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블루접시에 그린 그리움
폴란드바르샤바에 살 때 옆집에 눈매가 예쁘고 나이 든 여의사가 살았는데, 울 꼬맹이아들에게 쿠키나 초콜릿을 가끔 줘 고마운 맘만 지니고 살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잡채가 먹고 싶다고 해 당면대신 중국소면으로 잡채를 만들었다. 꼬맹이가 대뜸 여의사께도 주자고해서 망설이다 아들 편에 한 접시를 드렸었다. 한참 후, 내가 감기로 앓던 어느 날 여의사는 허브차를 끓여와주면서 지난 번 잡채를 잘 먹었노라고 요리법을 물었다.
함박눈이 쏟아져 발이 푹푹 빠지던 날, 여의사는 집으로 찾아와 뜬금없는 편지 한 통을 내밀며 번역해 달랬는데 놀랍게도 북한에서 온 편지였다.
“친애하는 큰어머님께”라는 글로 시작한 편지의 ‘큰어머님’은 여의사였고, 편질 보낸 사람은 여의사의 첫사랑 딸이었다. 학창시절 여의사는 바르샤바공대로 유학 온 북한청년과 열애에 빠졌지만 청년이 갑자기 소환되면서 생이별을 해야 했다.
소식 없던 청년의 주소를 알아내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편지가 제대로 전달될지도 몰라 짧은 안부만 물었다. 석 달 뒤에 온 답장엔 청년은 이미 결혼했으니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허탈감은 사랑하는 청년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감사함으로 치유되는 거였다. 새를 좋아했던 옛 애인을 생각하며 새를 키우고, 북한에 의약품이 부족하단 소식에 애인가족을 위해 의약품을 보냈다. 글면서 어젠가 만나기를 바라는 희망을 버리질 못한 채 긴 세월을 살아왔었다. 버릴 수 없는 실날 같은 희망이 그나마 삶의 의욕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큰어머님께서 수십 년 동안 보내주신 약과 생필품은 요긴하게 썼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와 큰어머님이 재회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편지를 읽어주자 여의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이 먹먹했다. 평생 한 사람만 그리며 살아온 여인의 애틋한 심장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생이별 후 돌아오지 못한 청년도, 아빠의 옛 애인을 큰어머님이라 부르며 재회를 기원하는 딸도 애처로웠다.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 일인가.
다음 날, 여의사가 코발트블루접시에 잡채를 담아왔다. 예쁜 남청색폴란드접시도 선물했다. 그 접시에는 푸른 눈이 슬펐던 여의사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던 젊은 청년과, 아빠가 옛 애인과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이름 모를 여인이 담겨 있었다.
<폴란드접시>을 읽은 나는 눈 대신 겨울가랑비 흩뿌리는 ’17년크리스마스이브 창가에서 코발트블루접시를 그려본다. 그 예쁜 남청색폴란드접시에서 두 연인과 한 여인을 떠 올려본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삶은 행복이리니!
2017. 12. 24
# 위 글은 서울`동작에 사는 이현심의<폴란드접시>를 요약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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