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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황태자를 향한 한의 여인 민갑완

영친왕약혼녀 민갑완의 한

 

-영친왕이 고국방문 후 일본으로 가기 위해 남대문역 프랫폼을 걷는 모습(1918.1.26)-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란 게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같은 기뻐할 날들일 경우가 많을 테지만, 천재지변도 아닌 전혀 예기치 못한 뜬금없는 불가항력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먹먹해져버린, 그래 평생동안 자신을 죽이며 난망 속에 살아야 하는, 불행의 날을 어쩔 수 없이 품고 살아간 여인도 있다.

 

한 여인에게 428일도 그런 날이다. 13살의 꿈 많은 앳된 소녀가 모든 걸 잃게 되리라곤, 평생을 음지에서 가슴후비며 단장의 월을 살아야할 거라곤 언감생심이었다.

더구나 소녀는 왕가의 이너서클태생으로 황태자의 약혼녀였기에 4월은 아니, 일생은 장미빛 봄날로만 이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열한 살 된 소녀가 황태자의 비로 간택될 때, 황태자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인연부터 천생배필이란 건 운명이라 여겼을 테다.

 

 

구중궁궐이, 세상이 다 소녀의 무지갯빛운명을 경축했다. 1907, 그 약혼이란 잔치가 한창일 때 황태자는 유학을 떠나야했다. 왕권을 쥐락펴락한 이토 히로부미의 절대 권력과 간교한 책략에 속수무책인 채 현해탄을 건너야했던 것이다. 황태자의 유학은 실상은 인질인 셈이었다

12월 5일, 황태자가  일본으로 떠날 때 황궁에서는 초간택한 소녀의 집에 급한 전갈이 왔다.

"시국이 혼란스러워서 예를 이루 지킬 수 없으니 그냥 택일하여 신물(信物)을 전달코저 하니 그리 알고 받으라"거였다.  순종의 보모였던 문상궁이 처녀의 집으로 가지고 온 신물은 반지였다.

 

-영친왕과 민갑완의 약혼 간택지-

 

금가락지 두 짝을 다홍실로 동심결(同心結)을 맺어 네모상 위에 먹글씨로 약혼지환이라고 써 있었다.  황실의 부모님과 동갑내기 약혼녀를 떠나 이국에서 머물기 삼년 차의 황태자는 일본여성과 강제약혼을 해야 했다.  

조선황실에 일본인의 피를 섞어 일본화 시키려는 음모의 책략이 빚은 1916년의 일이였다

황태자의 귀국만을 학수고대했던 소녀에게 날아온 소식은 황태자의 약혼식 이였고, 참으로 기가 막힌 건 소녀와의 약혼파약통보에 약혼반지 반환요구였다.

 

소녀는 이미 성숙한 스무 살의 처녀로 감당해야 할 청천날벼락이었기에 맘 아픔은 상상을 절한다.

하늘이, 세상이 온통 노오랗게 하 해지는 거였다.  스무살 된 처녀의 편엔 아무도 없나싶었다.

시아버지 될 국왕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일본의 강압에 황

제자릴 내놓았던 때의 약혼이었다.

새 황제인 이복시아주버니는 물론,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던 그렇게도 많았던 막강한 세도가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들 같았다. 아니 어쩜 모두가 이토 히로부미 편에서 거들먹거리고 있나 싶었다.

 

-외출중인 고종과 영친왕-

 

약혼반지를 내줘야 한다고-’ ‘황태자와의 파약을 운명으로여겨야한다고-’ 하는 우격다짐에 처녀는 절망했다.

하늘이 노랗다가 새까매졌다. 태양이 사라졌다.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이, 사유의 실타래가 풀어져 엉킨 채 멍멍해져 넋 빠져 버렸나 싶었다.

구중궁궐 깊은 암실에 숨어들어 어둠과 싸우며 꿈을 접는 가련한 처녀여야 했다.

온갖 꿈이 사라져버린 처녀에겐 죽는다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떻게 죽을지를 몰라 숨만 쉬고 있었을 터였다.

 

십년간 간직해 온 약혼반지를 강탈당하다시피 반환해야 했다이 불행으로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이어 6개월 후엔 아버지마저 통한의 세상을 하직했다.

모든 불행이 처녀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짐짓 죽어야하는 건 자신인데 죽질 못해 어두운 굴속 궁궐 방에서 산송장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깔도 없고 마음도 없는 세월은 무심하게  또 4년이 흘러갔다. 처녀가 스물세 살이 되던 봄, 1920428일이였다.

 

-민갑완-

 

지옥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한 줄기의 서광을 기대한 바 있었는데 거미줄만한 희망도 놓아야하는 날이 428일 이었다. 황태자가, 자신의 약혼자가 일본여성과 결혼한단다.

이제부터 숨 쉬어 무얼 할까? 이젠 누구도 관심마저 안 갖

는 여인이 돼가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곤 했다.

약혼자를 잃, 사랑을 뺏기며 심신이 망가져가는  불쌍한 자신이 이젠 세인들로부터 잊어지는 여인이 되는 슬픔에, 무력감보다는 황태자로부터 망각의 여인이 된다는 비통함에 자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고종의 장례식에 오는 이토 히로부미(1919.2.9)- 

 

428일은 처녀에게, 한 여인에게 있어 모든 걸 빼앗아 가버린 생죽음의 날이었다. 428일은 처녀가 이후 오십 년 가까일 살아갈 피멍 진 올가미 같은 죽음의 숫자였.

 

안보고 안 들으면 약이 되나, 듣고 보면 해가 된다드니, 오가는 사람마다 한두 마디씩 지껄이는 말들이 나에겐 가시와 같이 아팠다라고 여인은 그의 회고록<백년 한>에 토해냈다.

일본여자의 남자가 돼버린 황태자의 소식을 접하는 것도 형벌인데, 일본(총독부)과 권력끄나풀들은 처녀의 결혼을 줄기차게 종용하고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갈 처녀를 보는 세상의 눈초리는 일본의 간계와 폭거를 힐난할 것이 부담됐던 거였다.

 

-영친왕의 경성유치원 방문(1918.1.25)-

 

처녀는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스물일곱 살 되던 1923년 처녀는 절망의 궁궐암흑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허나 처녀의 중국여행을 허가해 줄 일본이 아니었다.

처녀의 해외여행은 강제파혼당한 사실이 국제적으로 알려질 게 두려워서 조건이란 꼼수를 달았다.

3개월간의 중국여행을 은밀하게 다녀오되 상당한 재산을 공탁,어기면 몰수한다는 거였다.

버거운 조건이였으나 포기할 수가 없었던 그녀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시흥의 전답을 공탁하고, 남몰래 어머니와 남동생을 동반하여 인천항에 도착했다.

 

정작 중국행 배를 탔을 땐 어머니는 동행하지 못했는데 이게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생각이나 했을 텐가?

가까스로 상하이에 정착한 처녀는 뭔가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인이 운영하던 암마시스쿨에 입학한다.

일본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처녀의 신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걸 꺼린 일본은 스파이를 파견하여 그녀를 감시하고 암마시스쿨에 온갖 훼방을 부려 자퇴하게 만들었다.

 

-영친왕귀국에 마중가는 고종-

 

일본의 감시 속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처녀의 생활은 동생의 자식들을 돌보는 것 뿐이였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22년간을 그렇게 철장 없는 감옥살일 하다 이듬해 쉰 살이 돼 귀국하여 그리운 집에 돌아온다. 허나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었다.

불우한 어린이들을 돌보며 장학 사업에 여생을 올인 하려하자 6.25사변이 나고, 나중엔 후두암에 걸려 19683월19일 오전 7시 한 많은 생애를 내려놓아야 했다.

향년 73세 였다.

 

 

 

-노년의 민갑완-

 

한 많은 여인, 비원의 처녀, 피멍진 꿈의 사춘기를 보내야했던 소녀의 이름은 민갑완이다.

그녀는 조선의 명문가인 여주민씨 가문의28대손 성균관총장을 역임한 민영돈의 딸이며, 일제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여주민씨 27대손)의 친족 이였다.

민갑완, 18971020일 태어난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했던 비운의 정혼녀였다. 그날 조선황실에서도 남아가 태어났으니 이름은 이은이다.

이은은 영친왕이란 작위를 받았으나 순종이 후사가 없자 이복동생으로써 황태자가 된 거였다.

 

민갑완과 이은은 태생에서 약혼에 이르는 하늘이 점지한 천생연분이라 했었다태생부터 시쳇말로 금수저였다. 그런 그들이 불행의 질곡에 빠진 건 당시의 금수저들이 저들만의 안일에 안주하려 한 탓이었다.

황실과 이너서클들의 각성 없는 금수저짓이 자손만대 영원히 금수저로 살아갈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황태자 이은은 행복남일지 모른다. 비록 강제로 정략결혼하며 인질삶을 살아야 했지만, 평생을 동부인하고 금수저로 살아가며 과분하게 민갑완이란 여인의 외골수 짝사랑까지 받으며 살았으니 말이다.

 

1963년 영친왕의 귀국소식을 접한 민갑완은

"그저 행복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와서 만나면 무엇하느냐. 어릴 때는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도 없다"라며 옛 정혼자와의 만남을 사양했다.

민갑완의 한은 누가 어루만져줄 수가 있을 텐가!? 권세가들이 국가란 이름하에 휘두른 폭정과 강압은 개인의 일생을 무참하개 짓밟아 버린다는 사실을 오늘날에도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민갑완-영친왕의 약혼녀,  그녀의 묘를 한 번 참배하고 싶다.

2016. 04. 28

 

-민갑완 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