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하늘다리와 「이괄의 난」
꽃 시샘일까, 상처 난 자연의 앙탈일까? 서대문 역사박물관을 끼고 도는 안산자락길 무악재에 꽃샘바람이 매섭다. 모산(인왕산)에서 억지 젖 때듯 갈라놓은 무악재에 놓은 하늘다릴 건널 땐 바짝 몸을 움츠려야 했다. 검정마스크에 선글라스로 복면한 나는 코로나19에 쫓겨 인왕호랑이굴로 도피하는 꼴이었다.
으스스한 날씨가, 시국이 정녕 봄은 오고 있는 걸까? 싶은데 난데없는 산수유가 된비알비탈길을 노오랗게 물들여 놨다. 스산한 하늘을 떠받친 노란꽃술터널을 오른다. 겨울가뭄 탓일까. 바짝 마른 가지는 가죽이 너덜너덜 헤졌는데 겨드랑이 살갗엔 오물오물 노오란 꽃눈이 터지고 있다. 노란 털 수술들을 웅크려 모둠 피운 산수유는 어머니의 여윈 가슴 꽃일지어다.
그래서 “어머니다리처럼---”으로 시작하여 “어머니 마른 가슴에 노란 산수유 핀다”로 끝맺음 하는 서혜미 시인의 <산수유>란 시가 떠올랐다. 선바위 뒤 모자바위 앞에 섰다. 안산이 손에 잡힐 만큼 다가선다. 400년 전 이맘때의 그날엔 노란 산수유가 아닌 희끗희끗 빛바랜 무명옷의 군사들이 인왕산과 안산일대에 눈 내리듯 점 박혀 있었다.
1년 전, 반군을 이끌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성공시킨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고, 안령(안산,무악재)에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과 일전을 벌릴 때가 꼭 이맘때였다. 그날(1624년음력2월11일)도 꽃샘추위가 상당했었다. 한양도성 밖의 이괄의 반란군이나, 건너편 안령에 진을 친 장만의 관군들 태반이 흰 무명옷을 입은 탓에 헐벗은 겨울산은 희끗희끗 사람 꽃이 피었던 것이다.
장만의 군사는 오합지졸 약체에다 인원수마저 적어 이괄의 정예군에 비해 한참 열세였다. 자만심에 찬 이괄은 도성사람들에게 호언장담 목청을 높여 거들먹거리며 성벽에 방까지 붙였다.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쳐부술 테니 구경이나 하시오”라고.
한양입성의 관문인 안령(무악재)를 누가 점령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라 지난 밤에 선점(先占)한 장만의 관군을 섬멸해야만 했다.
꼬불꼬불 바위벼랑 사이의 인왕사 무당골 모자바위 앞에서 조망하는 안산일대와 인왕산의 좁은 협곡 - 무악재는 한성의 요충지였다. 협곡 양편에서 흰 무명옷 걸친 군사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당시엔 호랑이 서식지 없엔다고 벌목을 장려한지라 산속이 휑했다. 무당골의 구불구불 춤추는 송림을 뚫고 한양도성길에 올라섰다. 범바위가 꽃샘바람에 잔뜩 웅크리고 있다. 미세먼지 탓일까?
이성계가 국태민안을 기도한 선바위가 흐릿하고, 시국이 불안해선지 회색도심도 뿌옇고 우중충하다. 사회적 격리란 우울한 일상에서의 탈출구가 산속이라 여겨선지 인왕산정을 오르는 인파가 많다. 휴교로 갈곳 마땅찮은 학생들 해방구가 산인가 싶었다. 범바위에서 조망한 한양도성이 하얀 구렁이처럼 꿈틀대며 안산 무악재로 내닫고 있다. 백성들 고혈로 쌓은 성벽이 제 구실 한 번이라도 했던가?
인조반정에 주역이었던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2등공신으로 분류 서북방 도원수에 임명되자 불만이 팽배했다(사실 인조는 이괄의 능력과 신의를 신뢰하여 젤 중요한 서북방사령관직에 명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무고로 반란음모계획자로 몰려 금부도사가 체포하러 오자 “아들이 역모에 가담했는데 애비 목숨인들 무사하겠나?”라고 울분을 토하며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글고는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 이판사판이란 생각에 휘하 장병들을 인솔하고 한양을 향한다.
당시 이괄의 반란군는 조선 최정예군들로 편성 막강한데다 관군을 피해 산길을 택하여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질주했다. 2월8일, 겁에 쫀 인조는 이괄과 내통위험이 있다는 기자헌 외 37명의 신료들을 몰살시키고, 이괄의 아내(예이)와 며느리(계이)를 참수하여 저자거리에 매달아놓고 밤중에 공산성을 향해 도망친다. 얼마나 허겁했으면 양재역 사거리에서 말 탄 채 팥죽 한 그릇을 먹어치우고 뺑소니쳤을까. 하여 후세에 ‘말죽거리’란 지명이 생겼다. 2월10일 이괄은 황토로 단장한 무악재신작로를 거드름피우면서 밟고 창의문을 통과 한양에 입성했다.
인왕산 정상에 섰다. 인증샷 하려는 젊은이들이 줄 서며 신이 났다. 코로나19는 망각의 세계로 지워버렸나 싶다. 망각이란 건 어쩌면 참 편리한 악마(?)일 수도 있다. 불안과 슬픔을 잠시 잊을 수 있어 좋지만 동시에 그 트라우마에 대한 고찰과 반성이 따라야 한다. 망각은 결코 불행의 고리를 끊는 비방책이 아니다. 명청(明靑)과의 등거리외교를 주장한 광해를 쫓아 낸 인조는 반정에 대한 반추와 자성이 없어 이괄의 난에 이어 병자호란을 초래함이다.
인조를 옹립한 당파 위정자들은 지 몫 챙기기에 바빠 위기의 국난을 망각하고 수구의 역사에 올인 한다. 전란의 트라우마는 애먼 백성들 차지다. 북악산 아래에 청와대가, 그 앞에 경복궁이 보인다. 왕이 도망간 세상인심은 이괄의 편인 듯싶게 안령(무악재)을 넘어 경복궁에 입성할 때 백성들은 반란군을 영접했다. 그러나 오만한 이괄은 용장이긴 했으나 성격이 괴팍하고 다혈질이라 덕장과 지장감은 아니었다.
2월11일 새벽부터 전개 된 무악재전투에서 이괄은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도 하루 만에 패퇴한다. 꽃샘날씨에 회오리돌풍까지 맞선 이괄한테 바람을 등진 장만의 관군은 고춧가루를 원 없이 뿌려 반란군이 눈코 뜰 수가 없게 만들었던 거다. 혼비백산 퇴패하는 반란군을 본 성벽의 백성들이 서대문수문병을 내쫓고 문닫아버린 통에, 이 괄의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마포서강에 빠져 죽거나 경기도 광주로 도주했다. 백성들은 누가 이겨도 마찬가지란 생각에 전투구경 즐겼을 뿐이었다.
기차바위 너머로 북한산연봉이 하늘금을 그었다. 흐린 날씨지만 화강암바위산의 위용은 멋지다. 창의문(彰義門,자하문)을 향한다. 궁궐의 지맥을 보존하기 위하여 항상 닫혀있던 문이었는데 딱 두 번 열렸다. 그것도 외침에 의해서가 아닌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란 내부반란에 의해서였다. 긍께 두 번 다 이괄이 창의문을 열어재킨 선봉장인 셈이다. 경복궁에 입성한 이괄의 ‘하루천하’는 궁궐이 불타고 약탈의 폐해가 막대했다. 어찌 보면 이괄의 책임 보단 쪼잔한 인조의 무능 탓이 더 클 것이다.
포용과 선견지명이 뛰어난 혜안의 군주라야 국태민안 한다. 우리의 비극은 위정자들의 편 가르기를 즐긴(?) 왕(대통령) 탓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19팬데믹(Pandemic) 속에서도 진영싸움은 그칠 줄 모르나 싶어 슬프다. 비련(悲戀)을 간직한 치마바위주름이 어째 더 선명해진 듯하다. 치마바위가 품은 단경왕후의 통한을 생각하면서 수성동골짝으로 들어선다. 겨울가뭄으로 골짝도 희멀건 맨살이다.
이괄은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 광주까지 도망가 쪽잠에 들었다가 부하장수였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살해됐다. 잔당들은 압록강을 도강하여 후금(後金) 청태종(淸太宗)을 찾아가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간청 부추겼다. 빨리 조선을 징벌하라고. 그래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촉발되고 조선침략으로 후금은 막강한 국가 - 淸나라로 거듭난다. 황학정을 기웃거리다 단군성전에 닿았다. 코로나19탓일까? 인기척 없는 적막함이 봄을 잠시 망각한 듯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2020. 03. 12
<산수유> -서혜미-
어머니다리 처럼/ 바짝 마른 가지에서/ 오물오물 꽃눈이 터진다
침묵의 시간/ 동강난 허리안고/ 용케도 꽃잎을 열었다
귀가 어두워/ 봄이 오는 소리 듣지 못해/ 행여, / 더디 오는 줄 알았지
가죽만 남아 스멀거리는 살갗사이로/ 종알종알 달려 있는 작은 꽃잎들/ 어머니 마른 가슴에 노란 산수유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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