 잎을 흔들던 미풍이 간당간당 매달린 연분홍철쭉꽃을 만지작거리다 떨어뜨린다. 만개했을 땐 볼 만했을 텐데!

검단산정상의 정자
정상 쉼터를 지키는 소나무의 멋진 폼

녹음 속으로 파란하늘 기웃대는 바위에 걸터앉아 배낭을 풀었다. 숲을 살랑대는 강바람에 심호흡을 하며 눈부신 신록의 5월을 몸뚱이에 휘감는 삼림욕에 빠져든다. 5월의 싱그러운 자연에 파묻히는 사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호사가 아니다. 검단산은 영험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가뭄에 애태우던 성종임금이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안 내리자 사복을 검단산에 보낸다.

‘검단산에서 짐승을 쫓으면 비가 온다하니 빨리 사복을 보내서 노루와 사슴을 사냥하여 중국사신의 연향(宴享)에 쓰면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전지(傳旨)를 내렸다<성종실록>. 정오에 정상에 섰다. 갈참나무 숲 사이로 한강이 도도히 흐르고 건너편에 예봉산준령이 바짝 다가선다. 팔당댐이 숲속에 숨어들고 그 뒤론 두물머리가 아삼하다. 팔당댐 상류 조안면의 다산(茶山)정약용 선생의 생가 터도 눈짐작이 된다.

예봉산의 천문대가 아련히 보인다. 흰꽃 만개한 팥배나무는 꽃 떨군 자리에 빨간열매(팥)를 달고 새들의 겨울살이를 도울 것이다

이맘때 읊었을 다산의 <검단산의 꽃구경(黔丹山賞花)>이란 시 한 수를 옮겨본다.

“茅亭會酌春酒 모정에 모여 봄 술 마실 때

柳岸前臨小橋 버드나무 언덕 앞에 작은 다리 있네.

雨葉如黃似綠 이슬비 내리는 연초록 잎들

煙條乍靜還搖 안개 속에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만개한 아카시아꽃과 마지막여정에 든 연분홍철쭉▼

유길준 묘역 쪽으로 하산한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가파른 돌계단은 지겨울 만큼 이어진다. 하산코스로 선택하길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돌계단을 내려서며 간간히 체감하는 풋풋한 신록의 향과 녹음을 투영하는 햇빛은 곧추선 신경을 위무한다. 때론 감미로운 미풍에 얹혀온 5월의 따사로움은 숲을 소요하는 행운을 만끽케 했다.

팥배나무흰꽃을 월계수로 쓴 한강과 팔당대교

팔당대교를 향하는 한강과 숨바꼭질하는 하산 길은 기이한 암송의 동거와 칼바위능선이 산행의 맛깔에 취하게 했다. 옛날 저 아래 한강은 전국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산(物産)의 수로였고 그 집산지가 팔당대교 옆의 창우동(倉隅洞)이었다. 하여 검단산의 이름도 '검사하고 단속하였다'는 창우동에서 유래한단다. 전절역사까지 생겨 이래저래 유명세를 탄 검단산은 수도권의 사랑받는 명산으로 거듭날 판이다. 창우동으로 내려간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2022. 05. 09

팔당대교
호국사종루
검단산정상의 쉼터
▲끝도 갓도 없는(?) 자연석계단은 신록의 향과 녹음을 사르는 빛의 향연이 고행을 앗아간다. 데크계단이 아닌 자연적이어서 좋았다▼
단뭉나무 군락지의 5월의 창공
옛날 물산 수송로였던 한강과 예봉산의 기상대
▲칼바위능선은 산행의 또 다른 맛과 멋을 선사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포옹하는 두물머리
하남시가지 뒤로 서울강남시가지(롯데타워)가 조망된다
천혜의 조망대. 왕들은 강무 뒤 여기서 멋진 피날레를 즐겼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