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조선여인의 사랑과 야망
18세기 말 남원에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두 남녀가 열여덟 살이 되자 결혼을 했으니 천생연분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겠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시대에 연애란 언감생심 이였을 테지만 서로는 이심전심으로 애틋한 감정의 필은 날려 보냈을 터.
결혼식을 올린 휘영청 밝은 봄밤, 신부 집에서 첫날밤을 맞은 신랑(하 립)이 신부(김씨, 삼의당, 1769~1823)에게 시문(詩文)으로 말문을 텄다.
“우리 둘은 필시 광한루의 신선일 겁니다 (相逢俱是廣寒仙)
오늘밤 달이 밝으니 옛 인연을 잇는 게지요(今夜分明續舊緣)
배필은 원래 하늘이 정해 놓는데(配合元來天所定)
세상에 중매쟁이만 괜히 바빴던 게지요 (世間媒婆總紛然)”
다소곳했던 신부가 仙, 緣, 然자를 차운(次韻)하여 답사를 합니다.
“열여덟 청년과 열여덟 처녀가 (十八仙郞十八仙)
결혼이란 촛불을 밝혀 좋은 인연 됐네요 (洞房華燭好因緣)
태어난 때가 같고 산 마을이 같으니(生同年月居同閈)
오늘밤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까 (此夜相逢豈偶然)”라고.
신랑은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하 연의 후손이고, 신부 또한 ‘조의제문’을 지은 김일손의 후손이지만 3~4백년이 지난 지금은 농촌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근근한 가세였다.
신혼부부의 목표는 오직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양명하는 거였다. 하여 부부는 남편이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각방을 쓰기로 하고 남편은 공부에 매달렸고 아내는 뒷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초를 감내해야 했었다.
그렇게 1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으나 하립은 시험엔 번번이 낙방하고 말았다.
산사(山寺)에서 책만 붙들고 있는 남편이나 집에서 고생하는 아내나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하립의 아내를 향한 그리움은 넘 절절했다. 그 애타는 맘을
“죽기로 결심한 마음인데
손에 든 시와 편지가 자꾸만 중얼거립니다
밤마다 그리운 생각 어디에~
오색구름에 단정히 앉아있는 저 미인에게 있네.” 라고 써 편지로 보내면 아내는,
“여자들이란 여려서 흔히 마음이 잘 상합니다
그래서 그리우면 늘 시를 읊는 게지요
대장부라면 의당 몸이 바깥에 있는 법
고개 돌려 규방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고 회답했다.
하립의 거푸 낙방은 본인의 재능과 우유부단한 성품에도 기인하겠지만 당시의 과거란부패하여 빽 있는 자들을 등용하기위한 요식행위이기 일쑤였다.
하립은 아내에게
“그래도 그리운 걸 어떠해?”라고 물으면 삼의당은
“편지 속에 그리움(相思)이란 말을 쓰시다니요
그건 집안 여자들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라고 야멸찬 답을 했다.
그러다 또 과거에 낙방한 하립이 아내를 찾아왔다 떠나게 된 전날 밤에 삼의당은 술상을 차려놓고 기생인 듯 남편에게 권주가를 읊는다.
“술을 권합니다
술을 권하니 님은 사양치 마소
유령과 이백도 모두 무덤의 흙이 되었으니
한잔하자 권할 자 없소이다
술을 권합니다
술을 권하니 님은 또 마시소서
인생의 즐거움이 몇 번이나 되겠소
나는 님을 위해 칼춤을 추리라”
아내가 준 술잔에 눈물을 떨군 하립은 마음 추스르고 한양으로 떠났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소식을 못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가슴 쓸어냅니다.
“그리워 괴로워 그리워 괴로워
닭이 세 번 울고 북은 다섯 번 울고
또록또록 잠은 달아나고 원앙베게만 보네
눈물이 빗물처럼 눈물이 빗물처럼” 라고 시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코가 석자나 빠진 하립이 지친 몸을 가누며 터덜터덜 집안으로 들어섭니다.
버선발로 뛰쳐나가다가 왈칵 눈물 삼키는 삼의당, 마당에 선 채 하립이 쉰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보, 내가 죽일 놈이오. 나는 정말 안 되는가 보오.” 서른 세 살 되던 1801년 이였다.
과거를 포기하고 몇 뙤기 안 된 남원 땅을 팔아 땅값 싼 진안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집안은 시아버지, 큰 딸이 죽는 줄초상의 불행이 이어졌으나 욕심을 버린 마음은 평안했다.
행복했을까?
삼의당의 야심은 결국 하립이 42살이 되던 해(1810.9)향시에 합격하게 한다. 그리고 본시(本試)를 보게 하기 위해 남편을 한양으로 보내면서
“다시 서울로 웃음 지으며 가는 그대
여관에서 눈물 만들어 돌아오지 말기를.”이라고 읊었다.
그러나 삼의당은 끝내 농부의 아내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뛰어난 문체는 그녀가 남편의 형제들을 천하효자들로 묘사해 쓴 <담락당, 다섯 형제 효행기>가 유명한 설화가 돼 ‘하씨효자전’으로 진안군지에 기록 됐으니 명예를 얻은 바다.
남편의 출세만이 명리를 얻을 수 있었던 조선후기의 여자들에겐, 삼의당의 행복을 쫓는 야망은 빽 없고 가난한 촌부에겐 꿈으로만 응얼지고 말았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로 살아가다 1823년 눈을 감았다.
끝내 농사꾼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심미안이 쓴 센스 발랄한 시 한 수를 읽는다.
“뽕 따는 성남의 언덕에(採桑城南佰)
가늘가늘 흰 손이 살짝 나왔네(纖纖映素手)
소녀의 휘둥그레 놀란 눈(少年飜驚目)
훔쳐보네 괜히 오래 머물며(相看住故久)"
-이상국의 미인별곡-에서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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