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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마리테레즈의 사랑

마리테레즈의 사랑

“당신은 진정 매력적인 얼굴입니다.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네요. 당신과 나는 함께 굉장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1927년1월 파리의 유명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에 쇼핑하러가는 마리테레즈 월터(Marie Therese Walter 1907.7~1977.10) 앞에 중년의 사내가 나타나 그녀의 팔을 붙들며 뜬금없는 수다를 떠는 거였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뒤로 재치며 지하계단을 나서는 회색눈동자의 그녀가 황당해서 뿌리치는데도 따라오는 사내는 46살의 파블로 피카소(Pabro Picasso 1881~1973)였다.

수영과 등산 등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는 예술엔 흥미가 없었기에 피카소란 유명화가의 이름도 몰랐다. 더구나 암채 같고 능청맞은 꼰대에게 관심 따위도 없는 그녀였는데 사내는 6개월 동안 짓궂게 쫓아다니며 환심 사기에 혈안이 됐었다. 스토커처럼 마리테레즈를 따라다니던 피카소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초현실적인 초상화를 그려주며 구애작전을 폈다. 허나 피카소가 아주 유명화가란 걸 알았지만 그녀보다 29살 연상의 유부남이란 사실은 호락호락 마음을 열리 만무했다. 글거나말거나 피카소의 구애작업은 끈질기게 계속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지는 나무 없다고 “우리는 함께 훌륭한 예술을 해낼 수가 있을 거야.”라고 꼬시는 피카소에게 결국은 몸을 열어야했던 그녀였다. 열정적이고 정열적인 피카소의 성품은 예술혼에 접목 돼 불후의 명작을 남기곤 했지만, 마리테레즈한테 느낀 특별한 영감은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향한 욕정이 자신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분출시킨다는 걸 의식한 탓일가? 피카소는 아내 올가(발레리나) 몰래 그의 스튜디오에서 마리테레즈와의 이중생활을 시작한다.

피카소

“마리 테레즈 월터의 외모는 놀라웠다. 그녀가 파블로(피카소)에게 조형적인 영감을 준 여자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녀의 얼굴은 고대 그리스 스타일로 아주 매력적이었고 볼륨과 선이 뚜렷한 그녀의 몸은 완벽했으며 한 점의 빼어난 조각 같았다. --- 그녀는 모델로서 아주 훌륭했다.”라고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의 나날들>이란 책에 썼다. 프랑수아즈 질로 역시 피카소의 또 다른 연인으로 케임브리지와 소르본 대학교에서 공부한 지성파 화가였다.

실상 피카소가 마리테레즈를 쫓아다닐 땐 매너리즘에 빠진 침체기였지 싶은데 그녀를 품에 안은 후 청춘과 열정을 되살려 활기찬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피카소는 그녀의 금발, 빛나는 얼굴색, 조각 같은 몸매를 사랑했다. 그날 이후 그의 그림은 물결치기 시작했다.”라고 피카소의 친구 브라사이가 피카소의 전기에서 증언하고 있다. 마리테레즈의 일거수 일동작은 피카소에게 늘 새로운 영감을 주는 뎃상의 뮤즈였다. 

마리테레즈와 <꿈>

1932년도에 마리테레즈를 그린 작품 <꿈>은 경매가가 무려 1600억원을 호가하는 그림인데 ‘나는 사랑에 빠져 행복하다’ 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사실 마리테레즈는 어떤 가식도, 꾸밈도 없는 순수한 자태로 언제나 평안한 영감을 피카소에게 주었지 싶다. 은근한 분홍빛의 여인이 고개를 젖힌 채 잠든 모습에서 부드러움과 평온과 충만 뒤의 나른함이 묻어난다. 두 쪽으로 쪼개어진 얼굴은 흡사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크로스오버 하는 꿈을 형상화했지 싶고.

마리테레즈는 피카소에게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면서 위안의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그런 마리테레즈의 평안의 젖무덤은 변덕쟁이며 끝없는 탐욕으로 새로운 열정의 불쏘시개를 찾는 피카소를 붙잡진 못했다. 17세의 처녀를 안은지 딱 10년 후인 1937년에 피카소는 여류사진작가 도라 마르의 품안을 파고들어 또 하나의 정부(情婦)를 만든다.  그녀는 마리테레즈와는 상반되는 매력의 여자였다. 도라 마르와 뜨겁게 불꽃 피우면서도 피카소는 늘 그랬듯 위선적인 사랑의 연서를 마리테레즈에게 띄웠다.

“내가 지금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내 사랑, 여보. 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소. 부디 행복해지는 생각만 하시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주겠소.” 피카소의 이중성, 어쩜 분열적인 자기도취를 엿보면서 그의 명작이란 그림들을 보면 편집광적인 정신분열증의 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거다. 마리테레즈로부터 그림의 영감을 듬뿍 취하고 열정을 찾았던 피카소는 용도패기 처분하듯, 아니 한줌의 양심은 남았던지 아님 가증스런 성애자의 자기도취에 빠져 위선의 편질 보내곤 다시는 나타나질 안했다.

하긴 수많은 여성들을 홀리며 품에 안고 예술혼(?)을 되살리려는 불한당이었다. 피카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자들을 울린 성도착범인 – 어쩜 그루밍(Grooming)에 맛 들린 위인이었지 싶은 게다. 그렇게 위대한 위선가는 92살까지 살고 1973년 눈을 감는다. 마리테레즈는 피카소와의 불쏘시개 짓8년째에 첫 딸을 낳고, 집 나간 그를 기다리다 주검된 피카소를 맞는다. 글고 알량한 연인을 그리다가 그가 죽은지 4년 후 자살을 택한다. “내가 저세상에 계신 네 아빠를 돌봐줘야 해.”라고 쓴 유서를 딸에게 남긴 채였다. 마리테레즈의 순애보가 절절한 안타까움으로 가슴 뭉클해진다.

책 읽는 여자

뭉클해진 울림만큼 피카소를 향한 경멸심은 명확해진다. 세상을 어찌 살던 간에 뚜렷한 족적만 남기면 되는 위인들 탓에 세상은 늘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1900년대 시작 된 새로운 미술사조 '입체파(cubism)미술'의 효시를 연 피카소의 공적이란 게 수많은 여성들의 애증속에 발아된 거라면 어째  박수치고 싶질 않다. 피카소의 명예에 그의 그루밍적인 애정행각도 회자되어 후예들의 귀감이 됐으면 싶은 게다.

2019. 12

달리, 피카소, 고흐(좌측부터)
게르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