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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우이령 & 백운대의 설경

우이령 & 백운대의 설경

어찌저찌 해도 겨울풍정은 함박눈이 펑펑 흩날려야 한다. 눈[雪]없는 무미건조한 겨울은 앙꼬 없는 찐빵 격이다. 겨울 낭만을 깔아뭉갠 입춘은 코로나19를 꽁무니에 묻혀와 사람들을 위리안치(?) 시키더니, 원체 낯짝이 없었던지 이틀간 함박눈을 쏟아 부었다. 영락없이 구들장 보듬고 방꼭쟁이 될 우울증은 면케 했다.

우이능선

얼른 하얀 설원에서 까불고 싶어 우이령 소귀고개를 향했다. 탐방예약제란 걸 알면서도 나처럼 창새기 빠진 놈이 몇이나 되랴 싶어 눈길을 헤쳤다. 사람열기와 염화칼슘에 녹초가 되는 도심의 함박눈은 북한산자락만 닿아도 설화만개(雪花滿開) 한다. 가까이 핀 목화솜덩이로부터 멀리 하얗게 붓 칠한 고산준령까지 세상은 온통 희고 차갑다.

그 하얀 풍경은 얼룩진 내 속을 시원하게 관장(灌腸)하면서 따신 낭만 꽃을 피우게 한다. 소귀고개를 향하는 눈 쌓인 고갯길은 벌써 발자국들로 다져졌다. 겨울을, 설화를, 하얀 순수를 동경하고 좇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걸 의미한다. 사계(四季)에서 하얀 겨울은 독창적인 순결이다. 순결을 빚는 눈발이 사랑받는 소이다.

인수천계곡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꼭꼭 숨겨놓은 비밀스런 연인처럼 좋아한다. 늙어 빠졌어도 눈 내리는 겨울날엔 강아지처럼 내달려 눈 속에 파묻히고 싶다. 국수나무숲은 함박눈이글루를 만들어 박새·곤줄박이·진박새·쑥새와 동고비 등을  품었다. 그 뒤의 소나무는 설화뭉치를 치렁치렁 달고 간당간당 버티고 있는 게 겨울을 나는 섭리가 아닐까 싶다.

소귀고개길의 설화

소귀고개 대전차방어벽은 아무 쓸모없게 된 신세한탄으로 겉모습까지 시꺼멓게 멍들었다. 고갤 넘어서자 오봉(五峯)이 흰 면사포를 썼다 벗다하면서 나를 애간장 태운다. 어지러운 함박눈 속일망정 희미하게나마 온전한 모습 보고 싶은데 말이다. 흙 한 톨 없는 하얀 눈길을 걷는 낭만은 겨울만이 선물하는 시혜며 행운이다.

석굴암과 삼성각

어쩌다가 티 없는 설원에 최초로 발길을 남기는 기쁨과 두려움은 오랫동안 경외감으로 기억된다. 관음봉석굴암 뒤 야외 보살상 앞 십여 평쯤 될 적설마당에 나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났다. 순수에 어찌 내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랴 싶어서였다. 석굴암마당에서 관망하는 북악능선의 운치도 멋진데 눈구름은 끝내 물러서질 않는다.

설운 뒤로 숨바꼭질하던 오봉

여기 용왕샘은 부정 탄 자가 물을 마시면 샘이 말라 스님들이 곤욕을 치렀단다. 1792년 겨울 동짓날도 오늘처럼 폭설이 내렸다.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동자승이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 불을 헤집어 보니 불씨가 꺼진 참이라, 꾸중 들을까 겁나서 석굴에 들어가 기도드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석굴암 다헌재의 괴송

한참 후 잠 깬 동자승이 후딱 공양간에 가본께 아궁이불이 훨훨 타고 있잖은가! 그 시각 아랫마을 차대춘(1802년 작고)씨 부인은 팥죽을 쑤다 인기척에 부엌 밖을 내다봤다. 근디 왠 깨 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잖은가. 차씨네가 얼른 보듬어 안아 들여 팥죽을 공양한다. 그 후 현재의 차영민(61세)씨까지 6대째 그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6.25때  9세였던 차영민씨는 가족과 헤어졌다 구사일생으로 재회한 이산가족이다.

뒤 관음봉을 파내어 석굴암자를 조성했다

깨 벗은 동자승의 인도가 있었을까? 그 동자승을 혼 내킨 아궁인 어딜까? 관음봉이 설무(雪舞) 속으로 사라진다. 우이령 소귀고갯길이 품은 일화들을 모른 척 말이다. 오후2시경, 우이령입구 소귀천골짝에 들어서자 인수봉과 백운대능선이 설산인 채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잖은가! 설산 백운대연봉의 마력에 끌려 백운대를 향한다. 미끄런 눈길을, 오후 늦은 시각이라 오르다 돌아설 망정 산행을 재촉했다.

백운대 연봉들의 설경

만경대 아래 눈 덮인 골짝에 도선사가 선연하다. 대머리 인수봉이 빙설을 쓰고 구름사일 비집은 엷은 햇살에 광택을 낸다. 그 옆의 백운대와 만경대와 노적봉은 하얀 설산으로 변장을 한 채 설운(雪雲) 속에서 숨바꼭질한다. 그 신령스런 그림이 발길을 붙든 채 넋을 놓게 했다. 영봉과 칼바위능선이 양쪽에서 포위해 온다. 설산 앞을 검은 나지들이 어지럽게 춤 사위질 하고 있다.

설경의 용암봉골의 도선사도 흰 면사포를 썼다

나목의 나체 춤에 어른대는 설산은 더 신비롭다. 강치날씨는 이젠 얼음길을 만들 테고, 다섯 시간여 눈길을 헤친 나는 이미 지처 있었다. 게다가 육포와 과일로 끼닐 때워선지 배도 고팠다. 나는 도선사골짝으로 내려섰다. 돌너덜길의 눈발자국은 결빙이 되어 하산은 엄청 신경 쓰였다. 오늘보다 몇 배 더 내렸을 폭설의 어느 겨울, 도선사를 반석에 올린 청담스님의 일화가 생각난다.

소귀고개마루의 대전차장애물

스님이 설악산 봉정암에서 선정에 들었다 폭설로 옴짝달싹 못하게 됐다가 아사직전에서 기사회생한 얘기가 있다. 그 청담스님의 음덕은 도선사에 들면 쬠이라도 가늠할 수 있지 싶다.  눈 내리길 염원했던, 눈길을 신물 나도록 걷고 싶었던 낭만을 오늘 비로써 만취했기에 금년겨울도 행복했다. 신명 난 하루가 한 계절의 아쉬움을 가름하는 감정은 행운이다.

선운각 터.

기쁨은 미처 예상치 못 했을 때 무지개처럼 와 닿는다. 그래 마음의 준비랄까 기쁨을 맞을 빈자릴 잊어서는 안 된다. 산 너머 양주의  차영민씨 부인생각이 스친다. 차가운 겨울 코로나19로 위리안치 되다시피한 우한교포들을 보듬어 준 사람들은 정녕 뜻 밖의 기쁨을 맛 보았으리라.  어제 오늘 내린 합박눈은 그 포옹의 팡파레축설이었지 싶다.       2020. 02. 17

인수봉과 백운대
눈꽃터널을 이룬 우이령고갯길
돌을 붙이면 소원성취 한다는 붙임바위
석굴암 일주문 뒤로 백악능선이 설무속에 희미하다
우이령길의 군 유격장과 송신 탑
▲석굴암 경내▼
종각(좌), 삼성각(중), 석굴암(우)
도봉산 오봉
영봉

 

칼바위능선
인수봉
▲선운각 터는 할렐루야기도원으로 쓰인다나?▼

 

계산동에 사신다는 산님, 엊 그제 설경 보러 함백산엘 갔다 맹탕하고 오늘 소원을 풀었단다. 홀로 산행을 즐긴다는 그녀는 아래 동자승이 깨벗고 있었던 마을 찾으러 떠났다. 차씨네를 만날 수 있으려니~!

 

 

 

후미진 양지의 웅덩이 속의 개구리 태아들, 강추위 탓에 동사 직전인가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