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 & 추억 하나

 

코로나19로 사회적 격리생활이 일상화 된 요즘 나는 넷플릭스(Netflix) 영화감상으로 방콕의 일상탈출을 때우곤 한다. 며칠 전부터 본 <빨간 머리 앤 Anne with an ‘E’>3부작의 감동적인 얘기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게다가 극의 무대인 케나다 에버린의 수려하고 아기자기한 자연풍광은 사계의 아름다움을 장엄하게 펼치면서 황홀감에 숨 멎게 한다. 코로나19에 억눌린 답답함과 우울에서의 탈출구 인냥.

빨간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주근깨투성인 앤은 태어 난지 얼마 안 되어 부모님을 여읜 고아가 된다. 가정집식모로 학대와 괴롭힘을 당하는 천덕꾸러기생활을 하다 입소한 보육원생활도 냉혹하고 괴롭히는 건 다를 게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중년 독신자남매의 농장에 입양하려 보육원을 떠나게 된다. 남자애를 찾아 기차역에 온 매슈 앞에 나타난 앤 ㅡ 실망감에 씁쓰레 하는 매슈는 마지못해 마차에 태운다.  해맑고 순정한 앤은 초원을 달리는 마차에서 달떠 수다를 떨면서 커스버트 남매의 ‘초록지붕 집’에 닿는다.

 

냉철하고 보수적인 마릴라는 엉뚱하게 온 앤을 되돌려 보내려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인다. 앤의 꾸밈없는 순수와 열정, 상상의 날개 짓 속의 아름다운 수다와 재치가 커스버트 남매의 맘을 열게 한 거였다. 삭막했던 ‘초록지붕 집’의 커스버트 가정을 웃음과 사랑이 피어나는 스위트 홈으로 탈바꿈시킬 거란 건 미처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앤을 친딸 이상으로 사랑하게 되는 커스버트 오누이는 앤 없는 앞날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앤 셜리와 절친 다이애나 밸리(좌)

하지만 고아출신의 못 생긴 빨간 머리 앤은 낡은 보수와 편견이 고착된 마을사람들의 멸시와 왕따의 괴롭힘에 고뇌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대안을 생각하는 영리하고 진취적인 소녀로 성장하면서 주위를 감화시키는 거였다. 수많은 사건들 속에 아픔과 기쁨과 절망과 희망이 펼쳐지면서 앤의 긍적인 열정은 마을의 보수층 꼰대들이 낡은 이념과 껍질에서 깨어나는 동기부여를 하게 된다. 애버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고루하지만 결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심성들이 얽히고설키며 풀어가는 얘기는 눈물과 웃음의 뒤범벅으로 내일을 맞게끔 한다.

그렇게 가슴 저미는 속에서 매슈와 지니의 학창시절의 풋사랑이 양념처럼 살짝 비춰질 때 나는 내 고향에서 목격했던 한 토막 ‘연서의 헤프닝’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매슈와 지니는 막 싹트는 연정을 키웠지만 어느 날 매슈의 형이 갑자기 죽자 농장 일에 전념하려 학업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의 사랑은 멈춰버린다. 그때 지니가 매슈에게 띄웠던 편지들, 가난 탓에 학업을 포기한 자격지심에 답장을 않고 지금까지 편지를 소중히 간직한 매슈의 아픔이, 그 비밀스런 애틋한 연정이 앤의 열여섯 살 생일선물 드레스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초록지붕의 집' 식구들인 앤 셜리, 마릴라 커스버트, 매슈 커스버트 (좌로부터)

내 고향의 K란 친구도 조실부모한 탓에 가난하여 초교졸업 후 농사를 지었다. 당시 번성하던 4H회원이 되어 연수원에서 만나 호감이 간 L이란 여성얘기를 친구S에게 실토 한다. K의 그런 연심을 L에게 이어주고 싶었던 S는 ‘편지를 띄워보자’고 제안 대필까지 한다. S는 밤새워 머릴 짜낸 연서를 담날 (고교)통학 길에 우체통에 넣었다. 글고 며칠 후엔 L한테서 답신이 왔다. 그렇게 연서는 주고받길 이어지면서 내용도 진지하고 가슴 부풀게 전개 된다. K는 난생 첨 연애를 하고 있단 설렘과 기대에 부풀어 부~ㅇ뜬 흐뭇한 일상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학교수업

그걸 지켜보며 즐겼던 S는 장난으로 시작한 연서대필을 차마 K한테 고백하고 사과할 용기와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실은 L의 답신을 고대하는 K가 낙담할까 봐 S는 L의 답장도 써서 부치곤 했던 거였다. 그렇게 반년쯤 흘렀을 때 4H연수원에서 하반기 연수가 있었다. 한껏 부푼 K는 연수보단 L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달떠있었다. 연수개강 날 K는 L를 찾아 반갑게 인살 했다. 근디 시큰둥한 채 외면하는 L. 그녀를 얼른 이해할 수 없는 K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며 다가섰으나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외면해버린다.  무슨 잘못이 생겼을까? 라며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데,

앤 셜리

“사람 우습게보지 마세요. 장난도 한두 번이지 댁 혹시 정신병자에요?”라고 쏘아붙이며 L이 달아나듯 했다. 순간 당황하여 어안이 벙벙한 K는 뒤따라가면서 우습게 안건 자기가 아니라 그녀란 생각이 들어 볼멘소리로 되묻는다.

“우습게 알다니요. 그 질문을 제가 하고 싶네요. 지금까지 나눈 우리의 감정이 장난이었단 말입니까?” 그녀가 뭔가 오해가 있었나 싶어 침착하게 되물었다.

“나누긴 뭘 나눠요. 난 댁한테 한 번도 편지 쓴 적 없어요. 별 꼴을 다 보겠네” L은 매몰차게 뱉곤 잰걸음 쳤다. 망연자실한 K는 어떻게 강의를 받았는지도 모른 채 종강하자마자 귀가했다.

글고 밤이 되어 S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S라면 이 불행의 실마리가 뭔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앞서기도 했다. 허나 그 기대도 무참하게, 오히려 S와의 한바탕 말싸움과 절교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겨울방학 때 귀향하여 이 스캔들(?)을 들었을 때까지도 K와S는 절연상태였다. 나는 한참 후에 불행을 야기 시킨 당사자 S가 L한테 편를 띄워 자초지종을 실토하여 서로의 오해를 풀었으면 어찌됐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교시절 풋내기 머슴아들의 치기와 무한한 상상력이 빚은 풋풋한 추억이란 생각이 드는 거였다.

소중히 연정을 키우면서도 늘 고백할 찬스가 없어 맘 조여야 했던 앤과 길버트

할배와 할매로 해후하여 고백하는 연심! 수줍어하며 나누는 옛 사랑의 확인과 추억이 찡하게 내 맘을 후벼는 거였다. 이젠 앤을 돌보고 사랑해야 해서 같이 할 수가 없다는 매슈와 그걸 인정하며 아쉬워하는 지니의 가슴을 열어보고 싶었다.

나도 당시 펜팔친구에 마음 쓰며 비밀스런(?) 애틋함을 키웠기에 지니와 매슈의 애틋한 연서사건도이 가슴 뭉클하게 나를 타임머신여행길에 들게 하였다. 가슴앓이 추억이던, 달떴던 추억이든 지나고 보면 애틋하고, 되새김질 속에 자아성장의 자양분이 됐단 걸 흐뭇하게 여긴다.

드라마<빨간 머리 앤>의 발랄한 상상력에, 펼쳐지는 에버린의 장대하고 수려한 자연풍경에 다시 빠져들고 싶다.  쉬이 잊을 수가 없는 가슴 벅찬 드라마였다.  

"다들 여기를 에비뉴라 부르겠지만 저는 이곳을 '환희의 하얀 길'이라고 부를래요." 기차역에서 매슈의 마차에 타고 '초록지붕의 집'을 향하는 앤은 하얀 벚꽃길을 그렇게 표현한다. 그런 앤의 수다가 대견타 싶어 매슈는  배리연못을 가리키며 소개하자,

"이름이 별로네요. 저는 이곳을 '반짝이는 물결의 호수'--네, 그게 딱 좋겠어요"  매슈는 비시시 웃고 만다. 사내가 아니라고 어찌 내칠 수가 있겠는가!                     2020. 04. 23

#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1908년작품.  소설원작을 드라마로 만들어 캐나다CBS채널에서 2017~2019년까지 방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넷플릭스영환 리메이크 작품.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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