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의 유배지 강화,교동에서 이지(李祬)를 기리다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길 기다리기라도 하듯 오늘 깨복쟁이 친구C와B와 동행 강화`교동도 나들이에 나섰다. 김포송정역에서 강화도, 다시 교동도까지 2시간 반쯤 버스를 탔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노닐고, 산야는 노을색이 녹녹히 묻어나 가을로 치닫고 있었다. 코로나19는 버스속의 승객들 마스크에서만 놀고 있나 싶게.
울`셋이 강화나들길9코스를 걷자고 한지는 달포 전쯤이다. 가을햇살 감미로운 정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대룡시장에 들어섰다. 황해도연백지방의 피난민들이 전쟁이 끝나면 바다 건너 빤히 보이는 고향에 가려고 머문 곳이고, 그렇게 세월에 한을 녹이며 삶을 꾸리다보니 시장판이 형성된 곳이란다.
땅에 바짝 엎드린 집들은 어깨동무하듯 엮여 좁다란 골목을 향해 문짝을 단채 생필품 등을 물물교환 했을 테다. 그렇게 옹색한 장터는 좁고 긴 골목길을 형성하여 6.25전쟁 트라우마 박물관이 된 셈이다. 우린 해성식당에서 체온체크를 한 후 소머리국밥을 시켰다. 국밥도 먹을 만했지만 순무김치 맛이 맛깔스러웠다.
김장배추뿌리맛과 향을 알싸하게 느끼게 한 순무는 이곳의 특산품이란다. 여름철 긴장마로 무`배추 값이 금값이란 데 주인은 한 접시를 선뜻 더 내놨다. 시장골목을 어슬렁대다가 연산군유배길을 향했다. 근디 연산군유배처는 공원조성공사로 출입금지였다. 화개산등산로 약수터길 먼발치에서 엿본 위리안치 초가와 찜질석굴로 그나마 위안삼아야 했다.
교동도는 연산군, 광해군을 비롯한 왕족들의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한양에서 가까워 관리하기 쉽고, 섬이라 탈출위험도 없어서였다. 수많은 세자와 왕손들이 유배 와서 비명에 간 교동도에 유독 내 마음을 애석케 한 사건은 이지부부의 유배였다. 이지(李祬)는 1568년 광해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해가 즉위하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글고 얼떨결에 세자빈에 오른 박씨는 조정대신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뜬금없이 왕세자부부가 된 이지가 25세 때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세자빈, 모후 유씨와 함께 교동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유배된 왕손들이 다 그렇듯 이지도 죄목(罪目)도 모른 채였다. 억울한 이지부부는 5월에 수의(囚衣)를 만들어놓고 보름동안 단식을 하고, 더는 목 매 자살하려다 나인에게 발견되어 목숨 부지하기도 했다.
그렇게 비분의 저항생활 중 한양에서 지인으로부터 가위와 인두를 선물 받았다. 세자는 가위와 인두로 방안에서 땅굴을 파고, 세자빈은 그 흙을 방안에 깔며 26일 동안 약 21m의 땅굴을 파 집 밖의 숲에 이르게 된다. 조선 판<쇼생크 탈출>마냥 이지도 한 밤중에 땅굴탈출을 성공한 듯싶었다.
그 정황을 나무에 올라 지켜보던 세자빈은 낙상한다. 그러나 이지는 미리 암약해 놓은 해안가의 나룻배를 못 찾아 헤맨다. 지리에 낯설고 위치파악이 안된 이지는 사흘 만에 강화부사 이중로의 나졸들에게 체포되고 탈출소식은 곧장 조정에 보고된다. 세자꿈도 안 꿨던 이지는 참담했다.
그 소식을 접한 세자빈은 자진(自盡)하고, 3일 후 모후 폐빈`박씨도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체포된 이지의 손엔 은덩이와 쌀밥 한 덩이가 있었다. 고 <인조실록 5/22>은 기록했다. 참으로 허무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세자였음을 얼마나 한탄했을까?
“본시 한 뿌리인데 이다지도 야박할쏜가(本是同根何太薄)
하늘의 이치는 서로 사랑하고 슬퍼해야 하지 않소(理宜相愛亦相哀)
어떻게 하면 이 유배지를 벗어나( 緣何脫此樊籠去)
녹수청산 자유롭게 오갈꼬(綠水靑山任去來)”
-이지의 한시, <속잡록(續雜錄) 연려실기술>에서-
의금부도사가 나타나 자결하라는 어명을 이지에게 전한다. 이지는 다소곳이 몸을 씻고 의관을 갖춘 후 손`발톱을 깎으려 칼을 찾았다. 허나 의금부도사가 칼 찾는 걸 불허하자 죽은 후에 깎아달라고 부탁한다. 정색하며 자리를 펴고 왕이 있는 북쪽을 향해 사배, 부왕 광해가 있는 서쪽을 향해 이배하고 방안에 들어섰다.
천정에 맨 줄에 목맸으나 줄이 끊어져 실패한다. 다시 질긴 명주실밧줄로 바꿔 한의 세상과 고별했다<인조실록 6월>. 이지부부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통한의 최후였다. 부왕 광해에겐 폐모살제(廢母殺弟·인목왕후 폐위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와 배명친금정책이란 어설픈 트집으로 반정한 인조였다. 오직 왕이 되고픈 욕심 땜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5년 후(1627년)정묘호란에 강화도로 도망치고, 다시 병자호란 땐(1636년) 남한산성에서 청 태종한테 삼궤구복(三跪九伏)이란 치욕을 당한다. 강화도로 피신한 소현․봉림세자와 왕족과 대신들을 비롯한 60만 명의 백성들이 불모와 포로로 심양에 끌려갔다. 고 다산 정약용의 <비어고>에 기술됐다.
글고 인조는 포로들이 노예화 되는 걸 성문화하여 탈출하여 귀국한 포로들을 다시 체포해 청나라로 반출했다. 반정은 뭐 하러 했능가? 그때의 참담한 비극을 읽은 나는 이지부부의 한이 서린 유배지 강화도교동 땅을 거닐고 싶었다. 이지부부를 추모하고 싶었다. 그런 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동의 들판은 싱그럽고 토실토실했다.
위도38도의 서해바람이 차가운데 들판의 식물들은 아직 싱싱한 여름철이고 기름졌다. 민들레와 장미가 무성하고, 밭작물이 짙푸르며 옥수수는 하얀 수염을 내밀고 있다. 토박이 아주머니가 나의 궁금증을 풀어준다. 땅이 기름지고 들판이 넓어 일조량이 풍부한데다, 시나부로 불어오는 해풍의 맑은 공기라서 온갖 작물들이 맛있고 영양이 알차단다.
긍께 값이 다소 비싸도 애용하면 후회 안한다고 자부심에 찬 농산물예찬을 했다. 짐짓 이렇게 넓은 들이 있을까 싶게 교동도들판은 넓다. 1232년 몽골족의 침입 때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여 39년 동안 버텨냈었다. 그때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교동도 가운데를 흐르는 염해를 산을 헐어 매워 간척지로 만들었을 테다.
간척지라 토양이 비옥하다. 교동도 출산의 곡물이 맛과 영양이 좋은 소이다. 이 풍요의 땅이 경찰관이었던 B의 첫 임지였단다. 섬에서 탈출하여 서울로 직장을 옮기려 용을 썼고, 그래 서울서 정년을 맞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여기 교동도에 머물렀어야 했다고 씁쓸해 했다.
날씨 탓인지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수척해 보인 B가, 며칠 간격으로 심장투석을 하고 있는 아픔의 실토이거니 라고 헤아려봤다. 교동도는 살기 좋은 섬이란 생각이 단박에 들었다. 서울서 두 시간이면 닿는 살아 숨 쉬는 생태 섬, 강화교동도의 초가을 햇살에 흠뻑 멱 감은 깨복쟁이들의 기분 좋은 하루였다. 2020.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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