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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길 - 산행기

태풍다나스가 선물한 주전골삽화 - 설악산

태풍다나스가 선물한 주전골삽화 - 설악산

독주암

태풍`다나스가 남해에서 북상중이란 토욜아침의 서울은 태풍전야의 정중동 그 정황을 연출하나 싶었다. 간혹 잿빛비구름을 가르는 햇살은 가랑비얼굴을 비추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얀 눈 덮인 바위산 같은 설악은 울`나라에서 젤 아름다운 산이라 사시사철 탐방객도 많다.

태풍다나스를 우습게 여겼는지 싶은 한숲산님130여명 속에 끼어 설악을 찾는다. 한계령을 넘자 비바람은 안개까지 몰면서 사위를 어지럽힌다. 대청봉오를 산님들이 우무(雨霧)속으로 뛰쳐나가 사라진다. 다나스에 겁먹은 나는 애초부터 대청봉행은 단념하고 주전골에서 뭉그적댈 심산이었다.

다나스가 심술을 부리는 오색주차장 들머리

오전10시 넘어 오색주차장에 팽개쳐진 산님들이 엉거주춤하고, 얼떨떨한 나는 판초우이로 중무장한 채 우중속의 주전골을 향했다. 더워서 땀 흘려 멱 감으나, 비 젖어 초라한 생쥐꼴 되긴 마찬가지다. 그래 이 빗발 속에 산님들은 쏘다니고, 마실 수 없단 오색약수터엔 뭣 땜시 우글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암반 위로 솟는 오색약수터

매일1500ℓ솟는 약수엔 철과 탄산이 많아 지렁이를 넣으면 죽어버린다는 데 빗속에서 지렁이라도 포획하여 비비꼬는 최후를 보는 걸까? 어디서 언제 왔는지 어슬렁거리는 산님들도 많다. 반시간쯤 빗발을 헤치자 성국사가 고즈넉히 비 젖은 채 서있다. 텅 빈 마당은 빗발만 어지럽다.

성국사석탑

비법벅이 된 나리꽃무더기 속 석탑의 성국사를 오색석사라고도 하는데 고운 최치원이 진성왕의 하명으로 받아 쓴 무염국사 비문(백월보광탑비)에서 연유한다. 신라의 무염국사는 12살에 성국사에 입산 고승이 됐는데 비문에 설산 오석사 유오색석고명야(雪山 五石寺 有五色石故名也)라는 글귀가 있다.

오색이란 지명이 최초로  등장한 거였다. 오색돌이란 말은 아름다운주전골짝을 말함이었다. 죄다 알몸 들어낸 오색돌이 물기에 젖어 한결 반짝댄다. 검붉은 화강암이 여인의 맨살처럼 곱다. 목말라 기우제라도 지낼 참이었던 설악은 태풍다나스의 가장자릴 붙잡고 춤사위라도 벌리나 싶고~!

년 중 하얀 세찬냇물이 흘러야 진정한 설악풍정일 텐데 물길마른 주전골이 하얀 돌멩이바닥을 까발려서야 설악답다고 할 순 없잖은가? 남설악주전골짝은 내설악백담계곡이나 외설악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설악의 3대계곡이라 일컬을 만큼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빗발에 흠씬 젖은 짙은 녹음의 숲이 뚝뚝 떨구는 물방울세례를 받으며 숲길을 헤치면 다가서는 풍경은 사뭇 몽환적이다. 안무를 시스루처럼 걸친 설악이 한 꺼풀씩 옷자락을 벗어던지며 스트립쇼 하듯 알몸을 던져오는 유혹에 태풍은 까맣게 잊는다. 내 여길 몇 번째 찾지만 주전`흘림골은 카멜레온처럼 변신하곤 성장(盛粧)하여 탄성을 지르게 한다. 

골짝을 파고들자 오색바위들이 쭈빗쭈빗 칼춤을 추며 시스루를 벗어던진다. 저 위험한 칼춤은 차라리 마술에 가까운 환상적인 쇼다. 뉘가 저 칼바위춤사위를 독주암이라 했능가? 한 사람만이라도 앉을 틈새도 없는 뾰쪽바위숲이라 독좌암이라 했다는데 말이다.

독주암의 쇼는 계절 따라 걸치는 시스루도 달라 산님들에겐 로망의 무대가 됐단다. 독주암의 무대 뒤엔 선녀들이 알탕을 즐긴 또 하나의 무대가 펼쳐진다. 희멀겋고 붉으스레 변한 변성암반은 소(沼)를 만들어 명경탕을 만들었다. 티끌 한 점 없다.

밤엔 하늘의 별들이 죄다 명경탕에서 목욕을 하며 반짝반짝 대는지라 선녀들도 은근히 탐을 내다 달밝은 여름날 드뎌 하강하여 목욕을 즐겼다. 글다보니 시스루옷자락도 거추장스러워 바위에 벗어놓고 알탕으로 밤을 새웠기에 선녀탕이 됐단다. 놋쇠를 훔쳐 숨어 든 도적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선녀탕

선녀를 보고 싶어 안달 난 총각은 주전골선녀탕 숲에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주전골엔 선녀의 알몸을 훔쳐보려고 밤을 샌 머슴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선녀탕보단 더 깊숙한 골짝에 처박혀 일확천금을 꿈꾼 도적떼들도 웅성거렸다. 전설은 노상 환희와 비극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주전골잔도

놈들은 위폐동전을 만들기 위해 이곳 깊은 골짝에 아지트를 만들고 밤낮으로 놋쇠가짜주전을 만들어 냈다. 여기 골짝이름이 주전골이라 부르게 된 사연이다. 아마 놈들이 설치는 통에 선녀들의 발길도 뚝 끊겼지 싶은 게다. 선녀당에 물 붓는 여울소리가 선녀들이 수다떠는 소리같다. 

왕방울물방울이 후드득 쏟아진다. 푸나무들이 싸아~하며 춤을 췄다. 숲을 빠져나간 바람이 회오리가 되어 안무를 휘감아 바위를 기어올랐다. 바람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자연은 신통방통 신기하고 멋지다. 빗발 흩날리는 주전골의 물젖은 때깔이 신선하고 적요해서 좋다.

소리는 오직 비의 속삭임뿐이다. 오늘의 설악주인은 새도 짐승도 아닌 바람과 비다. 바람을 탄 비, 숲을 깨우는 바람의 살가운 속삭임은 내 창시까지도 관장하는 힐링의 순간이 된다. 세모꼴바위굴 앞에서 인증하느라 산님이 줄 서있다. 금강문이라. 깨달음에 드는 입구라는 건가?

금강문

부처되기 싫어선지, 통문하기 까다로워서인지 사진만 찍곤 에둘러간다. 중이 된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고행이란 걸 다 안다. 희고 누렇다가 검붉어진 칼바위능선의 숨바꼭질은 계속된다. 흘림골은 키다리장송을 보초 새워 출입을 가로막았다. 위험해선가 아님 설악의 휴식을 위해선가?

주전`흘림 합수지점에서 본 흘림골입문

조선조초기, 매월당김시습이 사육신시신을 노량진가묘에서 계룡산으로 옮겨 비밀히 이장했다. 글고는 시침이 때고 심산을 유랑하다 오세암에 잠시 머물 때였다. 하루는 여기 주전골짝을 걷다가 무료했던지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두둑시리 봤다" "두둑시리 봤다"고.

‘두둑시리 봤다’소리는 텅 빈 바위산에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깊은 골짝맥놀이로 번졌다. 그 맥놀이가 채 가시기 전에 소요가 일더니 돌멩이가 구르고 나무가 흔들리며 괴성과 함께 봉두난발한 떼거리가 우르르 매월당을 포위했다. 위폐 찍던 도둑들이 산적으로 직업을 업그레이드한 거였다.

“임마, 두둑시리 내놔” 두목 비슷한 놈이 눈깔을 부라리며 겁박한다. 매월당이 텁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야릇하게 웃었다. 두둑시리커녕 말짱 헛것이었다는 걸 간파한 도둑 한 놈이 성깔 급하게 칼을 빼내어 매월당머릴 향해 휘갈겼다. 매월당이 살짝 고갤 비켰다.

바람이 씨~ㅇ하고 허공을 가르자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잘린 상투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매월당은 갈기 세운 수사자처럼 일그러졌다. 아니 도둑의 눈에 그리 보였다. 기가 죽은 산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풀에 놀라 뇌까린다.

“이것 봐라! 이 늙다리가 또 뭔짓인가? 중도 아니구, 아닌 것도 아니구, 빨래도 아니구, 걸레도 아니구?”하며 침을 퇴퇴 뱉으며 돌아선다. 산적의 칼솜씨가 형편없었던지 아님 매월당의 방어술이 한 수 위였던지는 모르되 산적들은 애꿎은 푸나무에 칼날을 휘저으며 골짝으로 사라졌다. <출처: https://pepuppy.tistory.com/501>

'두둑시리 봤다'는 설악산심마니들이 지들끼리 쓰는 '무더기 산삼 봤다'는 은어고, 그래서 설악산골에선 이 얘길 빗대 "빨래도 아니구 걸레도 아닌 이바구?"란 말이 전해 온단다.  나도 ‘두둑시리 봤다’고 외쳐볼까? 날씨가 날씬지라 메아리도 맥놀이도 안 될 것 같다.

요즘은 산적 대신 멀쩡한 성도착증도둑이 후미진 곳에서 얼쩡댄다니 걸레도 빨래도 아닌 것도 아니 될 테다. 도둑들이 놋그릇으로 위조엽전을 만들다 만 놋쇠뭉치가 바위가 되어 차곡차곡 쌓인 위폐바위 앞을 지나자 용소폭포가 긴 꼬리를 흔들면서 괴성을 지르며 나타난다.

시루떡바위

괴성은 암놈의 울부짖음이다. 여기 소엔 암수이무기가 살았었다. 천년 묵은 이무기 한 쌍이 오늘 같이 비바람 치는 날 승천하려다 그만 암컷은 실수로 소에 떨어져 결국엔 바위가 돼버렸다. 폭포수는 물살을 가르며 승천하는 이무기의 하얀 비늘처럼 보인다.

위에서 본 용소폭포

비가 오면 올수록 흰 물살과 굉음은 승천하는 이무기의 형상을 한단다. 이무기를 보고 싶걸랑 장대비 쏟아지는 날 용소폭폴 찾을 일이다. 만경대도 빗장을 걸어놨다. 도적놈들도 사라졌는데 주전골엔 빗장 건 곳도 많다. 만경대 빗장은 가을에만 푼단다. 되짚어 주전골 깊숙이 들어가 거송을 우산삼아 기갈을 때운다.

용소폭포

토종다람쥐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점심당번을 자청했다. 고수레를 할지말지 망설이다가 놈한테 군것질 한 조각을 보시(?)한다. 놈이 내 눈치를 살핀다. 아니 산님 앞에선 여시를 벗어 귀신이 된지 시간깨나 흘러 보낸 놈이다. 멀리 안 가고 내 주윌 계속 얼쩡거린다.

혼밥신셀 면케 한 다람쥐

디카를 들이대도 달아나긴 커녕 포즈를 취한다. 나와 눈까지 맞춘다. 필시 암컷일까? 맹랑하다. 암튼 산엘 가면 혼밥신세이기 십상인 내가 오늘은 설악주전골에서 다람쥐와 겸상을 했다. 태풍다나스는 어찌 하고 있을꼬? 바람이 숲을 흔든다. 숲이 물세례를 퍼붓는다.

삐끗 열린 골짝하늘에 회색구름이 달음질치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아나는 구름의 숨소릴까? 더는 숲을 흔드는 바람소릴까? 나는 헛기침을 했다. 글곤 매월당을 생각해 봤다. 태풍다나스가 선물한 설악산주전골에서의 행복감은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2019. 07. 20

▲성국사▼
▼독주암▲
▲선녀탕▼
▲용소폭포▼
위조주조용 놋쇠가 굳어진 주전바위
겸상을 할까 말까로 고민(?)케 한 다람쥐, 결국 놈은 내 맘을 낙았다
용소폭포탐방지원센터, 만경대행 빗장은 가을에 거둔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