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호국돈대길에서 비 맞은 장닭
오전 열시 반쯤의 갑곶돈대, 잔뜩 찌푸린 회색하늘은 실비를 뿌리고 있다. 장맛비로 남쪽은 난리인데 부러 난 오늘 강화섬 호국돈대답사에 나섰다. 경인서북지역은 10~30mm가량의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는 땡볕에 17km트레킹하기 보단 나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코로나19불안과 장맛비는 갑곶돈대와 순교성지, 강화전쟁박물관을 찾는 발길이 끊겨 나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대포를 앞세운 돈대에 올라서니 한강입구 염하(鹽河) 와 강화대교가 저만치 다가선다.
이 천혜의 요새를 잘만 방어하면 강화도는 ‘한강 아래 꽃피는[江華]섬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될 수가 있을 터였다. 본격 호국돈대길(강화나들길 제2코스 ; 갑곶돈대~초지진)트레킹에 들어섰다. 실비는 풀숲을 홍건이 적시고 염하를 만수위한 탁류가 도도히 흐른다. 발 묶인 어선이 강가에, 그 갯벌에 게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강 건너 김포강변풍경이 수묵화처럼 아른거린다. 그날 피란민들은 도강하려고 살얼음 강에 뛰어들어 염하는 하얀 꽃송이로 수놓듯 했다. 오랑케에 잡혀 노예로 팔려갈 수는 없어서였다.
장마 탓인지 누런 탁류는 만수위인 채 흐르는 듯 멈춘 듯 종잡기 어렵게 음흉스럽다. 더러미선착장을 지나니 양식장의 물 풍차소리가 말없이 흐르는 염하탁류의 적요를 깨뜨린다. 장어양식장일까? 가랑비 흠씬 퍼먹은 풀잎들이 내 신발을 낭창하게 적신다. 바람막이점퍼속의 내 등적삼도 끈적댄다. 해도 여름땡볕보단 낫겠다는 자윌 하며 염하둑길을 걷는다. 이 넓디넓은 염하를 동행하는 사람은 한 시간여가 지나도록 나 홀로다.
염하 가장자리가 한참을 붉은 경징이풀밭이다. 별 쓸모없는 염생식물인 나문재를 강화도에서는 '경징이풀'이라 부른다. ‘경징이 풀’이란 이름은 병자호란 때 강화검찰사(강화경비사령관 겸 한성판윤) 김경징을 말한다. 그는 인조가 체찰사(전시총사령관)로 임명한 반정공신 김류의 아들이었다. 김경징이 지네 가솔(家率)과 피난짐50개를 먼저 도강시키느라 선착장을 봉쇄한 탓에 강화를 목전에 두고도 도강할 수 없었던 파난민들은 원망의 대상인 김경징을 빗대어 쓸모없는 풀 나문재를 경징아, 천하에 몹쓸 놈 경징아. 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흘 동안의 피난길에 도착한 세자빈과 봉림대군일행도 이틀 만에 강을 건넜으니 뒤쫓아 온 청군한테 강간과 노예란 공포에 떨고 있던 피난민들은 살얼음 강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예로 끌려간 백성이 10만명이 넘는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됐다. 용진전에 닿았다. 1232년 몽골침입 때도 강화로 천도한 고려가 39년 동안 버텨냈고, 임난 때 왜군이나 정묘호란 때 후금군(後金軍)도 침입을 포기한 섬이었다. 근디 병자호란 땐 한 달 보름여 만에(1/22일) 박살 초토화가 돼 남한산성의 인조는 청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해야 했다(1/30일).
용진전에 닿았다. 성루 앞 담장에 능소화 한 무더기가 우중에 생글 웃으며 마중한다. 근디 막상 누각은 출입금지였다. 누각아래 대문짝은 문고리가 떨어져 자빠졌는데도 성벽깃발은 초연하게 나붓대고 있었다. 겉은 멀쩡하고 속은 문드러진 게 그때의 한성판윤이나 지금의 서울시장의 한 단면 같아 씁쓸했다. 용담돈대에 올라섰다. 상수리나무가 넓고 휑한 원형돈대의 파수꾼처럼 독야청정하다. 나는 몇 년 전 초봄 잎 돋기 전이어선지 느티나무로 오인했었다.
돈대에서 건너편 김포강변은 단 숨에 헤엄쳐 갈 듯 싶게 가깝게 보인다. 아마 이 해협도 피난민들의 하얀 시신들로 꽃피웠지 싶다. 한심스런 아들 탓에 죽어간 피난민들한테 죄송한 나머지 김경징의 어미는 자살한다. 그때의 원혼들의 눈물일까? 갑자기 작달비가 쏟아졌다. 돈대석굴 속으로 피신했다. 어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늘이 잿빛이 돼서다. 굵은 빗발은 쉬이 물러서질 않아 보인다. 종주를 할 거나? 포기해야 되나?로 빗속 석굴에서의 갈등은 더더욱 심난하게 한다.
용담돈대를 내려와 나들길 아닌 차도 옆 자전거로를 거닌다. 택시나 버스를 탈 요량이었다. 빗발 속에서 화도돈대에 이르도록 빈 택시 한 대를 발견 손을 흔들었으나 물벼락만 튀기곤 사라졌다. 빗발이 지지러든다. 다시 나들길-호국돈대길로 들었다. 느닷없이 꽹과리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우중에 노천쉼터에서 바다용왕님을 향해 푸닥거릴 하고 있었다. 물 범벅이 된 제물 앞에 네 명이 비 흠씬 젖어가면서다. 믿음이란 건 불가사이하다.
자기위안을 위한 핑계 짓이 미신이란 생각을 하면서 누런 염하물길을 따라 동행한다. 사방팔방을 훔쳐봐도 움직이는 동물은 아까 푸닥거릴 하는 네 명 이외 나 홀로다. 우쭐해진 낭만이스트란 생각에 빗속의 나 홀로를 즐겼다. 화도돈대를 오른다. 작달비에 황토길과 석축이 말끔하다. 석문에서 본 원형석축 안의 초록 잔디마당은 흡사 경기장 같았다. 이 깔끔한 경기장을 나 혼자 소유한다(?)는 뭉클한 감정은 비밀스런 연정처럼 벅찼다. 광성보가 안무 속에 자태를 들어 내보인다.
병자호란의 치부를 기록한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에 “나라의 수치에 의(義)에 죽은 충신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란 대목이 있다. 또한 “배를 탔던 여성 3명은 적병이 엄습하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졌다. 토굴에 숨어있던 여인은 적병이 불을 질렀는데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고 말았다.”라고 <연려실기술>의 기록도 있다. 쪼잔한 인조나 김경징 같은 벼슬아치를 빗댄 말일터다.
오두돈대를 내려서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도열해있는데, 풍진세월 켜켜이 지켜본 그 고목들 사이로 펼쳐지는 염하의 풍광은 한량없이 평화롭다.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고 헤아릴 수 없는 원혼들을 다 진무했다는 듯~! 그 느티나무가 서있는 성벽이 외성이라 당시의 옛 성곽의 실체를 엿볼 수가 있다. 당시엔 강변외성이 튼실했고 엄동설한 정월인지라 수성만 제대로 했으면 강화함락은 모면했을 터다.
근디 김경징은 살얼음 겨울한강을 청군이 도강할 수 없다고 배 만들고 있단 첩보를 무시했다. 글다가 보름 만에 목선 40여 척으로 도강한 오랑캐에게 강화섬은 살육장이 됐다(1/22일). 4.19혁명 후 들어선 장 면정권이 구테타설을 수 없이 듣고도 장도영육참총장말만 믿고 5.16구테타에 무릎 꿇듯 말이다. 또한 “갑곶에서 연미정까지 몽둥이를 들고 지키는 사람조차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엔 한탄한다. 우중의 나들길은 흙길이라 진창이 돼 간혹 자전거로를 걷는데 질주하는 차에 튕기는 물세례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광성보에 들어섰을 땐 용케 가랑비가 내렸다. 용두돈대, 손돌목돈대를 아우르는 광성보는 볼거리가 많은 쾌적한 공원이기도 하다. 축 늘어진 소나무열병을 받으며 손돌목돈대를 오르는 안무 낀 송림 길은 꿈길 같다. 신미순의총과 쌍충비각을 훑는데 여기서 오늘 첨으로 중년커플을, 그 아래 쉼터에서 또 한 커플을 만났다. 차림으로 봐 인근주민이지 싶었다. 1866년 병인양요로 강화섬은 프랑스군(1000여 명)이 완전 점령하여 염하해협은 프랑스 군함 7척이 장악했다.
조선군 양헌수 대장(1816∼1888)이 달빛이 어두운 음력9월28일 손돌목을 건너 진덕진에 기습상륙하기로 했다. 군선3척에 병사549명을 태운 양 대장은 손돌목을 건너 덕진진에 상륙, 정족산성에 진을 치고 프랑스군을 기다렸다(11월7일). 11월9일 조선군을 얕잡아 본 프랑스군 160명은 야포도 없이 공격하자 조선군이 일제히 매복사격하여 적군사망6명, 부상60여 명을 남기고 퇴각시켰다. 하여 프랑스군대는 40여 일 만에 강화섬에서 물러났다. 조선군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결과였다.
이때 프랑스군은 행궁 외규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류 300여권을 약탈해 갔으나 정족산성 안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족보가 온전히 보전됐던 것이다. 해협이 좁고 큰 바위가 두 개나 솟아있어 급물살을 이루는 손돌목이 용두돈대 아래에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급물살 땜에 억울하게 죽은 어부 이름이 손돌이다. 강 저쪽의 김포덕포진과 여기 용두돈대 사이는 딴 해협보다 100여m는 좁다. 손돌이 고려 고종임금(1213∼1259)을 배에 태우고 이곳 급류를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배를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불안 해 하자 손돌은 “제가 잘 아는 물길입니다.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일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의심 많은 고종은 당장 손돌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죽어가면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목은 잘렸다. 손돌목을 벗어난 고종이 ‘아차!’하고 후회하며 ‘묘나 잘 써주라’라 했다. 손돌의 묘는 김포 덕포진 북쪽해안에 있다. 해마다 손돌이 죽은 음력10월 20일쯤엔 이곳 해협에는 큰 바람이 불고 날씨도 매섭다.
‘손돌바람’이라 부른다. 잔뜩 흐린 날씨에 손돌바람 대신 빗발이 내려며 소용돌이 급물살이 뒤척이는 건 여름이라 선가보다. 광성보를 빠져나오는 나들길은 원시수풀속이다. 장맛비에 버섯이 살판을 벌리고, 자빠진 나무는 몽니피우는 듯 길을 막으며, 물러터진 푸나무는 애먼 나한테 물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지들-자연을 그리 좋아하는데, 그래 우중에도 지들을 찾아 왔는데, 심통을 부리는 것은 지들도 내가 싫어서가 아닌 반가운 애정표현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려울수록 긍정적인 삶은 생활자체를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덕진진 남정포대진지에 섰다. 여긴 외성이 낮았던지 십 여대의 대포가 염해를 향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양헌수대장이 덕진포에서 출발, 손들목 급류를 타고 도강한 곳이 여기다. 조선조의 숱한 외침에 모처럼 승전보를 울린 정족산전투는 프랑스를 내쫓아냈던 쾌거였다. “말에 오르면 집을 잊고, 성을 나서면 내 한 몸 잊었노라(上馬忘有家出城忘有身)”라고 정헌수대장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아담한 연못이 우주를 품고 그 우주를 꿰뚫던 백로 한 마리가 훼치며 비상한다.
나도 염하가 마련해준 우주를 오롯이 온몸으로 즐기다 이제 코로나19속 버스에 오르기 위해 초지진을 향한다. 초지진에서 정족산성트레킹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오후5시가 넘었다. 피곤이 스멀스멀 몸뚱일 죄어온다. 삼거리에서 버스터미널방향을 물을 데가 없다. 아니 인적이 없다. 처음 들어 선 낯선 곳 인적 없는 길가에서 신호대기 중인 트럭운전사에게 서울행버스정류장을 물으니 저만치 언덕배길 가르킨다. 기다림처럼 욕된 일도 드물다.
문득 어릴 적에 봤던 비 맞은 장닭이 떠올랐다. 볼품없는 놈도 고갤 치켜들고 주윌 살피는 행동은 애리했었다. 노천버스정류장은 부슬비 땜에 뻗쳐오는 다릴 쉬게 할 앉을 자리도 없다. 반시간여를 그렇게 가랑비 속에 서서 비 젖은 장닭이 돼 있었다. 신발과 바지가 오물로 얼룩졌어도 마땅히 씻을 데가 없다. 그래도 완주한 뿌듯함이 기분 좋은 하루였던 건 틀림없다. 나 홀로 한량 짓 맘껏 하며 침묵의 행군을 오지게 즐겨서였다. 2020. 07. 27
# pepuppy.tistory.com/675 를 클닉하면 2017년05월에 답사했던 "한 맺힌 호곡돈대길 울음소리"를 볼 수 있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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