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걸어가는 길 - 산행기

한 맺힌 호국돈대길 울음소리 -강화도

 한 맺힌 호국돈대길 울음소리-강화도

갑곶돈대박물관 입구

왕은 하늘이 점지한다고 했던가? 여드레 후엔 백성들의 손도장으로 5년짜리 왕(대통령)이 만들어지지만 160여 년 전엔 궁중의 할망구(순원왕후)의 입에서 왕이 태어났었다. 1849610일 여기 갑곶나루엔 떠꺼머리 나무꾼이 납치(?)당해 나룻배에 실려 왕이 되는 기상천외의 일이 벌어졌다.

갑곶돈대부근의 염하에 정박한 나룻배

떠꺼머리 이원범이 나룻배를 타고 왕이 되려 떠났던 한강(강화해협으로 흐르는 염하(鹽河))길을 좇아보기로 했다. 하늘이 뿌옇다. 염하도 하늘 닮아선지 회색인 채 강화도와 김포를 가르며 도도히 흐르고 있다. 연둣빛신록 속에 온갖 화려한 꽃들이 만화방창 염하를 퍼레이드 하고 있다.

호국돈대길의 4월의 피날레

원범은 고아로 냉정리 외가에 빌붙어 사는 19세의 노총각 이다. 포도시 천자문정도만 읽었던 가난한 나무꾼청년은 동네우물터에서 양순이와 눈 맞아 장가갈 꿈을 꾸고 있었다. 탁류처럼 흐르는 염하길따라 갑곶나루를 떠난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몸을 뒤섞어 강화도를 휘돌며 서해바다와 만난다 해서 부른 강하도(江下島)’가 언제부턴가는 강 아래 꽃섬(江華島)’이 됐지만 결코 꽃답지 않는 피멍 짙은 통한의 섬이기도 하다. 바닷물이 나들고, 숱한 사람들이 나들며 몸으로 썼던 아픈 역사의 강화나들길2코스는 피울음의 트라우마가 켜켜이 깔린 곳이다.

철조망 뒤로 염하가 탁류처럼 도도하다 

영산홍과 유채꽃이 길섶에 흐드러졌다. 염하 건너편 김포는 옅은 안개 속에 장폭의 묵화마냥이다. 강바람이 그리 시원할 수가 없다. 풋풋한 신록과 따스한 태양은 나들길 트레킹 하기 딱 좋다. 뜬금없이 곤룡포를 입고 철종에 오른 원범은 안동김씨의 꼭두각시왕 노릇 하느라 미치게 따분하기 만했다.

산해진미보다 보리밥 먹고 지게진 채 맘대로 산야를 누비던 지난날들이 환장하게 그립다. 냉천골 양순이 생각이 간절했다. 그랬던 원범을 생각하던 나의 발길이 용진전에 닿았다. 원형성곽에 오르니 염하를 품은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진전도 외침엔 별 역할도 해보질 못했었다.

용진전

염하 따라 한시간반정도 걸으며 강바람 배터지게 마셔 일상의 떼를 죄다 털어냈나 싶다. 염하로 툭 튀어나온 용당돈대는 천혜의 요새처럼 보였다. 성곽 안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회색강화하늘을 차일치고 있다. 갑곶돈대에서 용당돈대의 염하 건너 김포쪽 갯가엔 청나라 말발굽아래 피난 온 백성들의 행렬이 장사진을 쳤었다.

용당돈대 앞 염하 건너 김포가 지척이다

병자호란때 강화도는 참혹한 죽음의 공간이었다. 인조는 영의정 김류를 체찰사에 명하고 한성판윤 이였던 그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검찰사로 임명했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을 비롯한 피난행렬은 한양을 떠나 사흘이 지나서 강화도 앞에 도착했을 땐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코앞에 강화도를 두고도 강화해협 땜에 건널수가 없어서였다.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나룻배를 동원해 피난민의 도강에 매진했어야 하는데 그는 가솔(家率)들과 50여 바리나 되는 짐을 먼저 옮기려고 나루터에 피난민들의 출입을 막았다. 김포와 강화의 강폭은 600~800m 정도지만 물살이 거센데다 질퍽한 갯벌이라 도강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화도돈대 뒷길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는 갑곶나루 밖에 없어서 용케 배를 구한들 검찰사가 출입금지 시켜 피난민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랑캐에 인질로 잡혀 노예신세로 치욕의 삶을 살바엔 갯벌 속에 뛰어들어 급류에 자결을 택했다. 염하는 수백 명 피난민들이 검찰사를 원망하며 그렇게 죽은 흰옷의 시체들로 뒤덮였다.

용당돈대 느티나무와 여산님

왕이 삼전도의 굴욕 끝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검찰사 김경징을 비롯 누구도 문책당하지 않았다. 얼핏 세월호의 비극에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던 박근혜정부를 떠오르게 한다. 오두돈대를 지나면 갯벌에 붉은 나문재가 성성하다. 강화에서 나문재를 경징이풀이라 부른다.

갯벌의 경징이 풀

경징아 나 살려달라고 절규하다 죽은 피난민들의 토혈이 묻혀 빨개진 풀이라고 경징이풀이라 부르고 있다. 그 비극의 통한과 노예처럼 납치(?) 되어 떠나던 나무꾼 이원범이 생각났다. 염하를 낀 돈대길가엔 각시붓꽃과 민들레가 지천인데 하얀민들레꽃도 많았다. 그때 죽은 원혼일까? 하고 생각해 봤다.

구중궁궐에 갇힌 이원범은 안동김씨들의 눈치살피느라 스트레스로 마음병 들어 서른두 살로 요절한다. 자유는 불안한 왕위보다 상위개념이다. 냉천골의 죄없는 양순이는 평생을 처녀귀신으로 살고~! 안동김씨들은 애먼 숫총각`처녀를 피말리게 했던 거다.

광성보에 닿았다. 병인`신미양요의 비극의 현장은 그날의 처절했던 희생을 아름다운철쭉이 뒤덮고 훌륭한 요새(돈대)처럼 느끼게 했다. 적의 함포와 총 앞에 맥도 못 췄던 포대는 단순한 눈요기꺼리였던 거다. 미군3명과 아군350명의 목숨을 맞바꾼 신미양요는 그 후로도 위정자들이 각성하지 못한 채 아픈역사의 연속선상이 됐다.

용두돈대 앞의 깊고 좁은 여울목의 급류를 한참을 봤다. 유명한 손돌목이다. 손돌은 나룻배사공이다. 고려 고종이 갑곶에서 염하를 건너려 탄 배가 급류를 타고 여기에 이르자 의심 많은 왕은 자기를 수장시키려는 줄 알고 손돌의 목을 벤다. 죽어가면서도 손돌은 말한다. ‘전하, 물바가지를 띄우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고.

용두돈대 앞 선돌목여울을 담는 필자

물바가지를 따라 협량을 지나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한 고종은 뒤늦게 후회하며 장사나 잘 치러주라고 큰 인심(?) 썼다. 염하건너 김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백성의 목숨을 사타구니떼만도 못 여긴 고종이랄가? 유약하고 무능한 왕은 늘 백성만 피말리게 한다. 손돌의 안타까운 죽임을 여울목에 그려봤다.

용두돈대입구에서,  (필자사진은 모두 손창호님 작품)

하고많은 역사의 비하인드가 켜켜이 묻혀있는 호국돈대길에 나를 대려다 준 마운틴익산집행부가 무진장으로 고마웠다. 더구나 카페지기 손창호님은 내 쌍판도 어지간히 사진기에 담아 혼쭐까지 뺏어도 그냥 고맙기만 했다. 님이 아니면 여길 올 꿈도 못 꿨으니 말이다.

손들목돈대 앞의 필자, 염하건너 김포

손창호님은 뒤풀이에 섹스폰연주까지 겻 들어 흥을 돋았다. 한 자나 튀어나온 눈깔로 산님들을 열광케 한다고 농반진반 건네곤 했었는데, 오늘은 석자쯤 뻗어나온 입술로 산님들 영혼까지 힐링 시키고 있어 부럽고 감사했다. 그는 참 멋있는, 멋진 삶을 가꿀 줄을 아는 산님이다. 동호인들의 사랑을 훔칠 자격이 있다. 멋있는 하루였다.                   마운틴익산 화이팅~!                  2017. 04. 30

손돌목돈대의 꽃동산

용두돈대 앞 염하의 손돌목여울

광성보 안해루

광성보아래  갯벌

용두돈대

신미순의총 앞 어느 커플의 설레임의 오후. 아랜 신미순의총

신미양요때 순절한 어재연,재순 형제의 충절비각 

손돌목

광성포대

광성보를 에두르는 산책길

----* * * * * ----

 

용진전

'그곳에 가고싶다'단짝을 그곳에 멈춘 찰나

용당돈대입구

사각형논베미변을 해자처럼 만든 까닭은?

금낭화와 지천으로 핀 흰 민들레

화도돈대

경징이 풀

바다산책길의 몸푸는 집

 

광성보

광성보안해루

 

 

 

 

 

'캭^!^ 하는 순간을~' 블랙님 선물

신미순의총

# 사진 중 필자사진은 산이좋아서님 작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