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강희맹의 묘역에서

(이건 미친짓이다)

강희맹의 묘

雪梅(설매)  -사숙재(私淑齋)-

"남쪽 향한 가지위에 싸늘한 하얀 꽃 南枝上寒白

하얀 눈의 얻음인가 정신이 드는 데 得雪更精神

맑음의 향기이기에 賴有淸香動

천지 봄을 알았다네 始知天地春"

남향받이 매화가 터뜨린 꽃망울과 향기로 봄을 알아 챈 기쁨을 노래한 사숙재의 <설매>란 시를 대하니 아마 이맘때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티브이에선 남녘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단다. 울`아파트단지정원의 산수유가 노란 꽃 수술을 내미느라 혼신을 쏟고 있으니 코로나19도 자연 앞엔 맥을 못 추나 싶다. 차원(次遠) 삼원(三遠)조카님이 나를 초청하여 봄맞이 나들이를 시켜줬는데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관곡지(官谷池)와 강희안, 희맹 형제분의 사당과 유택이었다.

                      강희맹의 독조도(獨釣圖)▶

비각 앞의 차원,삼원 형제

조선조 초기 문신으로 유명한 희안, 희맹 형제분에 대한 토막상식과 진주강씨인 나의 까마득한 선조라는 간단한 사실만을 인지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 두 조카님이 나의 과문했던 뿌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봄나들이에 초청해 고마움과 기쁨, 그리고 문외한으로 살아왔던 나의 삶이 면구스러웠다. 관곡지 연꽃단지를 낀 야산에 희안,희맹 두 분의 유택과 재실이 있는 산소가 있다. 사당 연성문(蓮城門)은 연성재(蓮城齋)에 드는 삼문인데 닫혀있다. 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 탓인가?

사당정문 - 연성문

연성문기둥에 진주강씨문량공휘희맹재사(晉州姜氏文良公諱希孟齋祠)란 현판이 걸렸다. 재각을 우회하여 철재울타리 사립문을 통해 묘역에 들어섰다. 넓은 묘역과 신도비, 사우와 재실은 관리인(大자항렬의 나와 같이 25대손)의 바지런함으로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다. 조카님들 안내를 받아 묘소를 참배한다. 사숙제 강희맹의 묘를 중심으로 형님인 인재공 강희안묘를 비롯한 십 여기의 가족묘역이였다. 묘역을 참배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5년 전(1996년)쯤 세운 신도비와 그 이전 근래에 세운 비석들이 온통 한자투성이란 점이다.

신도비, 탐방객들 중 비문을 읽을 분이 몇 분이나 될까?

전면의 비명이야 한자로 쓴다지만 삼면을 꼬박 채운 한자비문은 누구를 위해, 누가 보라는 비석일까? 과연 비문을 읽고 해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희안,희맹 형제분도 세종임금을 도와 한글창제와 보급에 조력하시고, 직접 쓰신 저서도 한글을 혼용하여 많은 백성들이 읽게 하시었다. 500여 년이 흘러 한글세대인 지금 알량한 후손이 문중의 재산 - 거금을 들여 읽을 수 없는 한자석물을 세우는 짓은 미친짓이다.

더구나 묘역 앞의 대지를 매도하여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전망을 망치도록 건축을 허용하고, 그 대지매도대금 250억원(?)의 모호한 사용처도 밝혀야 한다. 이런 무모한 행위를 기획하고 용인한 문중의 관계자들은 명확한 시말서를 공표하여야 '얼빠진 불량후손'이란, '간덩이 큰 도둑놈'이란 누명(?)에서 자유로울 것이다. 세상에서 젤 치사한 놈은 곗돈과 문중재산을 훔친 놈들이다. 250억원은 진주강씨문중을 위해서든 아님 사회공익사업에 사용해야 한다.

1996년도에 세운 신도비, 모두 한자음각 비석이다

(법인)장학재단이나 공익재단을 세워 강문(姜門)의 후손이나 유망청소년의 학구열에 쓰여야하고, 사회문화발전에 기여금으로 사용한다면 금상첨화일 테다. 그렇게 해야 희맹.희안 선조분들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자랑스런 후예일 것이다. 희맹,희안 두 분이 오랜 세월을 조정에서 헌신할 수 있었던 건 사욕 없는 겸양의 선비정신에 투철한 삶 땜이었다. 사육신에 열루된 희맹이 살아남은 소이는 청렴과 봉공이었다. 

묘역 앞의 아파트장벽으로 전망이 막혔다

희맹은 어느 날 몹시 아파 자리에 누워서도 형님을 생각하며 예를 갖춰 시를 읊었다. <病餘吟成(정원에 사람은 없고 새만 날기를 바라네)>란 시다.

남창에 종일토록 앉아 세상 생각 잊으니 南窓終日坐忘機

정원에 사람 없고 새만 날기 배우는데 庭院無人鳥學飛

가는 풀 그윽한 향기 찾기 어려운 곳에는 細草暗香難覓處

엷은 연기와 지는 햇살에 비가 보슬보슬 내리네 淡煙殘照雨霏霏

"형님, 접때 형님께서 ‘채자휴에게 산수화 한 폭을 그리다’라는 시제의 그림은 형님만이 가능한 걸출했던 작품이었습니다. 멋진 그림에 화제(畵題)도 일품이었지요. 저도 오늘 지난번에 쓰던 시를 탈고하려 하오니 한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형 희안에게 ‘선문답(先問答)’하듯 하며 쓴 시다. 겸손과 우애가 넘치는 걸 절감케 한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년, 호는 사숙재私淑齋, 시호는 문량文良)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농학자였다.

사당 후면

세종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때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비명을 짓고 건립했으며, 1988년에 세운 비각(碑閣)의 글씨는 홍문관박사 박증영(朴增榮)이 쓰고 전자(篆字)했다. 묘역입구에 재사(齋舍)인 연성재(蓮城齋)는 1965년 건립됐다. 성종의 원자인 연산군이 병약하여 왕은 선비 중의 선비인 강희맹의 아내 안씨부인에게 돌봄을 청했다. 희맹의 가풍을 어여삐 여긴 소이다. 폐모로 엄마 없이 자라 모정이 그리웠던 연산에게 안씨부인의 극진한 보살핌은 모성애를 대신함 이었다.

▲강희안의 묘▼

연산이 등극하여 어느 날 희맹의 집 앞을 지나다 안씨부인 생각이 나서 집안의 소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던 명문가였다. 묘역 좌측에 자리한 강희안(姜希顔1418~1464년, 호는 인재仁齋)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삼절(三絶)로 명망이 높았다.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 1463년에 중추원부사가 된 희안은 소헌왕후의 조카였다. 겸양한 그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 유품을 남기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유언했다. 하여 그의 그림이나 문집이 없다시피 한다.

세조대에 주조한 을해자(乙亥字)금속활자가 강희안의 글씨다. 그의 저서<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소나무, 향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 난초, 서향, 연꽃, 석류, 치자나무, 월계화, 동백, 백일홍, 영산홍, 귤나무, 석창포 등 16종의 나무 특성과 품종, 재배법 등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더하여 희안은 국화를 통해 기다림의 미학을, 연꽃에서 순수함을 발견하고, 매화에게서 꿋꿋한 생의 의지를 배울 수 있다고 꽃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함을 일깨우셨다.

강희안이 ‘소나무를 읊음’이란 시<四友亭詠松>이다. 

“階前偃盖一孤松 계단 앞을 덮어 드리운 한 그루 홀로선 소나무

枝幹多年老作龍 가지와 줄기가 오래되어 용의 형상 되었네

歲暮風高揩病目 세모에 바람 높이 불어 병든 눈을 비비고 보니

擬看千丈上靑空 마치 용이 천길 높이 하늘로 오르는 것 같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죽임당하고 연류됐단 혐의를 받은 강희안은 화를 모면하고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중추원부사 등 고위 관직을 지냈다. 당시 성삼문이 심문받을 때 강희안이 연루되었냐고 세조가 묻자 “선왕의 명신들을 다 죽여도 그만은 남겨 두고 쓰시오. 진실로 어진 사람이오.”라고 말하여 화를 면했다. 
출처: https://daewha.tistory.com/ [비움의 행복]

주변에 있는 묘는 강희맹의 양부(養父)인 강순덕(姜順德, 1398~1459 이숙번의 사위, 사헌부감찰), 강희안(姜希顔, 1418~1464 인수부윤), 장남 강귀손(姜龜孫, 1450~1505 우의정), 손 강태수(姜台壽, 1479~1526 순천부사), 증손 강복(姜復, 1508~1529 충좌위 부사용), 고손 강극성(姜克誠, 1526~1576 장단부사)의 묘 등이 있는 가족묘역이다. 묘역 앞의 관곡지(官谷池)는 옛날엔 하지골(荷池谷)이란 마을이었다. 희맹이 중국사신으로 가서 남경에 있는 전단지에서 전당홍(錢塘紅)이란 새로운 연꽃씨를 들여와 심었던 곳이다.

관곡지사당

전당홍은 흰색바탕의 꽃잎 끝부분이 옅은 홍색을 띈다. 희안의 사위였던 안동권씨 권만현이 관리를 하다 슬하에 딸만 넷이라 상속을 받아 대대로 권씨 가문의 관리를 받게 된다. 연꽃을 좋아한 왕들이 관곡지에 6명의 관리를 두어 관리케 하였고, 지금은 시흥지자체에서 대대적인 연꽃축제장을 열고 있다. 여름철 연꽃바다를 이룬다는 관곡지를 올 여름엔 꼭 찾을 참이다. 선조들의 훌륭한 발자취를 더듬으며 뿌리 찾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차원형제님들이 무지 고마웠다. 더욱이 선고들의 행적에 관한 역사공부를 짬짬이 하고 있는 조카 삼원님이 대견스러웠고, 동행함에 뿌듯했다. 행복한 봄나들이였다.  2021. 03. 10

▲관곡지와 전당홍▼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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