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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아름다운 순례길– 나바위성지

이름다운 순례길 나바위성지

 

18451012일 해질녘에 군산포구에 들은 목선 한척은 금강을 거슬러 올라 땅거미 스멀스멀 내린 밤8시쯤 강경입구 나바위화산에 닻을 내린다. 배엔 11명의 장정과 2명의 서양인이 타고 있었다. 831일 상해를 출발한 그들은 악천후로 꼬박 한달 열사흘동안 바다와 사투를 벌이다가 구사일생한 거였다.

나바위성당 전경

작고 아름다운 바위동산[華山]위에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 나바위라고도 했다. 금강지류에 발담구고 있는 나바위에서 송림사이로 조망하는 넓은 들녘은 가슴이 확 트일 만큼 시원하다. 이른바 축복받은 땅이다. 그래서 지척간인 강경황산에 스승 김장집따라 팔괘정을 짖고 후학을 가르치던 우암선생이 절경나바위에 華山(화산)이란 글자를 새겼을 것이다.

그 기린 땅에 김대건신부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뫼시고 구사일생으로 첫발을 내딛으며 이 땅에 천주교를 발아시켰으니 천우신조 성지랄까1784년 한국에 최초교회가 세워지며 들어온 첫 신부였던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6년 만인 1801년에 순교한다.

주문모신부가 순교한 후 중간에 프랑스신부 세 명이 입국했으나 그나마 1839년에 모두 운명했었다. 하여 33년간 목자 없는 교회에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품계를 받고 서양인 두 신부를 뫼시고 나바위에 기착했던 것이다.

김대건신부를 기억할 소나무

김대건신부일행이 닻을 내린 강기슭엔 적송 한 그루가 마을을 향해 45°로 기우러진 채 형형하다. 김신부일행이 거기에 발 디뎠을 때 지켜봤을 어린 소나무는 지금은 온갖 풍상을 품은 노송이 되어 촌락을 향한 채 팔을 벌려 안으려 한다. 흡사 요절한 김신부가 세상을 어루만지려는 손길 같단 생각을 하게 한다.

김대건신부입상

15세의 김신부는 183612월에 마카오로 떠나 6월에 도착, 사제수련 하여 1844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의주변문을 통해 잠시 귀국했다. 선교사들을 뫼시고 올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18454월 목선(라파엘호)을 구입하고 11명의 교우들을 포섭하여 중국에 다시 들어간 김신부는 817일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는다.

상해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김신부는  31일 서양신부 두 명을 뫼시고 귀국항해에 올랐었던 것이다. ‘나바위에 첫 발을 디뎠던 페레올주교는 후에 하느님의 섭리라 기록했다. 난 그 하느님의 섭리로 은혜의 땅이 된 나바위성지 탐방을 오늘에야 나섰다. 지척간인데도 말이다.

몇 계단을 올라서면 고딕식종탑을 앞세운 적벽돌조 성당이 단정 푸근하게 넓은 마당을 내준다. 벤치에 앉아 맘을 추스르고 성당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아무도 없다. 창을 투사한 3월의 햇살이 성당안을 기웃대며 높고 너른 법당을 그지없이 따사롭게 느끼게 한다.

상당안의 남녀석을 구분한 중앙열주

좌대 한가운데를 열주한 기둥들은 좌우로 남녀석을 구분 짖기 위한 거다. 성당제대의 세례대와 성상들은 중국남경 성 라자로수도원에서 제작, 성당건축 때 안치한 거란다. 우측 작은 제대 감실 안에 다블뤼신부와 김대건신부의 유해(목뼈)가 모셔져 있다 해서 유심히 봤다.

중앙제단

무신론자인 내가 성당안을 기웃거려 본 것도 첨인데다 교리마저 무식쟁이라 그저 경외심을 지닌 채 일별할 뿐이다. 성당 뒤 나바위로 오르는 계단입구에 김대건신부입상이 있다. 송림사이로 스치는 성당의 지붕선과 첨탑종루가 한 폭의 그림이다.

김대건신부와 다블뤼신부의 유해가 안치 된 제단

나바위정상의 단출한 망금정(望錦亭)이 초연하다. 당시엔 금강줄기가 확 트인 들판에 핏줄로 뻗어있어 생동하는 자연의 무한이 평정심에 이르게 할 것 이었다. 망금정은 드망즈대구교구장이 매년 초여름에 이곳으로 피정을 왔는데 1912년 베르모렐신부가 드망즈주교를 위해 지은 피망정이란다.

망금정

간지러운 3월바람을 안으며 잠깐 엉덩일 걸쳤다. 여름엔 참으로 멋진 피서처일 게다. 금강물길을 달려온 강바람이 은하별빛을 싣고 솔바람으로 차환하며 얼굴을 스치는 한 여름밤의 풍정을 상상해 봤다. 대구에서 여기까지 6월이면 어김없이 행장을 꾸렸던 벽안의 사나이 드망즈주교는 참으로 멋 넘치는 풍각쟁이였지 싶다.

김대건신부 순교비

망금정 옆구리에 김신부순교기념비가 있다. 1956년에세운 기념비는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만든 거란다. 망금정을 떠 받들고 있는 나바위뒤엔 마애삼존불상이 있다. 북풍받이여선지 심히 마모 돼 분간키 어렵다. 옛날 금강을 내왕하는 뱃사공들의 안녕을 위한 기도처로 불상을 음각하고 치성들였을 터다. 신성한 성지다.

마애불상을 휘돌면 히폴리토신부의 묘와 골고다의 언덕을 연상케 하는 십자가를 맨 예수가 처형장을 오르는 언덕빼기로 이어진다. 그 고행의 언덕빼기에서 화산을 한 바퀴 휘도는 십자길엔 화강석에 음각한 성화가 군데군데 자리한다. 성화조각품을 감상하는 산책길이라.

성도들이라면 그 성화를 새기며 어떤 기운을 충전하는 고독한 산보자가 될 수도 있지 싶었다. 나바위성지는 나를 돌아보고 구원에 이르려는 자들한테 참으로 옹골찬 산책길이 아닐까 싶었다. 김대건신부일행이 닻 내린 강뚝을 따르면 그날의 풍정을 기억하고 있을 소나무 한 그루가 허릴 구부린 채 우릴 맞는다.

하느님은 이 세상 누구라도 굽어 사랑으로 보살피듯이 말이다. 근데 무신론자인 내가 늘 불만인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2천여 년 동안 악의 무리들을 왜 더 늘리시느냐?는 거다. 글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편 갈라 지구상의 전쟁은 도맡아 야기시키느냐?는 거다.

십자가의 언덕

종교란 이름으로 탄압받고 희생된 헬 수없는 인명은 그 어떤 죽음보다 더 많았지 싶은 게다그런 개 같은(?) 생각을 히며 성당본관 앞에 다시 섰다. 1906년에 베르모텔신부가 착공하여 1년여 걸린 성당은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신부의 작품이란다. 스테인그라스 창이 아닌 한지그림 바른 창이라 더 정감이 갔다.

성당건물

중국인 목공들이 한옥양식을 절충한 성당은 애초엔 흙벽이었단다. 성당외부 아취형회랑이 멋스럽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318호이기도 한 성당이 가까이 있어 좋다. 발길 텄으니 갈 데가 없음 여길 찾아와야겠다. 그럴 땐 본당보다는 나바위 뒤 45°로 기운 소나무를 찾아가리라. 그만이 김대건신부를 기억할 수가 있지 싶기도 해서다.

십자가의 길에 십자바위

김신부는 여기에 첫 발 디딘지 1년 만에 순교한다. 조국은 그를 내친 거였다. 아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그의 주검을 성인으로 승화해 써 먹기 위해서 방관했을까? 하느님은 진정 있기는 할까?  피정마당가에 파란하늘로 솟은 삼나무 끝에 간당간당한 까치집이 하느님에 젤 가까운 안식처일 것 같다.

2017. 03. 19

성당종루

회랑

 

 

마애삼존불

 

2대신부 히폴리토의 묘

평화십자길은 화산을 한바퀴 돈다

김신부의 증인-기우러진 소나무

금강지류

중앙 안내판지점이 김신부의 기착점

피정

김대건신부초상

우암의 팔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