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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강경화외교부장관과 민회빈 강씨

 강경화외교부장관과 민회빈 강씨

지난19일은 우여곡절 끝에 강경화씨가 문재인대통령으로부터 외교부장관임명장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외교부수장이자 비 고시출신이어선지 6급 이하 외교부직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단다. 강장관은 UN에서 고위직책을 오랫동안 수행한 국제통이어서 기대되는 바가 크고, 그녀의 성공은 유리천정을 깨부수는 쾌거일터여서 여성들의 로망이기도 하리라.

()장관을 지켜보면서 성씨가 다르긴 하지만 400년 전에 청나라조야에서 활약한 여걸 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를 생각게 하는 건 문재인대통령과 인조의 안목과 용인술이라. 시대조류 탓할 수만은 없는 인조의 옹졸하고 협량한 권력욕이 금의환향한 강빈(姜嬪)에게 독배를 들게 했다는 비극이다.

민회빈 강씨는 소현세자의 비였다. 남한산성에서 청의 용골대 앞에 투항하러 나온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왕이 투항한 1637(인조 15), 강빈은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이 돼 28일 폐허의 땅 한양을 떠나 청나라심양으로 향했다.

인질로 붙잡혀가는 혹한의 북행길은 청나라병사들의 조선인포로사냥길이기도 했다. 포로는 곧 노예였고 그렇게 끌려간 수십만의 노예는 그들 부의 밑천이 됐기에 2개월 후인 410일에야 심양에 도착했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면 애먼 백성들만 죽어난다.

강빈은 내탕금으로 노예시장에서 백성들 한 명이라도 더 구해와 거처엔 500여명의 포로들이 공존하게 돼 재정이 빠듯해 졌다. 설상가상으로 조공을 강요하는 청의 노략질이 드세지자 강빈은 거처의 빈터에 농작물을 경작하여 자급자족하면서, 고국에서 생필품을 수입 청나라와 교역을 이루며 외교적인 돌파구개척에 성공하게 된다.

병약한 소현세자를 지극정성 보살 핀 강빈은 청나라조야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여장부가 됐던 거였다. 그런 강빈의 성공을 접한 인조는 불안했다. 청을 등에 업고 자신을 내칠까 두려워서다. 그 자신이 광해를 폐위시킨 반정으로 추대된 왕이란 콤플렉스를 어쩌질 못해 보위집착에 전전긍긍한 겁쟁이였다.

병자호란나기 십여 년 전인 1624년에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공주로 피신한 인조는 공산성에서 엿새 만에 난이 평정됐단 전갈을 받는다. 엿새동안 자기를 지켜본 고목 두 그루를 고맙다고 정3품의 벼슬을 내린 왕이였다. 그런 왕이 심양서 성공한 세자와 세자빈은 두려워 숙청할 핑계거리 만들기에 고민한 한심한 군주였다.

청나라는 감시하고 억류했던 소현세자를 자유스럽게 배려하였고, 1644(인조 22)3월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자 세자일행도 북경에서 서양과학자들과 접촉 서양문물에 식견을 넓힐 수가 있었다. 북경천도 기념으로 청은 1111일 소현세자의 영구귀국이 허락됐다. 강빈은 33세의 세자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218일 한양 땅을 밟았다.

8년간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던 세자는 새로운 왕국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세자가 북경서 서양인과학자 탕약망(湯若望 : Adam Schall)으로부터 받은 환대와 선물에 사의를 표하며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 이를 웅변한다.

제가 저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것을 궁중에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출판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장차 사막에서 박학의 전당으로 바꿔 놓은 은총의 보물로 찬양될 뿐 아니라 조선인이 서구과학을 완전히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 소현세자의 뒤엔 강빈의 절대적인 경제적후원으로 가능했다. 1641(인조 19)부터 강빈은 심양 인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장에서 3,319석의 곡식을 수확했다. 또한 조선에서 면포·종이·모피 등을 수입하여 청나라시장에 팔면서 특히 인삼과 한약재로 막대한 이득을 취하기도 했다. 강빈은 그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소현세자의 외교활동을 지원했고, 인신매매 되던 수많은 조선인 노예들을 사들여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유랑족인 청나라가 강빈의 농사와 무역에서 농경생활의 장점을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성공적인 행보는 불행하게도 세자가 장차 권좌를 찬탈할까? 하는 의심을 인조는 품었던 거다. 금의환향했던 소현세자는 갑작스레 병석에 누워 목숨을(독살됐단 기록도 있다)잃었고, 간신김자점과 후궁조귀인(趙貴人)의 모함으로 강빈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1647(인조 25)229, 인조는 강빈의 형제인 강문성과 강문명을 곤장을 쳐서 죽였다. 315일에는 드디어 강빈을 사가로 내쫓은 다음 사약을 내렸다. 당시 강빈이 탄 흑색 가마가 선인문을 나가자 남녀노소가 길거리에 모여들어 대성호곡을 하며 뒤따랐다.

425, 인조는 손자이기도 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켜 원손 이석철과 둘째 이석린은 1년도 안돼 병사하고 셋째 이석견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숙종 때 송시열과 김창집(金昌集)등 대신들이 강씨에 대한 세자빈신원상소를 올려 1718(숙종 44)에 이르러 강빈은 민회빈(愍懷嬪)으로 복위된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의 번영을 꿈꾸던 강빈은 천추의 한 맺힐 죽임을 당했다. 옹졸하고 의심 많은 부왕의 권력욕에 무참한 재물이 된 거였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소현세자`강빈부부가 순리대로 왕위에 등극했다면 조선은 일찍 개화의 꽃을 피었을 것이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봉건사회를 개혁했을 테고, 나아가선 일제의 36년강점이란 치욕을 면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는 현명한 군주의 용인술에 기인한다. 강빈의 조국사랑의 꿈과 기개가 강경화 장관한테서 화려하게 펼쳐지길 기원해 본다.

2017.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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