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무릎수술로 2주간 입원했다가 퇴원, 자가 치료중인 일곱째 누나 댁을 찾았다.
수술예후가 좋아 이젠 목발 없이도 아파트단지 내 수퍼 정도는 절룩걸음 일망정 다니신단다.
나는 지방에 산다는 핑계로, 더는 천성이 무심해서(아내가 나를 그렇게 타박한다) 이제야, 그것도 큰애가 싱가포르로 이사를 간다니까 상경한 김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늦은 문병을 간 셈이니 불손하기 이를 데가 없겠다 싶기도 했었다.
사실 서울엔 여러 번 왔었고, 별 볼일 없이 며칠씩 거들먹거리면서도 누나를 찾아간다는 건 얼른 내키질 안했다.
별다른 이유랄 게 없이 가난하여 내가 가면 부담될까봐 모른 척 했었는데 댁으로 찾아간지 벌써 5년도 훨씬 지났다.
수술한 걸 알고 있으면서 이제야 찾은 나를 누나는 불편한 몸으로 얼싸안고 반가워한 나머지 눈시울까지 적셨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니 밥 먹고 가라. 만칠 천 원주고 갈치 한 마리 사놨다.”라고 하시면서 내 얼굴을 살핀다.
동생이 뭐 길래? 내가 무슨 동생노릇을 했다고? 팔십 노인이 절름발이 걸음으로 수퍼엘 가서 내 좋아하는 갈치 한 마리를 사 저녁준비를 하시려는 거였다.
그런 누나에게 난 오면서 빈손으로 털래털래 와 봉투 하나만 꺼내 놓았으니 ‘인정머리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작자’란 말을 아내에게 들어도 싼 놈인 것이다.
누나의 가난은 빈농출신인 매형을 만나면서부터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인 것은 6.25동란 이였다. 내 고향 불갑산엔 빨치산의 아지트였고, 밤이면 빨치산이 내려와 온갖 도륙질을 하던 때라 처녀인 누나는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미친년흉내를 내야했었는데 뒷마을 지인이 중매를 서서 ‘양반네 집안청년’이란 말에 빨치산에 빼앗긴 것 보다는 낫겠단 생각으로 혼인을 시켰다는 거였다.
매형님네가 어찌나 가난했던지 선친께서 총각 선뵈러 갔을 때 그 동네 잘 사는 집에 떡하니 모셔 극진히 대접했다는 얘길 난 몇 번이나 들은 바였다.
암튼 누나 네는 가난은 옆구리주머니처럼 달고 살았는데 슬하에 딸만 셋을 둬 아들 없는 가난의 멍애까지 감내해야 했으니 예쁘고 똑똑하고 친절한 누나인들 숙명이려니 여겼을 테다.
가난이 결코 흉이 아니고, 더는 불행도 아닌데 난 매형님을 경원시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매형님을 향한 나의 불경이 죄송하다. 그 매형님이 치매로 일 년 전부터 요양병원에 입원치유 중이라 누나는 혼자 사신다.
그런 누나가 지금 이 상태가 최고로 행복하단다.
매형님을 입원시키기 전까지 간헐적으로 발작하는 치매기는 누나에게 온갖 행패와 욕설과 폭력을 휘둘러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근데 지금은 열네 평짜리 아파트를 소녀처럼 꾸며놓고 하고픈 대로 살고 계시니 당신 몸이야 좀 불편해도 천국이 다름 아니란다.
건강 이외에 물질적인 부자란 건 고민 많은 짐덩이일뿐이다는 누나의 말씀이 진실이라.
그런저런 얘기로 한나절을 보낸 난 ‘갈치구이 저녁을 먹고 가라’는 누나의 간청을 뿌리치고 근처에 있는 매형님이 계신 요양병원을 찾아갔다.
간호사의 안내로 찾아 든 병실에서 매형님은 ‘어쩜 널 잘 못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누나의 걱정과는 달리 단박에 날 알아보셨다.
여든다섯 살이란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신 매형님은 치매만 아니면 곱상한 노인 이였다. 내가 인사를 올리자 매형님은 눈물을 참느라 한참을 외면 하셨다.
섧고 분해설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말짱한데 치매란 몹쓸 병으로 가족(누나)과 떨어져 병원에서 연금생활을 해야만 하는 서글픔이 와락 치솟는 원통함을 삭히느라 그러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부 잘하고, 잘 생겼다고 주위사람에게 내 자랑을 어지간히 하시던 매형님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공책(당시엔 노트가 흔하질 안했다)을 다섯 권이나 사갖고 와 선물해 주셨는데 그때의 내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매형님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간병인의 감호 속에서 외로움을 씹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니 죽음을 향한 부질없는 시간 붙잡기란 구차한 목숨연장을 하고 있는 거였다.
병실엔 여섯 분이 계셨다. 매형님과 비슷한 연배였다.
내 보기에 안쓰러운 것은 할 일 없이 시간 붙들며 죽음을 향해 시간을 죽이는 생활이란 점이였다.
죽는 날까지 어떻게 시간을 죽여야 할까? 를 난 생각해 보았지만 뭔가 취미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외 별 대안이 떠오르질 안했다.
저분들은 침대에 누워서 뭘 생각하시는 걸까? 저분들이 곧 나 일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시력이 나빠 글을 못 읽는다는 매형님을 나라고 한다면 나 또한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후엔 아니, 내일이라도 내가 저 침대에서 시간 붙들고, 시간 죽이기란 불가해한 식물인간이 되지 말란 법은 없는 것 아닌가?하고 오버랩 해봤다.
늙는 다는 건 가장 슬픈 일이고 보다 더 슬픈 건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몸이다.
매형님께 작별인사를 올렸다. 침대에서 내려오시다 손을 흔들곤 그만 외면하신다.
다시 눈자위가 붉어진가 싶었는데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으셨다. 간병인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신 배웅해줬다.
휴게실에 들러 환자들을 일별했다. 모두 티브이에 정신을 뺏기고 있었는데 어느 할머닌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바로 그거란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해내고 있다는 그 성취감으로 시간 죽이기는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죽음을 향한 여행이 아닌 결과를 얻기 마련인 시간여행일 테다.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생활은 취미를 살리는 시간여행이 아니겠는가!
2012.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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