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나들길1 – 심도역사문화길
들여다보면 볼수록 깊은 맛과 향이 뭉클한 곳이 강화도가 아닐까 싶다. 금년 들어 네 차례 발걸음인데 상상이외의 것들조차 나를 매료시키는 거였다. 발길이 닿고 눈길이 머문 오감의 감동은 길손만이 누리는 뿌듯함일 것이다. 강화도의 속살은 양파껍질 벗기듯 내밀한 알싸함이 영혼을 일깨우나 싶었다.
버스터미널에서 강화산성 남문으로 입성 동문을 지나 용흥궁과 고려궁지를 거쳐 북문을 통과한 후 연미정, 그리고 갑곶돈대에 이르는 18km의 강화나들길1코스는 우리근세사의 어두운 함축일까 싶다. 1232년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강화도로 임시천도하고 최우(崔瑀)가 토담으로 내성을 쌓아 동서남북에 문을 냈었다.
그리고 다음해부턴 동쪽해안에 외성을 쌓고 왕궁을 지어 39년간을 버텼던 것이다.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섬 안에서 농수산물조달이 가능해서였으니 새삼 강화도가 보물섬이란 생각이 든다.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을 향했다. 1889년, 영국에서 한국주교로 서품을 받은 코프(Corfe, C. J.)가 1900년에 불교사찰과 서양교회를 접목해 세운 한옥성당이다.
압록강변 목재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성공회성당은 1896년 6월 13일에 한국인 첫 세례자를 배출한다. 단순절제미가 도드라진 목조한옥의 내부는 교회기능을 살리면서 현지문화 토착화란 깊은 속내를 엿보게 한다. 동쪽에 초대 사제(司祭)의 코프의 묘비가 있고, 앞마당에는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성공회성당을 내려서 고샅길을 건너면 용흥궁뒷뜰에 들어선다.
내가 꼭 한 번은 찾아보고 팠던 곳이다. 흔히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이원범(李元範)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초가잠저(潛邸)다. 고아나 다름없는 원범은 가난한 외가에 빌붙어 나무를 해다 파는 포도시 글자만 아는 나무꾼농부였다. 그에겐 결혼을 약속한 처녀 양순이가 있어 나름 행복한 나날이었는데, 1849년 갑곶나루에서 느닷없이 배에 태워 한양으로 끌려가(?) 왕위에 오른다.
그가 제25대철종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왕손을 찾고 찾다가 강화도에 유배된 6촌도 넘는 19살의 원범이를 찍었다. 철종은 2년 후 순원왕후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과 혼인하고 대왕대비의 수렴청정 하에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꼭두각시 왕이 된다. 정작 결혼하고픈 양순이는 말도 못 꺼낸 왕이었다.
비운의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은 제주도와 강화도로 유배생활 전전하다 서자 전계대원군을 낳고, 전계대원군 서출이 원범이니 서자에 서자에 서자인 가난뱅이 나무꾼이었다. 진정으로 안동김씨들이 찾는 로또왕족인 셈이었다. 할 일 없는 허수아비철종은 양순이가 그리웠지만 입도 뻥긋 못하고, 궁녀들과 노닥거리는 게 일과였다.
양순이도 시집을 못가고 가슴앓이 일생을 살고, 철종은 주색에 빠져 33세로 요절한다. 재위14년 6개월 만이였다. 나무꾼행상이 임금노릇보다 훨씬 좋았던 왕 - 철종에겐 결단코 45칸의 용흥궁은 허울 좋은 개살구일 뿐일 거란 걸 그의 초가집터의 초라한 비석이 말하고 있었다. 용흥궁공원을 휘돌아 천주교강화성당을 찾아들었다.
천주교강화성당은 진무영순교성지의 다른 이름이다. 진무영은 강화해상방어목적으로 1700년 숙종 때 설치된 군영지다. 선박들이 한양을 내왕하는 최단 해상루트라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천주교순교자를 박해처형하자 프랑스군이 그걸 핑계삼아 강화도를 점령한다. 그때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성지다.
강화성당 뒤 언덕빼기에 강화고려궁지가 있다. 고려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6월에 강화로 천도하여 1270년까지 39년간 머물렀던 궁터로 조약을 맺고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야 했었다(고려사절요). 그 후 조선인조(1631)는 고려궁터에 행궁과 전각,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귀중한 책들과 금은괴 등을 약탈해 가고 모든 건물도 불태웠다.
명위헌(明威軒;지금의 군청). 명필 백하 윤순(白下 尹淳)의 글씨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옥책(史庫)과 은괴 19상자를 비롯해 귀중한 보물들의 명세서는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생생히 기록돼있다(한불관계자료). 또한 어떤 장교는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실토한다.
이방청, 이방·예방·호방·병방·형방·공방의 육방 중 하나. 12칸 대청은 이방청의 집무실
"겉으로 보기에 꽤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에는 각하에게 보내드릴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간혹 거처하는 저택(행궁을 말함)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실이 있었습니다. 위원회는 공들여 포장한 340권을 수집하였는데, 기회가 닿는 대로 프랑스로 발송하겠습니다. 무게가 대단하여 왕립 우선회사(郵船會社)로 보내 드릴 수 없음이 유감스럽습니다.
(중략) 본인은 본인의 규정에 따라 그 목록을 작성케 하였으며, 이 신기한 수집품을 각하에게 보낼 생각인데, 틀림없이 국립도서관에 전달할 만한 유익한 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로즈 제독이 본국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1867년 1월 15일자 보고서에 아래내용도 있다.
"본인은 우리의 출발을 11월 초순에는 거행해야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즉시 모든 국가의 소유물들을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200여 척의 정크를 침몰시켰습니다."
"화약을 폭발시키고 무수한 창고들을 그 안에 있는 모든 물건과 함께 소각하였습니다. 임금의 저택과 관아가 남아 있을 뿐인데, 이 관아의 일부는 우리 군인들이 거처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제일 마지막에 파괴하였습니다. (중략) 본인은 본인의 계획대로 10일과 11일에 강화읍 관아의 파괴를 마치고 모두가 선박에 올라 일상의 업무로 돌아갔습니다."(『한불관계자료』)
위 글은 고려궁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7 - 경기남부와 남한강,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김희균, 김성철, 유홍준)에서 발췌함.
고려궁지를 나와 북문을 향하는 벚나무언덕길은 강화읍내를 조망하며 걷는 최상의 산책길이다. 북문을 통과하면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는데 오읍약수터는 꾀 넓은 휴식처였지만 사람이 없다. 조붓한 숲길은 들길로 이어졌다가 마을 앞을 지날 땐 신작로가 된다. 이젠 마을과 마을로 이어지는 들녘이 이어지는데 드넓은 평야는 노랑물감을 흩뿌려 놨다.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들판과 초록숲이 접전하는 사이사이의 가옥들은 그림처럼 단정하다. 이곳이 섬일까? 싶게 말이다. 농촌이나 어촌풍경을 생각하는 강화도라면 착각도 유분수다. 그만큼 강화의 들녘과 마을풍정은 풍요롭고 정갈스럽다. 몽골족 침입 때 39년을 버티느라 조성한 간척지들판이 풍요의 강화도를 만들었지 싶었다. 어찌 보면 강화도는 전원주택지 같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지폈다.
서울서 대중교통으로 두세 시간이면 족할 섬마을이 바다와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맑은 공기의 천혜의 터 여서다. 월곶마을 앞도랑 풀밭에서 박주가리를 발견했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넝쿨식물인 박주가리는 열매와 줄기와 뿌리까지 약용식물이다. 고추모양의 열매는 터져 민들레 홀씨 같은 씨앗을 파란하늘로 가을여행 보낼 참이다. 나는 차로 음용하려고 열매 20여 개를 따 챙겼다.
연미정(燕尾亭)에 올랐다. 4백 여살 된 귀목을 거느린 월곳돈대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에서 서해와 염하(鹽河)로 갈라져 흐르는 입구에서 유도(무인도)를 마주하고 지키는 요새지다. 두 강이 합쳐졌다 갈라지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아 연미정이라 했단다. 한양마포나루로 갈 배들이 여기 모였다가 만조에 떠났던 요충지다. 여기 외성에서 단단히 보초를 선다면 한양으로 들락거리는 선박을 통제하기 딱인 곳이다.
북쪽 서해 건너 황해도가 아름아름하고 염하 저쪽의 김포가 지척이다. 병자호란 때 김경징은 천혜의 요새지형만 믿고 속수무책 방어로 청군이 순식간에 침입하고 말았다. 연미정 앞 염해에 수장된 백성들의 시신이 하얀 꽃송이처럼 떠내려갔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경징의 어미는 자살하고 인조도 병란 후 그의 목을 쳤다. 거듭되는 호란과 왜란에 도망치기 바빴던 어리석고 용렬한 인조는 고려가 39년간 버틴 역사의 현장을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내줬던 것이다.
연미정에서 갑곶돈대까지의 6.5km는 염해의 탁한 물길과 동행한다. 염해가장자리를 나문재가 붉은 핏자국처럼 번졌는데 강화사람들은 경징이 풀이라 부른다. 피난처 도강을 막은 웬수 김경징이를 아무대도 쓸모없는 풀 나문재에 비유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그 순환의 고리에서 지혜를 찾을 때 문명의 꽃은 핀다. 강화도는 우리들에게 역사발전의 나침반일 것이다. 특히 강화나들길1코스 ‘심도역사 문화길’은 살아 숨 쉬는 역사교육장이다. 2020. 10. 21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장교 쥐베가 쓴 기행문속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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