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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아

아홉살 소녀의 '중요한 것'

아홉살 소녀의 '중요한 것'

 

 

엊그제 겨울방학을 맞은 은이를 데리고 아내와 나는 아파트 앞 찜질방에 갔었다. 욕탕, 찜질방, 휴게실을 번갈아 들락거리다 7(오후)에 프런트로비에서 만나 귀가하자고 약속했다. 7시를 좀 넘겨 나온 나는 프런트로비 의자에서 아내와 은일 기다린다. 어쩐 일인지 은이가 다소 뾰루퉁한 표정인 채 반시간을 넘겨 여탕에서 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며 아내가 은일 보며 웃기는(?)얘기를 하기 전까진 난 무시했다. 아내 왈, 은이가 아까 옷보관함 문이 안 열려 중요한 것을 잃는 줄 알고 울고불고 한바탕 소동을 피웠단다. 좀 기다리면 된다고 안심시키려도 아홉살짜리 은인 훌쩍대며 줄곧 중요한 것을 되씹자, 아낸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어도 막무가내였단 거다.

 

 

목욕탕주인아주머니가 하다못해 망치로 문을 부셔 옷장을 열기까지 중요한 것에 대한 비밀을 모르던 아내와 구경꾼들은, 은이가 분홍색패딩코트를 꺼내 안고 울음을 그쳐서야 궁금증이 웃음으로 치환되는 소동이 마무리됐단다.  은이의 중요한 것은 거위털패딩 이였고, 그 패딩을 오늘 처음 입고나오자마자 목욕탕옷장에 뺏겨야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패딩은 방학 전 베이징에서 은이엄마가 인터넷구매한 거였다. 겨울방학에 서울서 입을 요량으로 미리 주문한 건데 한참 커가는 때라 치수를 넉넉한 걸로 주문했다고 했었다. 글고 막내(은이엄마)는 아내한테 전화로 택배포장 뜯지 말라고 당부도 했었다. 패딩치수가 큰 탓에 혹시 할머니 것으로 착각하고 입어볼까 싶다고 은이는 기필코 전화당부 하라고도 했단다.

 

 

그 패딩을 얼마나 입고 싶었던지 도착하자마자 코앞의 목욕탕가면서 입었는데 다시 꺼낼수 없어 속상하고 황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금년겨울 롱`패딩은 젊은이들의 필수품(?)처럼 인기폭발이라서 베이징에 사는 아홉살짜리 은이도 로망의 옷이 된 셈이다. 그맘 때 갖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오매불망하던 물건을 드뎌 소유했을 때의 감격과 흥분은 어른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겠다.

 

 

은이의 패딩넌센스를 목도하며 문득 꼬맹이 때의 나의 애틋한 추억 하나가 생각났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다. 설날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께선 흰 운동화 한 컬레를 사오셨다. 설날아침에 신을 신발이라 방 윗목에 모셔(?)놓곤, 꺼내보면서 설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던 설렘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땐 검정고무신이 귀해 떨어지면 기워 누더기신발 되도록 신고 다녔고, 어른들은 짚새기신발과 나막신도 신었던 시절이라 운동화와 비장화[雨靴]는 꿈의 신발인 셈이었다.

운동화를 신고 친구들 앞에선 얼마나 뻐기며, 은근한 자랑으로 뽐내며 뿌듯해했던지 그때의 감정은 지금도 새록새록 공감할 수 있다.

 

 

비오는 날이나 눈 온 날에 운동화를 신고 걸으면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고, 그래 또래사이에서는 누구발자국인줄 알아맞출 만큼 귀한 신발 이였던 것이다. 그 운동화밑창이 닳을까봐 조바심 떨었던 마음이 은이의 패딩에 대한 애착이고 중요한 것일 터이다.

 

 

어린이나 어른의 절실한 소망은 한맘일 테다. 물질의 풍요와 세월의 더께가 순수성을 휘발시켜 온도차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더라도 소망의 극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소유의 행복감을 우리는 일상에서 조심스럽게 키워내야 한다. 너무 쉽게 이뤄지는 소유의 만족감은 싱겁기 마련이고 자연 추억으로 오래가지도 않아서다.

 

 

애타게 이뤄진 결과의 뿌듯함이 행복의 질을 높이고 향기 나는 추억으로 오래 남는 것이다. 은이엄마는 베이징선 이만한 물건을 사기 어렵다고 쥐색패딩 한 벌을 더 구입했다. 은이한테 쥐색패딩은 분홍패딩만큼의 중요한 것’으로의 애착심도 떨어질 것 같아 우리내왼 말렸지만 말이다.

 

 

요즘 신세대부모들은 물자 귀한 줄을 모르고 산다. 더는 자식에게 쏟는 선물이 값비싼 게 장땡인걸로 인식될까 싶어 언짢. 우리가 사용할 모든 물자들은 귀하게 얻어져야 애착심이 더하고, 그래서 아껴 쓸 줄 아는 지혜를 생활화해야 한다. 은이애미의 쇼핑패턴이 설마 은이에게 답습되지 않기를 우리부부는 염원했다.

 

 

근디 퇴근함서 둘째가 코오롱등산화 한 컬레를 내게 선물했다. 며칠 전 안산눈길을 같이 걸을 때 내 등산화가 닳은 걸 본 터였다. 사실은 내가 상경함서 미처 준비를 안 해서지 익산집엔 아직 쓸 만한 게 있는데 말이다.

‘2017.12된 최신고가품 릿지화인데도 내 어렸을 때의 운동화선물만한 기쁨도 흥분도 없음은 나이 탓일까?

 

 

선물 받는 건 기쁘다.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이 가벼우면 받는 사람의 행복감도 옹골차다.

둘째야, 은이처럼 중요한 것으로 마음에 새겨 아끼면서 잘 신으마.  글고 오늘 은이의 해프닝도 나만큼 어른이 될때까지 이쁜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길 바래본다.

애들아, 고맙다.

2017. 12. 20

 

위 풍경사진들은 눈 덮인 안산자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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