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밤에 깃든 청상과부의 애환

완행열차(무궁화호)는 시간을 뚫고 가을 속으로 달려가나 싶었다. 회색빛도회를 벗어난 열차는 부신 가을햇살을 차창이 터져라 품는가 싶더니, 누런색을 덧칠하고 있는 산야를 파노라마 시킨다. 아직 초록누리속의 마을이 붉게 물든 감을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가 가을을 낚는 풍정은 노스탤지어의 깃발 같다.

 

이젠 어느 숲길을 걸어도 배어든 가을이 얼마나 깊어졌는 질 체감하게 된다. 상수리나무가 알토란열매를 토해내고, 밤나무아래선 알밤 줍느라 곱사등하길 마다않는 가을에 얼굴 파묻는 정취에 빠져든다. 엊그제 정읍누나댁에서 하룻밤을 샌 울 부부는, 아침 일찍 산보삼아 뒷동산엘 오르다 밤나무 밑에서 보물찾기하느라 곱사등부부가 됐다.

알밤이나 상수릴 줍는 재미는 식감보다 짭짤하고 스릴 넘친다. 수풀 속에 숨어든 놈들을 발견하거나 아니면 풀숲을 헤치며 보물 찾듯 한 알씩 줍는 맛과 멋은 선정(禪定)에 비견할 만할 것이다. 윤기 자르르한 적황색알밤은 볼수록 신기하다. 무시무시한 고슴도치갑옷을 걸쳤던 사연하며, 그것도 모자라 단단한 껍질로 싼 절박한 이유가 뭐였을까?

애시당초 꽃 피울 때 짙은 남성페르몬을 뿜어내어 여인들 맘 싱숭생숭케 하는 태생적 비밀 또한 아리송해서다바늘침외투 속에서 갑옷을 입고, 다시 엷은 속옷을 걸친 알밤은 수수깨끼과정만큼 맛과 약용이 함축됐다. 고소한 맛과 영양소는 군것질의 으뜸이지만, 특히 사람신장과 하체를 튼실하게 하는 약효가 있어 옛부터 귀한 열매였다.

허약하여 평생 잔병치례에 골몰했던 약골의 영조대왕이 장수할 수 있었던 건 삶은 밤을 상용한 효험일거라고 조선왕조실록이 글로 말한다. 승정원일기(영조91112)에서 약방제조사 의관,송인명은 잘 익은 밤은 신장과 다리를 튼실하게 만든다고 영조께 상식(常食)하기를 간청한다.     의관들의 영조께 올린 밤 처방에, 한 여인이 25년간 알밤을 만지작거리며 슬픔과 그리움을 삭혔던 애뜻한 일생이 녹아있다.

영조에겐 아홉 살 된 효장세자(孝章世子)()이 있었는데, 1727(영조 3) 8월에 12세의 조문명의 딸을 왕세자빈(현빈)으로 정해 29일에 혼례를 치렀다.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한 현빈은 시아버지,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듬해 세자가 급서하자 소녀청상이 된다. 구중궁궐에서 청상과부현빈의 일과는 시아버지께 밤 삶아 올리는 일이였다.

밤 삶는 일은 영조의 건강을 위한 효행이자 망부,효장세자를 잊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니 반질반질한 알밤을 만지는 스킨십은 여인으로 성장하는 현빈에게 세자와의 사랑의 대역였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 현빈이 38세에 요절하면서 애정을 대신(?)한 알밤과의 한 많은 스킨십도 마감케 된다.

 

영조가 친히 현빈의 빈소에 들었을 때 처소 소반에 담아놓은 삶은 밤을 목도한다. 몸이 아파서 미처 밤을 바치지 못했던 죽기 전의 현빈의 효심에 영조는 애달프고 서른 아픔을 삼키며 감루했다.

, 슬프다. 무신년에 피눈물로 효장의 행록을 지었는데, 이제 이 효부의 행록을 또 다시 눈물로 쓰려니 억장이 무너지는구나. ----임신년 정월 11일에 시호를 효순(孝純)으로 내렸다. 불쌍한 나의 효부여! 걸맞는 시호를 얻었도다."

" ----먼저였을 늙은 내가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이 참담함 어떠하랴. 서럽고 아픈 마음을 어찌하나. 오열하며 피눈물로 행장을 쓰노라니 밤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깊으냐. 오호통재라!” 라고 쓴 행장기를 승정원일기는 전하고 있다.

열세 살에 남편을 사별한 현빈이 25년간 알밤을 만지며 세월을 삭힌 건, 효장세자에 대한 애증이 녹녹했을 거란 상상을 해본다. 소꿉장부부합방이나 했을까 싶은 현빈이 영조께 후손을 잇지 못한 불효를 자책하는 맘 또한 아리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딸수 있었을 터~.

밤은 코피와 알레르기비염에 유용하며 구운밤의 떫은 속껍질은 약한 어린이의 강장에 좋다고 한다. 아내와 난 주운 알밤을 비닐봉지에 넣으면서 추석차례상에 올리자며 으쓱해 웃었다. 마을의 담벼락을 월담한 채 늘어진 홍시도 식욕을 일깨운다. 참 좋은 세상에 좋은 계절이다. 싱그럽고 감칠맛 돋는 과일이 넘쳐 길바닥에 떨어져도 줍는 이 없는 인심이다

추석이 며칠 후다. 왼팔깁스로 운전할 수 없는 나는 느긋하게 가을여행맛에 빠져보자며 다시 서울행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팔순의 누님이 동구까지 나와 굽은 허릴펴며 나더러 건강챙기라, 고 당부한다. 늙은누님은 영락없는 어머니모습이다. 어머님을 보고싶음 누님을 뵈러오면 된다. 바람 한 끝이 누님의 백발을 흩날리고 파란하늘은 솜털구름을 붙잡고 있다.              2017. 0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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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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