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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황홀한 만추의 소귀천골 & 진달래능선

북한산의 십여 개의 계곡 중에 소귀천계곡은 삼각산에서 발원한 골짝으로 우이동계곡과 합류하는 가장 긴 골짝이다. 소의 귀를 닮은 골이라고 소귀천, 또는 젤 긴 골짝이라는 소귀천계곡은 인적이 뜸한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된 골짝이다. 만추(晩秋)의 소귀천은 어떤 풍정(風情)일까? 더구나 엊밤 모처럼 뇌성벼락에 소나기를 뿌린 참이라 단풍은 산길을 비단길로 수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나래를 펴며 우이골짝을 찾아들었다.

우의계곡과 소귀천계곡의 합수천변길

우이골짝에서 선운교우측은 백운대코스, 좌측은 대동문`동장대코스다. 좌측의 할렐루야영빈관은 만추의 멋을 한껏 부리며 들머리를 내준다. 고급요정, 영빈관은 드라마<자이언트> 촬영지로 높은 담장만큼이나 비밀스러워 보인다. 옥류교를 건너면 소귀천계곡은 울긋불긋 치장을 하고 낙엽을 수북이 쌓아 가을정취 물씬한 산책길을 내준다. 아직도 단풍이 한창이다.

할렐루야영빈관

여읜 나무는 떨군 낙엽보단 매단 단풍이 훨씬 많아 계곡을 붉게 물들여 놨다. 물기 젖은 낙엽은 부스럭대는 소리 대신 부드러운 쿠션으로 발마사지를 한다. 햇살이 붉은 골짝을 헤집으며 단풍을 애무하면 곱게 치장한 이파리들은 간지럽다는 듯 살랑댄다. 그 살랑대는 파동은 스산한 바람결이 되어 나의 뺨을 스친다. 감미롭다. 청량한 가을바람이 깊은 들숨으로 창시까지 서늘케 한다.

간밤의 소나기는 만추의 진풍정을, 참맛 빛깔을 죄다 소귀천골짝에 몰아놓았나 싶었다. 빨갛다 못해 시퍼렇고, 노랗다 못해 갈색이 된 고엽만장(枯葉滿場)을 한적한 계곡을 질펀하게 깔았다. 망설임 없이 오감을 연채 느림의 시간을 붙잡는다. 치유시간은 돈으로 살수 없는 자연의 보시다. 그 행운은 스스로 찾을 때 주어진다. 늦가을 소귀천골짝은 자연을 사랑하는 바지런한 산님에게 베푸는 만찬장이리라.

돌담을 휘둘러친 용천수 쉼터에서 만추를 낚는 여인들

언제 쩍부터 마신 용천수(龍泉水)일가? 이끼돌담약수터에 아낙네들이 만추사냥을 나와 늦가을을 낚고 있다. 그녀들의 하루가 그리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 짬이 나도 몰라서, 게을러서 만추사냥으로 얻는 힐링의 달콤한 맛을 생각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 눈치껏 알아챌 때 보물이 된다. 약수 마시고 반시간 남짓 황홀한 단풍에 취해 낙엽 밟으며 오르면 또 바위가 짜내는 용담수(龍淡水)터에 닿는다.

소귀때기골짝은 파고들수록 단풍이 찬란해졌다

누가 언제쩍에 바위에 ‘龍淡水’라고 음각했는지 용이 꿈틀대듯하다. 한 모금 마시면 저절로 치병될 성싶었다. 근디 약수 받아내려 용암(龍巖)에 구멍 뚫고 녹슨 쇠파이프 쑤셔 넣은 게 눈에 거슬린다. 무지막지하지 않는가? 그렇게 소 귓구멍은 파고들수록 황홀경은 극에 달한다. 농익은 만추풍정이 더 고혹적인 탓일까? 소귀천단풍이, 소귀천계곡의 가을이 이토록 화사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용담수, 음각 된 글자와 녹슨 파이프의 부조화에 약수맛마져 떨어질까 싶었다

아내는 소귀때기만추에 푹 빠져 ‘설악산단풍구경 갈 것 없다’고 기염을 토했다. 돈 들어 고생고생하면서 애써 설악산 갈 필요가 있겠냐? 고 설악산단풍노랠 부른 나를 비아냥대는 거였다. 사실 설악산단풍에 빠져보지도 못한 아내지만 나는 그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단풍사냥 하러, 가을정취에 심신치유 받으러 한 시간이면 족할 소귀때기골짝에 기필코 와야겠다.

글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어려울 게 없는 맘만 먹으면 실행할 수 있을 약속이라. 불타는 소귀천골짝 숲 사이로 시단봉이 숨바꼭질한다. 울긋불긋 때깔 나게 성장한 채다. 진달래능선에 올라탔다. 꺽다리나무들이 미처 떨궈내지 못한 단풍들을 만장처럼 나붓댄다. 바람이 단풍이파리에 엉겨 흔들며 동행하자고 앙탈부려도 소용없다. 애착 땜일까? 미아가 될 두려움 땜일까?

나무는 안다. 결국엔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하여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이파리를 차마 떼어놓질 못하고 있는 거다. 눈치 빠른 바람은 못이긴 척 그냥 휙 지나간다. 그래도 맘 단단히 먹은 이파리들은 바람 등에 올라탄다. 허공은 무한대고 세상은 끝이 없단 걸 바람등에 타고서야 터득한다. 그때 착지하여 비로써 낙엽이 된다. 제2의 값진 생애가 시작된다.

이끼꽃옷을 걸친 바위는 단풍잎까지 장식품으로 단장했다

나무수액으로 살았던 걸 알아챈 낙엽은 썩어 수액이 됨을 기꺼이 택하려 함이다. 그 낙엽들이 나무뿌리를 이불마냥 덮었다. 바람이 낙엽들을 쓰다듬고 허공을 향한다. 나무가, 매달린 단풍이 춤을 춘다. 글고 여행을 떠난다. 미련 많던 그들도 떠날 때를 안다. 그 춤사위 여행 뒤로 얼핏 만경대가 까꿍을 하고 인수봉이 민대가릴 드민다. 그 위로 하얀 구름이 쓸어낸 자린 눈부시게 파랗다.

설산 리허설 중인 인수봉과 만경대가 팥배나무열매장식을 하다

인수봉이, 백운대와 만경대가 파란하늘이 쏜 햇빛에 설산이 됐다. 다가올 겨울 리허설이라도 하는 품새다. 바람이, 햇살이 소나무에 잠시 앉아 쉰다. 소나무가 독야청정하다. 놈들은 꼭 바위들을 모아 마실을 만들곤 한다. 글고 평생의 연애질을 한다. 바람이 전해주는 세상사얘기들로 암송의 동거는 결코 심심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그들은 그 자릴, 사랑을 지킨다.

좌측 멀리 도봉산 거너편에 수락산

진달래능선은 암송의 연애질과, 나무와 단풍의 이별연습과, 바람과 햇살의 장난으로 우릴 흥분시키고 있었다. 걷는다는 게 이렇게 상큼할 수가 있을까싶게. 멀리 도봉산바위들도 겨울연습 하느라 설산이 됐고, 하얀 각설탕의 도심 뒤로 수락산은 시스루를 걸쳤다. 자연은 항상 준비된 채 사랑하는 이들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걸 내 준다. 오늘 소귀때기가 베푼 만추의 황홀경에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2019. 11. 11

꽃길은 아무나 걷나?
수락산 앞은 각설탕 하치장
소귀천 입구
소귀천계곡 들머리
▲할렐루야영빈관▼
옥류교
소귀천탐방지원센터와 화장실
어느 산악회수련터 석물(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패길까?)
용천약수를 긷는 노익장
단풍카페트를 원없이 밟는 행운은 아무나 취하나?
용담수를 긷는 산님들
단풍꽃계단길은 장장 오리나 이어진다
불붙는 시단봉
삼각산
얼마전에 아내의 간덩이를 콩알만큼 만들었던 칼바위능선이 거인처럼 다가섰다
암송의 마실도 단풍이~!
▲인수봉,백운대,만경대가 설산(?) 예행연습이라▼
암송의 연애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