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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봄 캐는 컬러테라피

봄 캐는 컬러테라피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쩠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에 들어간다

주먹 같은 고사리요, 향기로운 곰취로다

빗깔 좋은 고비나물 맛 좋은 어아리다

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 순 연한 것을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 한 쌈 입에 넣고 국 한 번 마신다

입 안의 맑은 향기 마시기가아깝다" 

<전원사시가>중 '봄' 

 

초록빛을 띄기 시작한 연둣빛이파리들이 5월의 햇살에 눈 부시다. 창을 밀치고 들어선 봄바람은 내 맘을 싱숭생숭 달뜨게 한다. 초록숲에 들어서면 오늘은 어떤 놈이 해맑은 미소로 나를 붙들까? 봄은 그렇게 나를 한시도 책상머리에 가만 놔두질 않는다. 봄빛을 머금은 연초록산야는 치유의 공간이다. 싱그런 이파릴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화되는 색깔의 마법 - 컬러테라피를 맘껏 음미한다. 산 좋아하는 나에게 봄바람은 연애짓 꼬드김이라.

옥산호를 찾았다. 파아란 하늘을 담은 호수가 수변길 초목들사이로 빛의 너울을 밀쳐내고, 버드나무들은 잔잔한 너울을 낚아 올리느라 휘고 굽은 곱사등 그림이 그리 평화로울 수가 없다. 물안개 속의 왕버들을 뺀 주산지 저수지는 째비가 안된다 할 것이다. 장장15km의 옥산호 수변길엔 온갖 수풀들이 장기자랑이라도 할 참인지 별스럽게 꽃망울을 떠트린다. 꽃의 향연! 계절의 여왕이 섬섬옥수 빚은 판타지 별천지다.     

옥산호를 휘도는 꼬불꼬불수변길이 발바닥에 전하는 리듬과 울창한 수풀이 뿜어내는 신선한 향기는 사계절 내내인데 이 맘때가 내 솜털까지 일으켜세우나 싶다. 게다가 호수를 애무한 미풍이 얼굴을 스치기라도 하면 깨 홀라당 벗고 가슴팍 확 열어재키고 싶다. 말초신경을 고추세운 게 아카시아꽃향일까. 향기를 타고 호수여행을 떠나는 꽃술이파리는 노린재나무홀씨들일까? 푸르디 푸른 신생의 컬러테라피에 빠져든다. 

수초가 카페트처럼 깔린 후미진호수가로 내려섰다. 난 좀 별스러 산행 중에도 꾸끔스런데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오늘도 역시다. 근디 거기 잡풀 사이에 돌미나리가 듬성듬성 끼어있다. 아내의 돌미나리나물 감칠맛이 침샘을 돋운다. 여기가 수몰 전에 다락논 끝머리쯤 될 성싶다. 풀을 헤치고 미나리 채취에 올인한다. 지금 집엔 아내가 없단 사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군것질 싸온 비닐봉지에 빵빵이 채웠다. 

이참에 아까는 지나쳤던 고사리도 보이면 채취하기로 했다. 이젠 눈길이 호수를 향하는 게 아니라 산쪽을 아니, 수변길이 아니라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수종개량 탓에 민둥산이 됐을까? 고사리가 주먹을 쥐고 위협한다. 놈의 공갈시위를 외면할 내가 아니다. 놈은 잘 못 생각 한거다. 차라리 숨었어야 했다. 간간히 취나물도 햇볕에 연초록일광욕을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드룹나무도 대여섯 놈이 나타났다. 이미 새 순은 누가 싹뚝 했다. 모두들 재수 옴 탄 신세가 됐다. 닥치는대로 따서 비닐봉지에 집어넣으니~?

봄을 캔다고 했다. 옛날엔 봄나물 채취를 그렇게 불렀다. 왕의 일상을 기록한 일성록(日省錄)에서 정조는 심한 흉년이 들자 어명을 내린다. "기민(飢民 굶주린 백성)들이 푸성귀로 연명하고 있으니 봄나물이 나오면 소금과 간장이 더욱 긴요할 것이다. 많이 만들어 넉넉하게 나눠줘서 흉년의 양식으로 도움되게 하라." 봄나물은 양식이자 허기를 보완하는 보약이였다. 궁중에서도 첫 봄나물을 종묘에 바쳐 선조들게 예를 올렸다. 

귀가하여 봄을 캔 푸성귀들을 손질하여 끓는 물에 살짝 데쳤다. 이맘때쯤 늘 하던 아내(외국 딸집에 간지 한 참 됐다)의 봄나물손질을 봐왔던 터고 인터넷상의 레시피를 따라하니 어설펐지만 큰 실수 없이 해낼 수가 있었다. 데친 고사리는 해볕에 말리면 되고, 드룹과 취나물, 돌미나리는 물기를 빼고 양념장에 버무려 무치면 됐다.  양념장 만들기가 각각의 재료를 얼마큼씩 배합하는냐?가 고민이기는 했다. 글고 나물맛도 아내의 손맛은 아니었지만 내 손맛을 시험하는 뿌듯감도 챙겨봤다. 

아내 없는 홀애비생활을 한 달째 하고 있다. 반찬 한 번 만들어 보지도, 세탁기도 쓸줄을 몰랐던지라 걱정은 됐지만 이젠 아내 없는 해방구의 솔로맛이 솔깃함도 즐긴다. 아내가 장기외출 할라치면 내게 하는 말 "자기 혼자 살아보면 알게 된다"고 입버릇처럼 겁 주곤 했었다. 아내 없는 생활을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터라 아내의 공갈(?)이 먹혀들 만했다. 근디 막상 맞딱드리고 보니 그렇게 겁 먹을 것만은 아니단 생각이 든다. 

부부도 몇 십년을 살다보면 관습이란 타성과 어떤 의무감으로 버티고 있다는 자조감에 젓을 때도 있다. '늙으면 남자는 아내에게 다소곳해야 따신 밥 얻어 먹는다'는 말이 금언처럼 회자되기도 하고, 내 아내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난 애써 콧방귀 뀌곤 한다. 한 달여를 싱글로 살면서 내 콧방귀가 기 죽기 싫어서 만은 아닌거란 걸 아내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아직은 잘 견디고, 아니 즐기는 일상이 돼 가고 이어서다. 없는 것 보다는 아내가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좋단 건 진정이란 것도 같이~!   

드릅과 미나리나물에 저녁을 들면서 뜬금없이 복분자술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복분자라고 딱질 붙인 까만액체의 패트병이 떠 올랐다. 고향 친구가 손수 빚은 거다. 꺼내 한 잔을 따랐다. 달시금떫떨한 맛과 향이 입안 가득하다. 술을 안 먹는 나는 혼자 아님 여럿이 먹는 술맛이 다르단 말은 이해가 안된다. 문득 백일섭의 졸혼생활이 생각났다. 부부도 때론 별채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행복을 다붙잡는 방편일 것 같아 백일섭의 졸혼이 공감됐었다. 망각했던 자신을 추스려보는 시간이어서다.

부부생활엔 철저하게 예의가 지켜저야 한다. 가까울수록 친근감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 씀 - 공경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예의 있는 부부에겐 어떤 막장도 발 붙일 수 없다. 공경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함부로 할 순 없는 것이다. 근디 나는 때론 아내를 은근히 깔볼 때가 있다. 지식 한 토막이 지성이 아니란 걸 알고, 나도 무지 한 게 태반이란 걸 알면서도 화가 나면 상대의 못난 점과 단점만을 물고 늘어진다. 욱 하는 성질 탓이다. 애주가인 아내가 앞에 마주한 채 한 잔 같이 하면 좋겠다. 같이 봄을 캤어야 하는디~! 

오묘한 연둣빛의 향연도 곧 무대에서 사라진다. 봄날은 그렇게 속절없이 여름을 부르고 나무는 나이테를 하나 더 새긴다. 나의 나이테도 더 굵어지리라. 내 연둣빛이파리를 싹 틔운지는 벌써 오래 전 일이지만 신생이파리를 보며 컬러테라피길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행복하다. 시름없이 명년 이맘때를 기다린다는 부질 없음도 행운이다. 명년엔 예의 우리부부 봄 캐러 나설 것이다. 글고 캔 봄을 나는 손수 요리 할 것이다. 오늘처럼~!

2017. 05. 18

아카시아, 때죽나무꽃이 눈처럼 깔린 산길 

노린재나무꽃

옥산호수 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