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속의 창덕궁후원, 창경궁

창덕궁인정전과 회랑

어두컴컴한 아침은 창밖 나뭇가지들을 몸부림치게 하더니 아홉시쯤엔 함박눈을 퍼붓는다. 올 겨울 들어 첨이다. 아무리 지구온난화 탓이라지만 대한(大寒)이 낼인데 눈발 한 번 못보고 겨울을 보내야하는 서울사람들의 아쉬운 맘을 하늘은 읽었지 싶은 게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서둘러 아파틀 나섰다. 눈발이 언제 그칠지 몰라 가까운 창덕궁을 향했다.

 

부용지

하얀 눈을 뒤집어 쓴 고궁의 정취가 내 머릿속에 쫙 펼쳐지고 있었다. 창덕궁후원의 설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후원설경은 더더욱 간절했다. 전철타고 지하터널을 달리다가 안국역에서 지상으로 솟았다. 근디 이건 또 뭐야? 흩날리던 눈발은 사라지고 살짝 쌓인 눈은 하염없는 눈물을 짜고 있잖은가! 그래도 영하의 날씨에 잿빛구름은 낭만을 좇는 발걸음을 멈출 순 없게 했다.

창경궁 담벼락 너머 궐내각사지붕이 멋있다

높다란 담장을 휘두른 인파 뜸한 창덕궁은 엷은 눈옷을 시스루처럼 걸치고 감칠맛 나는 멋을 부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흰 비단으로 휘덮은 궁궐의 기와지붕과 깨 벗은 나무들이 살짝 걸친 눈옷을 털어내는 고혹적인 유혹이라니! 게다가 어느 순간 쏟아질지 모르는 설화부나비에 대한 기대~! 그래 설까. 11시 후원입장객은 만원이다.

소복 입다 만 낙선재와 앞길

창경궁은 창덕궁,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과 함께 조선시대 5궁의 하나로 동궐(東闕)이라 칭하는데,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上王)인 태종이 머물 궁궐로 짓고 수강궁(壽康宮)이라 하였다. 수강궁 공사는 수군(水軍)과 한양주둔 군인들이 동원되어 세웠다. 수강궁이 완성되던 해에 세종의 장인이었던 영의정 심온(沈溫)의 권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상왕 태종에게 이간질을 한다.

"심온 형제가 호령이 두 곳[세종과 태종]에서 나오는 것이 부당하다고 불평을 하였습니다"라고.

인정전 입구 진선문에서 숙정문까지의 광장

세종에게 전위(傳位)한 태종이 국정(國政)을 간섭한다는 불온한 의미였기에 태종은 뿔따구나 나서 관련자를 체포하여 처형한다. 글고 귀국 길의 심온을 의주에서 체포압송하여 소명기회도 주질 않고 사약을 내렸다. 세종비(世宗妃) 심씨가 시아버지인 태종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자기가 죽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왕비생모인 안씨 마져 노비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태종이 수강궁에서 승하한 뒤엔 그의 후궁들의 처소가 됐다. 나중엔 수강궁에서 단종이 즉위하고 세조도 승하한 곳이다.

창덕궁후원입구 망춘문

수강궁이 창경궁으로 바뀌고 크게 지어진 것은 성종 14년(1483)의 일이다. 성종은 노동력이 부족하자 도첩(度牒)이 없는 2천명을 한정동원 하여 30일간 노역시키고 도첩을 발행해줬다. 허나 공사가 지연되어 4천명의 승려에게 다시 도첩이 주어지자 조정선비들과 유학자들의 반발이 드셌으나 성종은 공사를 강행하였다. 신궁(新宮)이 완공되자 성종은 좌찬성 서거정에게 신궁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궁궐이름을 창경궁(昌慶宮)이라 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놀기를 좋아해 후원에 서총대(瑞총臺)를 쌓고 큰 연못을 파서 배가 다닐 수 있게 했으나 연산군이 쫓겨난 후에 공사는 중지되었다. 이 서총대 공사에 동원된 사람들은 모진 고생을 했으므로 백성들은 이 부역을 모면하기 위해 무명을 짜서 바쳤다. 이 때 사람들은 낡은 옷의 묵은 솜을 뽑아 질이 나쁜 무명을 짜서 바쳤으므로 이후부터 질이 나쁜 면포(綿布)를 '서총대 면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춘당지

원래 서총대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의 풍경이 비경이었음으로 역대 왕들은 바람을 쐬거나 놀이 장소로서 자주 찾았다. 그리고 서총대에서는 왕이 임석한 가운데 무신들의 활쏘기와 문신들의 과거를 보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서총대 과거(瑞총臺 科擧)라는 말이 생겼으나 후에 춘당대 과거(春塘臺 科擧)라고 바뀌었다. 창경궁이 창건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춘당지의 원앙과 청둥오리커플

선조는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패전했단 소식이 들리자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도성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하였다. 왕의 배신에 분통 터진 난민들이 각 궁궐과 관아에 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함에 창경궁도 이 때 소실되었다. 불 탄 창경궁을 중건하려는 계획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광해는 1615년 4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년 반만에 끝을 냈다. 그 후 창경궁은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의 난 때 일부 전각이 불탔으나 인조 11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주합루를 채우는 원천 샘
부용지 일원

창덕궁 부용지와 주합루 (昌德宮 芙蓉亭 · 宙合樓) 는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연꽃을 뜻하는 ‘부용(芙蓉)’의 연못은 34.5m × 29.4m에 이르는 방형으로 부용지(芙蓉池)라 칭한다. 임금과 왕실의 휴식공간으로 학문과 교육을 넘나들며 심신을 살찌우던 자연 속의 치유장소였던 셈이다.

부용정, 임금이 낙시를 하면서 낚은 물고기를 다시 방생하곤 했단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부용지에 담았는데 네모꼴 연못과 둥근 섬이 그걸 입증하고 있다. 연못 남쪽 모서리 장대석에 새겨진 잉어 한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은 왕과 신하의 관계 즉 물과 물고기를 비견함이라. 정조가 연못 안에서 비단 돛을 단 채색 칠한 배를 타고 자연을 감상하면서 낚시를 하던 곳이 ‘부용정(芙蓉亭)’이다. 정조 임금이 연못의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

 

부용지 둥근 섬의 소나무가 뻗은 방향에 서정기비각이 보인다

장대석으로 쌓은 연못가엔 부용정(芙蓉亭)과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이 있고, 언덕엔 어수문(魚水門)을 통한 주합루(宙合樓)와 규장각(奎章閣), 서향각(書香閣)이 숲속에서 솟아 부용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글고 연회와 과거시험장으로 쓰이기도 했던 영화당(暎花堂)이 독특한 모습으로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절묘한 경관을 이뤘다.

어수문 뒤로 주합루. 왕의 출입문인 어수문 옆에 신하들의 출입처인 작은 문은 고갤 숙이고 들라고 낮다
영화당(우)과 주합루(좌)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으며, 신하들과 어울려 꽃을 즐기고 시를 읊기도 하였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기둥에는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를 적은 주련(柱聯) 10개가 걸려 있다. 부용지 가운데에 섬 하나를 쌓고 그 뒤의 높은 언덕에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 일곽이 보이도록 하였다.

부용지섬과 어수문, 그 위 2층루각이 주합루

주합루의 왼쪽으로는 서향각(書香閣)이 있으며 주합루의 뒤 2단의 석대 위에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편액의 작은 건물이 있다. 서향각의 뒤 높은 곳에 희우정이 있다. 연못의 서측에는 서정기비각(西井記碑閣)이 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속에 연못과 정자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왕실의 휴식공간으로, 더는 비상시의 이궁으로 활용할 목적에 세운 후원(後苑)이다. 창덕궁 후원은 북원(北苑), 금원(禁苑), 상림(上林), 비원(秘苑)이라고도 불린 가장 한국적인 정원인데, 비원은 1904년 이후 주로 일제 때에 지칭된 용어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의두합

의두합(倚斗閤)은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하여 애련지 남쪽에 독서처를 고쳐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은 단출한 건물이다. 현재 ‘기오헌(奇傲軒)’ 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축물로 8칸의 서재로 단청도 안한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고.

의두합의 기오헌(중앙)과 운경거(우)

주합루가 개혁군주 정조와 규장각신하들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공개된 회의실이었다면, 기오헌과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홀로 미래의 정국을 구상하는 은밀한 공간 내지 독서실이었다.  특히 효명세자가 김노, 김노경, 홍기섭 등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영·정조시대의 탕평책을 텍스트 삼아 펼친 것도 독서실이 낳은 정책일 것이다. 젊고 현명한 개혁군주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만인  5월 6일 새벽 희정당 서협실에서 요절 했다. 22세의 열혈청년은 아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의두합과 연경당을 잇는 문
애련지와 애련정

애련지(愛蓮池)와 애련각(愛蓮閤)은 창덕궁 후원 두번째 공터에 숙종이 조성한 작은 연못과 앞면1칸짜리 정자를 말한다. 숙종은 "내가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더러운 곳에 있어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연꽃을 좋아했던 까닭을 말하면서, 연못과 정자의 이름을 '애련'을 붙였다.

숙종이 장희빈과 놀아났던 애련지

숙종은 1692년에 연못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 애련정의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속의 초석을 받침돌로 세우고 정자사방으로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에서 낙양창 사이로 사의 풍광이 변하는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어 기막힌 풍류가 엿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희빈과의 러브스토리를 유추해 보면 로맨티스트 숙종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바람쟁이 왕과 질투의 화신 장희빈을의 비극적 애증에 할 말을 잊는다.  

존덕정일원

존덕정(尊德亭)은  인조(仁祖)22년인 1644년에 존덕지(尊德池)에 세운 정자이며 이중구조의 육각지붕으로 독특한 구조가 일품이다. 정자의 마루도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고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우물정자천정은 보개천정처럼 화려한 장식인데 가운데에 황룡과 청룡이 장식되어 있다.

자연미의 극치를 이룬 존덕정의 반월지

"이 육각형 정자는 조선건축의 이채로운 구상과 재주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 육모지붕의 주심포집에 본 정자 외곽에 지붕을 따로 만든 퇴칸을 설치하였다. 이 정자의 난간이나 교창과 낙양각 등은 뛰어난 소목의 정교한 공예 솜씨를 보여준다..... 존덕정에 들어가는 돌다리 남쪽에 일영대(日影臺)를 두어 시각을 쟀다."라고 극찬 했다.

관람정과 반월지

존덕정에는 정조의 만천명월주인홍자서(萬千明月主人翁自序)란 유명한 명문 현판이 걸려있다. '만 개의 개울에 만 개의 달이 비치지만 달은 오직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로 정조 자신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결국 모든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초월적인 군주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존덕정과 그곳 지킴이인 200살의 은행나무

나의 연거(燕居)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써서 자호(自號)로 삼기로 한 것이다. 재위 20년을 지나 강한 왕권을 확립한 정조가 백성에게 왕의 덕을 고루 베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때는 무오년(1798, 정조22) 12월 3일이다. 

정조의 친필인 '만천명월주인옹' 현판
반월지에서 바라본 석교

1793년 2월 28일 [일성록]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규장각 각신과 이들의 형제와 자제들을 자주 후원으로 초대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대내(大內)로 돌아오려고 할 때 다시 신하들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 일은 매우 즐거웠다. 술통에 아직도 술이 남아 있으니, 이 존덕정에 처음 들어온 신하들은 다시 주량대로 다 마시라."하였다.

"날으듯이 삼백척을 흘러 (飛流三百尺)

멀리 하늘에서 떨어진다 (遙落九天來)

보고 있으니 흰 무지개 일어나 (看是白虹起)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를 친다 (飜成萬壑雷)"   옥류천에서의 숙종의 어제시(御製詩)이다.

효명세자의 독서실인 펌우사

글고 순조(11년)는 여름철에 이곳 존덕정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단다.

농수정
200살을 훨씬 넘긴 은행나무와

연경당 (昌德宮 演慶堂. 보물 제1770호)은 주합루와 영화당 구역을 감싸고 있는 작은 능선을 지나면 골짜기에 연경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 환경은 아름다운 숲과 연못 및 정자 등이 어우러져 이상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우측의 솟을 대문인 장양문은 사랑채로 통하고, 이 문을 지나 사랑마당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안마당과 사랑마당을 경계 짓는 담장이 꺾여 있으며 담장 가운데에 문인 정추문이 있다. 그리고 좌측의 평대문은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이다.

사랑채와 안채가 담으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나 한번 꺾여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전체 공간구성은 서로 연결된 만(卍)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를 가리킨 것.

사랑채의 오른편으로는 서재 구실을 하는 선향재(善香齋)가 위치해 있으며, 선향재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는 화계를 설치하고 제일 높은 곳에 농수정(濃繡亭)을 배치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99칸 연경당을 소개하는 해설사와 11시 참관객들

임금이 사는 궁궐보다 큰 집을 지을 수가 없는지라 99간짜리 연경당은 사대부가 지을 수 있는 사랑채의 전형이다.

연경당과 의두합근방 어수대에서 밤 늦도록 연회에 빠진 광해는 인조반정군에 쫓겨 달아난다. 그실 반정 전에 역모를 밀고 받았지만 광해는 측근 김개시와 훈련대장 이홍립만 믿고 방관한 터였다. 이홍립은 반정군에 깊숙히 발 담고 내통한 간신이었는데 말이다.

 

궁중여인들의 잠업(누에고치)영농을 위해 심은 뽕나무(좌)의 수령은 400여살. 우측은 회화나무
영화당 앞마당은 과거시험장 내지 활궁터 내지 경마시범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음주와 운동엔 등신(?)이었던 다산은 늘 꼴찌를 해 정조로부터 애정어린 농담을 듣곤 했다. 한 번은 정조의 권에 못이겨 술대작을 하다 자정을 넘겨 정조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하기도 했다

창경궁에는 정문인 홍화문과 옥천교가 있고, 동쪽의 명정문과 서쪽의 빈양문이 있다. 외전영역에는 명정전·문정전·숭문당이 있으며, 내전영역으론 함인정·경춘전·환경전·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창덕궁에 속한 부용지 일대까지 아우르던 후원 영역에는 춘당지와 관덕정, 그리고 일제 때 세워진 식물원이 남아 있다.

창경궁 입구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거처를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를 핑계로 일제(日帝)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알량한 명목으로 그해부터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버린다. 글곤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1909년에 개원하여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꿨다.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사이에 신작로(율곡로)를 만들어 왕권과 왕실의 상징인 궁궐의 위엄을 격하시켰다.

양화당

명종20년(1565) 임금이 친히 양화당(養和堂)에 임어하여 독서당 문신들의 시험을 치렀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통한의 환궁을 하면서 이곳 양화당을 거처로 삼았다고 전한다. 또한 이곳에서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가 고종 15년(1878)에 승하했다.

 

멋들어진 옥천교

경궁정문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천이 흐르고 그 위로 옥천교(玉川橋)가 있다. 성종14년(1483)에 만들어진 옥천교는 창경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조물로 멋들어진 돌난간을 설치했다. 뛰어난 석조 미술품과 아름다운 괴석을 들여다보면 선조들이 추구했던 자연미가 어땠는질 상상케한다.

 

통면전 뒷뜰은 산자락을 깎아 화계로 단장하고 굴뚝까지 멋 부려 쬐그만 후원을 빚어놨다

통명전(通明殿)은 왕비의 침전이다. 선조 8년(1575)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가 이곳에서 승하했으며,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음울한 애증비화가 피어오른 곳이기도 하다. 서쪽의 산자락을 화계로 단장하고 그 아래에는 화강석으로 연당을 조성했다. 통명전 뒤 우물에서 샘솟는 물이 연당을 가득 채우고 다시 명당수처럼 월대 앞을 돌아 빠져나간다.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함인정

함인정엔 사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도연명의 「사시」(四時)가 주련(柱聯)으로 걸려 있다.

"봄에 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春水滿四澤"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해라 夏雲多奇峰"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추고 秋月楊明輝"

"겨울 언덕 소나무의 외로움이 아름답구나 冬嶺秀孤松"

 

숭문당(崇文堂)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가 내포됐다. 영조는 이곳에서 친히 성균관의 태학생을 불러들여 시험을 치르기도 하고 주연을 베풀기도 했다. ‘崇文堂’ 편액과 ‘日監在玆’(일감재자)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란다. 선인문 안쪽 공간은 과거 왕세자가 머물던 동궁영역으로 사도세자가 죽은 비운의 현장이라.

궁궐과 소나무의 조화

“가마가 궁문을 나서니 해는 더디 지는데

한 줄기 향 연기 아지랑이에 뒤섞이네

탁 트인 거리에 많은 남녀 무리를 이루었고

건듯건듯 봄바람은 얼굴을 스치누나.”

숙종이 지은 시<홍화문을 나서며(出弘化門卽事)>를 찬찬히 읊다보면 태평했던 봄 풍정의 정취를 엿볼 수 있다.

취선당(지금의 낙선재 부근)에 머물던 장희빈이 그 서쪽에 신당을 꾸며놓고 숙종의 처소인 창덕궁의 대조전과 인현왕후의 처소인 이곳 통명전 아래에 흉물을 묻어두고 밤마다 무당을 불러들여 저주의 재앙을 빌다 발각된다. 왕비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으며 결국 장희빈도 사약을 받았으나 거절하자, 대노한 숙종이 궁녀들한테 밟아 죽이라고 명한다. 널판지 밑에 깔린 희빈은 그렇게 짓밟혀 죽었다. 애증의 깊이는 알 수가 없는가?  ‘무고의 옥’사건이다.

명정전(좌)과 가뭄에도 쉬이 마르지 않는 옥류천
궐내의 향나무고목
함인정 앞의 향나무

함인정(涵仁亭) 임진왜란 때 창경궁의 전각이 부분 불타버리자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에 있던 함인당을 이 자리에 옮겨 세우고 함인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궐지』에는 ‘함인’의 뜻을 ‘해동(海東)의 만 가지가 인의(仁義)에 흠뻑 젖는다’라고 기록돼 있다. 영조 때는 이곳에서 문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등 크고 작은 접견 행사가 이루어졌다.

경춘전(景春殿)은 주로 왕비와 세자빈이 머문 왕실의 안살림생활공간이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그런가하면 정조와 헌종이 태어난 장소라 ‘생과 사’의 장소다. 『궁궐지』에는 정조가 태어나기 전날 밤 혜경궁 홍씨의 꿈에 용 한 마리가 경춘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 큰 경사가 날 징조라 여겨 동쪽벽면에 꿈속의 용을 손수 그렸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편액은 순조의 글씨다.

성종의 태산비
금천가의 고목들

 

환경전(歡慶殿) 임금의 정침으로 시대에 따라 여러 임금과 세자가 머물렀는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요절했을 때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편액은 순조의 어필이다.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법전이다. 성종 14년(1483)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했단다.

춘당지는 원래 왕실의 농경지였다

춘당지(春塘池)는 원래 표주박 모양의 두 개의 연못이 연결된 방죽이었다. 위쪽에 있는 연못이 춘당지이고 아래연못과 그 주변일대는 왕실과 임금이 친히 농사를 짓던 내농포(內農圃)였다. 임금이 친히 모를 심고 추수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면서 백성들의 농경생활을 몸소 체험했던 게다. 그런 내농포를 1909년 일제는 연못으로 개조해버리고 동물원을 만들었다. 연못 속의 섬과 다리는 1984년에 조성된 것이다.

원앙과 청둥오리 커플이 겨울벳노리를 하고 있다
관덕정(좌) 칠층석탑(우)

춘당지의 숲 속을 잠시 파고들면 자그마한 전각이 하나 있다. 임금의 활궁장소인 관덕정(觀德亭)이다. ‘관덕’이란 이름은 <예기>에 “활 쏘는 것으로 덕을 본다. 쏘아서 정곡을 맞추지 못하면 남을 원망치 않고 제 몸을 반성한다”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란다. 궁궐에서 떨어져 숲 언덕에 있는 관덕정에 서면 여기가 서울도심인가? 싶게 고적하다.

2020. 01. 19

두 개의 연못을 잇는 춘당지 수로부근

창경궁 배치도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 문정전 숭문당 함인정 환경전 경춘전 통명전 양화당

집복헌·영춘헌 선인문 월근문 집춘문 관덕정 식물원 춘당지 성종대왕 태실비 관천대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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