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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첫사랑을 향한 순애보 – 홍랑(洪娘)

첫사랑을 향한 순애보 홍랑(洪娘)

 

 

묏버들가지 가려 꺾어 보냅니다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 잎이 돋아나면 나인가 여기소서

 

함경도 홍원에서 태어난 홍랑은 어려서부터 미모와 시재가 뛰어났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환에 눕자 약을 구하러 꼬박 사흘을 걸어 80리 떨어진 곳의 명의를 찾아 나선 효녀였다12세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나귀에 홍랑을 태우고 그녀 집에 도착했으나 이미 어머니는 숨져 있었다. 홍랑은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석 달간을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했었다.
그런 홍랑의 지극효심에 감격한 의원은 자기집으로 데리고 가서 시문과 예의범절을 가르쳐 수양딸처럼 키웠다. 천부적인 시재를 다듬은 홍랑은 절세가인이 돼 귀향하여 어머니의 무덤을 돌보며 살다 삶의 방편으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 관기(官妓)가 되었다.


이때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던 고죽,최경창(孤竹,崔慶1539~1583)이 문과에 급제 후 함경북도 경성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1573(선조6)가을에 부임하여 주연을 열 때 자연스럽게 마주한 홍랑은 사랑에 눈뜬다. 아버지를 못 본 그녀는 글과 무예가 뛰어난 고죽의 준수한 외모에 부정까지 느껴 첫사랑의 불을 지피게 된다.

최경창이 오랑캐와 맞딱드린 변방막중(幕中)에 그녀를 동반하여 정염을 불태운 2년의 농밀한 사랑은 홍랑이 일생을 바친 '순애'의 전주곡이였다. 

-홍랑시비-

 

이듬해 봄에 고죽의 임기가 끝나 떠나게되자 홍랑은 함관령(咸關嶺)까지 천릿길을 따라나선다. 허나 국법인 '양계금(兩界의禁)’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양계의 금’이란  평안`함경도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 남하지 못하게 한 법으로 어기면 곧 죽음이었다. 까닭은 척박한 환경에다 오랑캐의 침입이 많아 방치할 경우 인구감소로 폐허가 되는 걸 막기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함관령에서 두 연인은 이별이란 슬픔을 감내해야 했다. 이때 꽃 수술 맺힌 산버들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격한 울음을 삼키면서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건네며 구슬픈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묏버들 갈혀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擇折楊柳寄千里)

   자시는 창밧괴  심거두고 보쇼셔 (人爲試向庭前種)

   밤비예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녀기쇼셔 (須知一夜生新葉)"

 

 

 

이별의 아픔은 홍랑에겐 단장의 슬픔 이였다. 고죽의 속 아림도 홍랑 못잖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초부터 시름시름 앓다 병석에 눕고 만다. 홍랑과의 이별이 너무 가슴아팠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그는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이 소식이 머나 먼 함경도에 있는 홍랑에까지 흘러들게 되었다.

 

가슴 찢어진 이별 후에 오매불망 연인을 생각하던 홍랑에게 고죽의 병환비보는 임을 찾는 여장을 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그녀는 하루가 여삼추라 바로 남장을 하고 한양을 향해 천 리 길을 나섰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밤낮으로 걸어 7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여 감격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지극정성 병간호에 고죽은 건강을 되찾는다.

1575(을해)년 이였다. 두 연인의 재회의 기쁨은 잠시동안 이내 사단이 나고 말았다. 고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아 양계의 금을 어긴 채 동거한다는 상소가 사헌부에 올라왔다

전적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몹시 사랑한 나머지 불시(不時)에 데리고 와서 버젓이 데리고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없는 것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라는 상소문이 조선왕조실록 선조 9(1576) 5월 사헌부에 기록됐다.

 

이때는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기간중에 관기가 근무지를 이탈하여 양계의 금령을 어겼다고 동인들의 탄핵은 드셌던 것이다. 서인인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죽은 침통하고 애절했던 당시 마음을 <송별(送別)>이란 시를 지어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다.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한양을 떠날 때 (玉頰雙啼出鳳城)

새벽 꾀꼬리 저렇게 우는 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 (曉鶯千爲離情)

비단옷에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 (羅衫寶馬河關外)

풀빛 아득한 가운데 홀로 가는 것을 전송하네 (草色送獨行)"

아래 유란(幽蘭)이란 시도 이때 홍랑을 위로하기 위해 눈물로 화답한 시다.

  
말없이 바라보며 그윽한 난초 그대에게 드리네 (相看脈脈贈幽蘭)

아득히 먼 길 이제 가면 어느 날에 돌아오리 (此去天涯幾日還)

함관령 옛날의 노래는 다시 부르지 마오 (莫唱咸關舊時曲)
지금도 궂은비 내려 푸른 산 아득하겠지 (至今雲雨暗靑山)"

 

 


세월은 흘러 1582년 봄 고죽은 특별히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허나 곧 북평사의 참소로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러가던 도중 객관(왕십리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다. 15833,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임과 이별한 후 사랑하는 임을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던 홍랑에게 찾아온 소식은 고죽의 부음이었다. 사자불가환생이라. 다시는 사랑하는 임을 만나지 못한다는 비통함에 그녀는 목을 놓아 울고 또 울었다.      허나 사랑하는 임의 주검 앞에서 마냥 그렇게 슬퍼할 수만도 없었다.

그녀는 곧장 객관을 찾아가 염을 돕고, 영구를 따라 임이 묻힐 경기도 파주까지 따라갔다. 장례 후엔 고죽의 무덤 앞에서 시묘에 들어갔다.

 

젊은 절세가인의 시묘살이가 어찌 쉬운 일이었겠나. 뭍 남성들 눈 밖에 나려고 몸을 씻고 단장하는 짓을 삼가고, 부러 얼굴에 자상(刺傷)을 내어 흉터를 만들었다. 또한 커다란 숯덩이를 통째로 삼켜서 벙어리가 되려고도 했다. 거지꼴의 미친년이 돼야 남성들의 눈길 피해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해낼 수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허나  3년이 지났어도 그녀는 묘소를 떠나질 않았다. 거기 임의 영혼 옆에서 죽고자 했. 그렇게 7년을 더 시묘하던 차 임진왜란(1592)이 터졌다. 그녀는 문득 생각 키는 게 있었다.

 

-고죽 영졍-

 

자신이 죽기 전에 고죽이 남긴 주옥같은 작품과 글씨들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서둘러 임의 묘역을 나와 고죽의 유품들을 챙겨서 함경도 고향으로 피신하였다. 7년간의 전쟁 속에서 귀중한 임의 유물들을 지켜냈던 신산하고 불안했던 고초의 7년은 시묘살이 못잖은 형극이었다. 이윽고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녀는 고죽의 유품들을 안고 해주최씨 문중을 찾아간다.

 

그렇게 17년을 지켜낸 고죽의 유작은 후에 <고죽집(孤竹集>이라는 문집으로 남아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으니 오직 홍랑의 임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결과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하단 걸 홍랑의 일생이 웅변한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 들여 장사를 지내고 최경창 부부가 합장된 묘소 바로 아래 무덤을 마련해 주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을리에 있는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는 묻혀 있는데, 기적의 여자를 문중에 올린다는 파격은 홍랑이 유일하다. 고죽의 주옥같은 시작(詩作)품들이 오늘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오로지 홍랑의 임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 땜이라.

홍랑은 첫사랑-고죽 최경창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일생을 바친 고결한 여인이었다.

충신불사이군이요, 열녀불경이부(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열녀'는 조강지처 적실에게만 해당되지 홍랑에겐 가당찮은 얘기나, 랑은 함경도 홍원 기생으로 '애절(愛節 : 사랑의 절개)'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해주최씨 후손들에 의해 족보에 등재되고 시제를 추앙받는다.

살아서는 천민기생이었으나 죽어서 양반이 된 여자는 홍랑이 유일하다.

 

-앞의 홍랑묘 뒤에 고죽묘-

 

그녀를 사랑의 노예(?)로 사로잡은 고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문신이자 시인이다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최만리 5대손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최수인 아들이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시와 글씨에 뛰어나 이이송익필이산해, 정철서익 등과 시를 `받는 등 8문장으로 일컬어졌고사후엔 왕명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청백리로 녹선됐다

오늘날 계산된 사랑으로 무분별하게 엔조이하는 연인들이 한 번쯤은 가슴에 품어볼 홍랑이 아닐까!

201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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