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미어지는 정헌과 홍랑의 순애보

다산선생유배지

“은하수는 역력히 일 년을 느릿느릿

하늘 위 두 별 비로소 만날 때

괴로워하는 인간의 무한한 생각

무덤에서 서로 만날 때도 혹 이러할까.”

정헌-조정철이 혹독한 제주유배생활 중에 부인의 자결소식을 듣고 읊은 시다.

1777년 7월 28일, 경희궁 현존각 침소에 든 정조를 시해하려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작년에 보위에 오른 정조는 당파를 혁신 위민정치를 앞세우자 남인세력이 불만을 품고 왕의 이복동생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획책했다. 이 모반사건에 홍국영일당이 반대파 정헌(靜軒,趙貞喆)과 조원철 형제에게 반정의 죄를 뒤집어씌워 형제는 누명을 쓴 채 제주도에 유배된다. 시해사건에 연류 된 홍상길의 형 홍상범의 여종이 정헌의 부인 남양홍씨를 만났다고 억지트집 잡아 엮었다.

홍랑(홍윤애)

하여 부인 홍씨는 자책감에 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자살한다. 정헌의 제주도유배는 그의 조부와 숙부 부친까지 3대에 걸쳐 4명 째였으니 꿈자리라도 더러운 치욕의 땅이었다. 근디 제주목사 정래운은 정헌이 유배처에 도착하자마자 온갖 박대와 해코지를 했다. 전에 정헌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식량조달을 막아 굶주리게 하고, 새로 온 목사 김영수는 문방사우는 물론 책도 빼앗았다. 그런 핍박속의 신고의 유배생활의 비참함을 달래는 정헌의 자조적인 시가 있다.

정헌(조정철)

“비온 후 날씨 맑아

바닷빛 짙푸르러 아득히 만리가 평탄해

우뚝 솟은 누각 붉은 난간에 신기루 맺어

가파른 성가퀴에 고래가 흰 눈을 뿜은 듯한 파도

조잘대는 남녘 사투리 처음 들을 때 괴이해

보일 듯 말 듯 밀려 있는 고깃배 보기에 놀라워

북쪽 바라보면 외로운 구름, 어느 곳에 있을까

두 줄기 맑은 눈물 절로 마구 흐르네.”

제주목관아

그렇게 희망 없는 비참한 유배생활에 정헌의 유배소를 가끔 들락거리며 수발을 돕던 홍윤애(홍랑)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향리 홍처훈의 딸로 어릴 적에 관기(官妓)였으나 기적에서 면천된 여염집여인이었다. 상처(喪妻)의 아픔과 오랜 유배생활의 고통에 피폐해진 정헌은 그녀의 따뜻한 배려에서 싹튼 사랑으로 위안과 삶의 의욕을 찾는다. 그는 어느덧 그녀를 기다리는 기쁨으로 고적한 유배생활을 극복하는 애달픈 연인이 됐다. 그녀를 기다리며 밤을 새운 연시 하나를 소개한다.

홍랑의 묘가 있던 자리

“사람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고

외로운 달 삼경이 되려는데

손짐 지고 텅 빈 마당에 서니

솔바람은 맑기만 하네.”

또한 유배지가 흡사 무릉도원이라도 된 듯 달뜬 기분의 시도 있다.

“무수히 피었던 복숭아 꽃나무

비온 후 잎이 무성하네.

속세의 소식 끊기고

무릉에 봄이 돌아온 듯…”

김시구

제주유배 5년째(1781년)의 정헌이 홍랑과의 사랑으로 평정을 찾던 3월에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한다. 김시구는 신임사화 때 노론 4대신(정헌의 증조부인 조태채)을 탄핵하여 무고하게 처형시켰던 정헌과는 정적이었다. 홍랑이 죄인 정헌의 적거를 출입한다는 걸 빌미로 그녀를 옥에 가두고 문초를 했다. 유형수 정헌이 죄인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지, 임금이나 조정을 비방했는지 심문했지만 홍랑은 시종일관 “청소하고, 빨래하며 잔일을 거들어주었을 뿐”이라고만 대답했다. 정헌에게 죄명을 씌워 죽이려던 김시구는 홍랑이 부인하자 그녀를 거꾸로 매달고 곤장70대를 쳐서 죽게 만들었다. 옥중의 정헌은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정현이 이배된 정의현적거

“목사 김시구는 배에서 내린 날부터 이미 나를 죽이려는 뜻을 가지고 … (홍윤애를) 강제로 불러다가 나의 적거에 출입한 죄로 특별히 만든 서까래와 같은 매로 70을 헤아리게 하며 때리니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져 죽었다. 사건이 너무 놀랍고 참혹하여 생각나는 대로 절구 한 수를 적었다. 신축(정조5년, 1781) 윤 5월 15일이다.”

또한 홍랑의 죽음에 대해 “혹형 밑에 기절하면서도 입으로는 오히려 억울하다면서 재난을 당할 빛이 더욱 다급해지자 목을 매어 죽었다.”며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를 남겼다.

 

“칼끝 같은 혹형, 사건에 근거도 없이

너의 말 대쪼개듯 하여 어지러움 잠재웠네

오히려 나의 죄 만들어 곧 밀계를 한다니

지금과 같은 생사 성군 시대에도 있는가.”

정현과 홍랑이 갇혔던 옥

홍랑의 장례식 날 비통한 심정을 기록한 정헌은 시의 서문에 “6월 2일 새벽 해로소리가 들려, 물어보니 홍랑의 발인인데, 가련하고 참담하여 일어나 절구 하나를 적었다”고 했다.

“귤나무 우거진 남쪽 석자 분묘

젊은 혼 천년토록 원한 남으리

초장 계조를 누가 드릴까

한 곡조 슬픈 노래에 절로 눈물이 고이네.”

그해 8월에 폭풍우가 일자 사람들은 홍랑의 원기(怨氣)일 것이라고 했다. 억울하게 옥에 감금돼 심문받던 정헌이 폭풍우 속에 홍랑을 기리며 남긴 시다.

 

“하늘로 감아올리는 원인모를 재앙

죽음은 실로 나 때문이지 어찌 그대의 원혼일까

가뭄에 열흘 거듭된 세찬 비바람

섬사람들, 오히려 여랑(女娘, 홍윤애를 말함)의 원한이라 말들 하네.”

홍랑의 묘소

폭풍우에 할퀸 제주감영 음습한 감방, 야속한 세월은 비통한 울분도 아랑곳 않고 부인 홍씨의 기일(9월 27일)을 맞았다.

“세상의 변고를 만난 계절 두 줄기 흐르는 눈물

지나간 일 마음 상해 슬픔을 시로 적네

인생의 다하지 못하는 감회 몇 번 돌아오는가

옥문에서도 또 가련한 날 만나네.”

옥에 갇힌 지 100일이 되는 날 정헌에게 “사형을 면하고 배소를 옮기라”는 임금의 어명이 도착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옛 적소에서 관리 김윤재의 집으로 적거를 옮겼다. 글고 마침내 1805년 29년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정헌은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내다 1811년 제주목사겸 전라도방어사를 자원해 부임한다. 도착하자마자 그 길로 홍랑의 무덤을 찾아 통음하고 추모시를 비문에 새겨 묘를 단장했다.

정헌은 27년의 제주 유배생활을 기록한 문집인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에 시(詩) 635수와 유배생활의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 목사사대부가 여염집여인의 묘에 ‘의녀(義女)’란 비명을 새기고 위령제를 지낸 적이 없다. 목사정헌이 존재함은 오직 홍랑의 희생이 있어서였다. 홍랑이 옥사할 때 어린여식이 있었는데 이모 품에 숨겨 산새미오름 절간으로 피신 후 곽지리에서 살았는데 정헌이 찾아가 한 맺힌 부녀(父女)상봉을 한다.

글고 미혼모홍랑을 자신의 호적에 부인으로 올렸다. 제주목사재임1년의 녹봉은 몽땅 농지를 사서 딸애한테 줬다. 제주목사 후 육지에 부임해서도 선정을 베풀어 부임처마다 그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선각자이며 참된 목자에 로맨티스트였다. 오늘날의 지자체청사에 정헌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귀감 삼으면 싶다. 그를 기린 시 한 수 적는다.

“영원한 세월에 아름다운 이름 족두리풀처럼 강렬하고

한 집안에서 난 높은 정절은 아우 언니 뛰어났으니…”

2020년 새해 첫날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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