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바위에 새긴 7일간의 왕비
북풍을 차단하는 인왕산끝자락의 한양성곽 안 남향받이 사직공원은 곱게 물든 단풍이 막바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화톳불처럼 타오르다 사그라진 낙엽으로 주황색융단을 깔았다. 차가운 날씬데 황홀한 만추의 향연은 한창이다. 색깔의 잔치를 즐기면서 수북이 쌓인 낙엽의 신음소리에 귀 기우리며 한양산성 길을 더듬는다.
단풍 숲 사이로 언뜻언뜻 내미는 고층도심이 신기루마냥 숨바꼭질하고 남산과 안산자락의 만추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가 됐다. 만추사냥에 홀린 상추객(賞秋客)들 사이에 끼어 얼쩡대다 문득 경회루단풍생각이 떠올라 경복궁영추문을 들어섰다.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수정전이 가을햇살을 받아 솔숲 속에서 처연해 보인다.
뜰 안의 활엽수들이 몇 잎 안 남은 단풍을 붙들고 있어 설까? 길섶엔 쓸어모아놓은 낙엽이 수두룩하다. 관광객들 특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국여자들이 경회루의 황홀한 만추 속에 빠져 스냅사진 찍느라 야단법석이다. 왕이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곳이기에 많은 외국인들이 호반을 서성대며 경회루의 만추를 감상하는 게 딴은 의미 있고 멋있어 보였다.
호반에 드리운 경회루모습은 사시사철 아름답다. 그 데칼코마니 그림에 심취하다가 깔때기마냥 우뚝 선 북악산과 안왕산 치마바윌 마주쳤다. 좌측의 건물들 탓에 치마바위를 온전히 볼 순 없지만 조선조 땐 인왕산과 북악산은 장대한 산수화병풍이었을 테다. 중종임금도 경회루에서 인왕`북악산의 풍경을 감상하다 치마바위에 널린 분홍치마를 발견하곤 순간 스치는 전율에 멈칫댔을 테다.
어디서 많이 보았고 스쳤던 낯익은 치마여서였다. 그 치마의 주인공은 자신이 왕위에 등극하는 날 왕후자린커녕 쫓겨난 폐비신씨의 분홍치마가 틀림없지 싶었다. 그니까 영광과 비극이 뒤범벅이 된 그 황당한 날도 단풍이 한창 물오른 음력9월 초순이었다. 낙엽처럼 쓸리어나간 아내를 우두커니 쳐다봐야만한 임금이란 자가 진정 왕이란 말인가?
1506년(연산군 12년), 무오`갑자사화로 파멸궁지에 처한 호남과 경상도 유생들이 진성대군을 옹립하려는 반정의 기미를 알아챈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정변을 모의한다. 그들은 연산군의 심복들로 권력의 정점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9월2일 그들은 마침내 훈련원에 모여 거사를 단행하면서 진성대군에게 밀파를 보내 거사를 알리고 호위하게 했다.
난데없이 군사들이 집으로 몰려오자 진성대군은 연산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자결하려 서둘러댄다. 그때 부인 신씨가 밖의 동정을 살펴보니 말머리가 궁궐을 향해 있으니 안심하라고 자살을 막았다. 영민하고 침착한 신씨의 당부로 진성대군은 자결을 단념했다. 경회루 뒤 후원연못속의 정자 향원정(香遠亭)의 만추풍정은 미치도록 그윽하다.
낙엽이 부평초가 된 연못의 추색은 미적궁극을 연출한다. 그 뒤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비극의 장소다. 관광객 북적대는 경회루나 향원정과는 달리 고적하고 쓸쓸하다. 담장을 타고 넘나드는 확성기의 외마디절규와 북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왕비신씨가 궁궐에서 쫓겨나고, 민황후는 일본놈들한테 무참히 살해된 장소를 신무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태극기부대의 시도 때도 없는 국론분열 소동이 북악산에 맥놀이 되어 소음으로 보태져 청와대앞은 아수라장이라. 왕비 아닌 왕이었던 박근혜는 국정농단으로 영어의 신세다. 비운의 여걸들이 난장판 청와대앞의 시위대 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쳤다. 역사란 비극의 연속선상일까. 반정군은 궁궐을 향해 돌진하면서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살해한다.
글곤 창덕궁에 진입 연산군을 끌어내 폐위시켜 반정에 성공한다. 이날 살해당한 신수근은 신씨의 친정아버지며 연산군의 처남이었고,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의 장인(부마)이였다. 긍께 왕에 등극한 진성대군은 장인의 시체 위에 정작 부인신씨 마저 왕비자리에서 내쫓아내야 했다.
반정공신들이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반역 살해당했기에 폐비시켜야 한다고 우겨대서였다. 반정군의 등쌀에 업혀 등극한 허수아비 왕 중종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조강지처는 내칠 수 없다(糟糠之妻不下堂)’라는 사기의 고사(史記古史)를 한마디 뇌까렸을 뿐이었다. 가문의 몰락과 동시에 폐비가 된 신씨는 7일후 서촌에 있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
삼엄한 경비속의 청와대 앞을 가로질러 서촌을 향한다. 아까 어슬렁댔던 사직공원쪽이다. 농아학교 뒤로 치마바위가 선명히 다가선다. 중종은 이듬해 6월 숙의윤씨를 간택하여 8월 혼례를 올리니 장경왕후윤씨다. 공신박원종이 짠 프로그램 그대로라. 남편과 자식, 친정도 없는 폐비신씨는 뒷산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금실 좋았던 남편진성대군(중종)을 그리며 소일한다.
글다가 행여 남편이 볼라나 싶어 즐겨 입었던 분홍치마를 바위에 펴놓았던 것이다. 중종도 경회루에서 그 기미를 알아챘다. 하여 중종은 명나라사신을 맞으러 갈 땐 꼭 신씨거처 앞에 잠시 머물렀고, 신씨는 어마(御馬)를 위해 흰죽을 쑤어 먹이자 사단이 날까 봐 공신들은 신씨의 거처를 다시 죽동궁으로 옮겨버린다.
그렇게 피눈물 나는 생이별을 감수해야 한 애틋한 부부애가 치마바위연정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유약하고 못난 중종왕은 새 왕비치마자락 속에서 신씨를 얼마나 생각했을까? 자살을 막아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조강지처를 끝내 모른 척 할 수 있었을까? 가을 햇살이 북악산에 걸쳤다.
땅거미가 한기를 몰고 인왕산치마바윌 스쳐 내린다. 낙엽위에 눈발이 휘날리고 한 해는 또 저물 테다. 세월은 그런 애환을 눈 덮듯 하얗게 빛 바랜다. 청와대쪽은 지금도 시끌벅쩍이다. 중종반정도 권신들의 당파싸움의 돌파구였다. 그 패싸움에 애꿎은 백성들만 간장 녹고 피눈물 난다. 청와대 앞이, 광화문대로가 산책공간이면 좋으련만~. 201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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