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도인 춘성스님열반의 행적 찾아

                           (영장산봉국사 & 삼각산화계사)

 

 

-봉국사염화실-

 

엊그제 둘째마저 자카르타로 출장을 나간 통에 울 부부만의 설맞일 했다. 명절은 피붙이가 살 부대끼며 지지고 볶은 음식 나눠먹는 정감의 날이다. 근데 이런 단출한 명절 맞기도 첨이라 세월의 덧없음을 실감했다. 간단히 차례를 올리고 아낸 친정동생한테 난 봉국사(奉國寺)를 찾아 나섰다봉국사를 품은 영장산(靈長山)은 불곡산(佛谷山)과 분당신시가지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허파노릇 하는 사랑받는 산이다.

거기 봉국사엔 춘성(春城.1891~1977)선사의 부도비와 추모비가 있어 진즉부터 마음의 행로로 더듬던 곳이라 설날 길 찾아 나섰다.

 

 

-혜성 봉국사주지스님-

 

큰스님! 스님을 낳아 길러주신 세속의 어머님이 뵙고 싶지 않으셔?”

그럴 땐 부처님을 생각해라, 부처님을!”

아파계신 스님께서도 지금 화두가 성성하십니까?”

여시 여시(如是 如是).”

스님, 몸이 아픕니까? 마음이 아픕니까?”

뼈가 썩어든다, 이 자식아!”

언제쯤 이 세상을 떠나실 것 같습니까?”

당장이라도 옷 벗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그림자를 거두시며 웃으시겠어요? 울겠어요?”
시팔 놈이 별 걸 다 묻네

저는요, 요즈음 매우 흔들거리고 있어요. 저처럼 젊은 스님들의 방황을 차단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들려주세요.”

법등명(法燈明), 법등명(法燈明)이다. 일체가 환몽(幻夢)이야.”

가시면 어디로 가시나요?”

모든 것이 한 구멍으로 빠진다.”

한 구멍이 무엇을 뜻하나요. 쉽게 말씀해 주십시오.”

한 구멍에 빠지되 털끝만큼이라도 빠진다는 생각이 있으면 십만 팔천 리야.”

스님께서는 죽음 뒤의 저쪽의 세상(來世)을 믿으시나요?”

필요 없다, 군더더기다.”

사후 세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매우 큰데요, 그럼 내생이 없단 말씀인가요?”

필요 없어, 시팔 놈아!”

 

 

-망월사 원경-

 

스님께서는 90평생에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 가장 슬픈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애인을 사랑한 이야기라든지---.”

시팔 놈이 별 걸 다 묻네.”

죽음이 막상 다가서면 무서울 것 같은데요, 스님께서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마음이 매우 펑화롭다.”

제가 만일 큰스님을 벼랑 위에서 밑으로 밀쳐 버리며, 지금의 경계가 어떠시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 주시겠어요?”

시팔 놈아, 떨어져보지도 않고 어떻게 답해.”

저는 요즈음 가짜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이 짙은데요, 진짜배기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도()의 정수를 저에게 남기고 가시지요.”

좆같은 놈아, 주고받은 게 도인줄 아나?”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필요 없다, 필요 없다!”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하실 텐데요?”

시팔 놈의 자식! 신도 위해 사나?”

인생을 회향하시며 후회 같은 것은 없으신지요?”

일체가 환몽이야, ! 쓸데없다.”

스님의 크신 법의 주장자를 어느 곳에 꽂고 가시겠습니까?”

아무 소용없어.”

 

위 문답은 춘성스님께서 백병원에서 자퇴하셔 봉국사에서 몸조리하고 계실 때인 1977.2월 어느 날, <대한불교>편집국장인 향봉스님이 찾아뵙고 나눈 대담이다열반(1977.8.22.)하시기 6개월 전이였다.

 

 

-춘성스님부도탑과 추모비-

 

가천의대 전철역에서 내려 캠퍼스를 에두르며 가파른 언덕배기 계단을 올라 내려서자 시가지 속 좌측에 영장산봉국사란 일주문이 우뚝

서있다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범종루를 떠받고 있는 천왕문이 여느 사찰과는 다른 파격을 앞세웠다. 도심에 있어선지 사찰과 경내는 비좁았다. 하긴 간화선과 생활불에 열반하실 때까지 정진한 춘성선사의 상좌스님인 혜성스님이 주지하시니 허울 좋은 개살구는 여지없으리라.

탑돌일 한 후 춘성스님추모비를 찾으려(사찰 뒤에 있다고 해서) 사찰뒷길을 찾다가 염화실옆에서 처사님(나중에 인사하여 알았다)을 만나 친절한 안내를 받게 됐다.

 

-봉국사천왕문&종루-

 

처사님이 네 기의 비석을 안내하다말고 내가 혜성스님 안부를 여쭙자 놀란 듯, 설날이라 마침 계시고, 지금 뵐 수가 있다고 하신다. 분망하실 텐데 괜히 패 끼치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괜찮다고, 출타하시기 전(팔십노구인 스님께선 지금도 어느 암자에서 정진하신단다)에 스님 뵙고 비석을 일별해도 된다고 앞장서신다. 춘성스님에 관한 책-‘무애도인 삶의 이야기’<춘성>을 읽으며 혜성상좌님을 글로나마 접한 나로썬 여간 반갑고 영광된 자리가 아닐 수 없는지라 기꺼이 따랐다.

 

-염화실이 소장한 춘성스님 사진-

 

처사님의 안내받아 염화실(拈花室)토방에 배낭을 벗어놓고 들어서니 혜성스님이 반가이 반기신다. 먼저 온 손님 두 분이 자릴 떴다. 스님이 나이 지긋한 그 불자들께 봉투를 내밀며 세뱃돈이란다. 거구의 혜성스님한테 단박에 소탈하신 분위길 느낀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춘성스님이 얼른 연상됐다. 격의 없고 순박한 장골에 걸친 옷 한 벌이 전부였던 무소유 생활불(生活佛)이셨던, 육두문자로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셨던 선승 춘성스님 모습이 느껴졌다난 세배를 올렸다.

 

-봉국사-

 

익산에 살고 있으며, 고은시인의 <만인보>에서 춘성스님을 읊은 시를 접한 게 인연이 돼 망월사를 찾으며 흠모케 된 사연을 말씀드렸다. 순을 넘기셨을 혜성스님은 그런 나를 어린애마냥 반갑게 손잡으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계셨다. 곡차 한 잔을 주시곤 별실로 들어가시더니 책 한 권과 봉투 하나를 들고 나와 내게 주신다. 선물이란다선가구감(禪家龜鑑)책과 염주였다. 나는 20대초에 어느 선방에서 팔만대장경의 압축판인 청허스님의 선가구감해설강의를 접했던지라 더욱 감격했다. 이 무슨 황송한 은전인가!

 

 

-봉국사 공양실-

 

친견하며 춘성선사가풍을 잠시 느낀 것만으로도 감읍인데 선물이라니! 불자도 아닌, 못된 짓만 해 무간지옥업장을 켜켜이 두른 내가 혜성노스님으로부터 환대와 선물까지 받아 감개무량했다. 염화실을 나섰다. 노스님께서 처사님에게 점심공양을 해 보내라고 당부하신다. 다시 추모비를 찾았다. 춘성스님 부도비와 추모비, 아래에 수좌스님 두 분의 묘비가 따뜻한 설날의 햇살을 반기고 있다.

 

 

-봉국사 부도탑-

 

사실 춘성스님은 생전에 화장 후 사리도 챙기지 말고, 비도 세우지 말라고 엄히 유언하셨다. 철저한 무소유의 삶엔 법문을 녹취하는 것도, 글자 한 자 남기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다,라고 일갈하셨다. 말과 글은 하나의 방편 일뿐 오직 참선정진 해야 한다는 선사였다.

목침과 방석 하나가 침구의 전부였던 춘성스님은 이불은 잠귀신이라 공부(참선)할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다,고 모든 이불을 불태웠다. 해서 망월사 선방엔 이불이 없다. 뿐이랴, 가난하고 안쓰런 자를 보면 수중에 있는 것 모두를, 심지어 옷까지 벗어 주곤 했었다.

 

-망월사-

 

그런 스님에겐 금고나 통장은 물론 주지방(住持房)한 칸도 필요 없는, 평생 일군 사찰도 털털 털고 나서면 끝이었다. 그것들은 거추장스런 짐덩일 뿐 이였다어디 걸림이 없으니 대자유인-무애도인 이셨다.

서슬 퍼런 박정희대통령독재시절, 육영수여사 생일에 청와대로 초대받아 법문을 요청하자 잔뜩 뜸 들인 후에

오늘은 육영수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보지에서 나온 날이다했다. 일순 장내는 긴장이 팽배했다. 군더더기 없는 직설 욕법문은 선지식의 활구였다. 박통은 ‘불교계에도 큰 스님이 있었던가?’라고 했단다.

앞서 춘성스님이 강화도 보문사를 중건할 때 육여사가 300만원을 희사했단 얘기며, 육여사가 반갑다고 인살 하자 "남녀가 만나면 반가운 건 당연하니 우리 입이나 마추자"고했단 에피소드가 있다. 요즘에 춘성스님이 몹시 그리운 건 박통의 따님 박근혜대통령의 불통 탓이 크다할 것이다.

 

-영장산 정상-

 

춘성스님의 부도, 추모비는 문도들이 스님의 거룩한 불적(佛蹟)을 기리기 위한 불충(不忠)의 심로(心勞)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님 3기 후 춘성문도회의 문장이기도 했던 혜성상좌스님은 문도들의 뜻을 모아 비문을 탄허스님께 간청했다. 탄허스님이 기꺼이 비문을 짓고 글씨도 직접 써서 각수까지 지정해 주셔 1981.5월에 여기 대적광전 뒤에 세웠단다. 혜성스님은 춘성큰스님(꼭 큰스님이라 하셨다)을 망월사에서부터 50년간 모셨고, 열반직전까지 이곳에서 모시다가 장소가 비좁아 삼각산화계사로 옮겨 열반에 드시게 한 후, 거기 뒷마당에서 다비를 치룬 오롯한 춘성큰스님문도상좌였다.

 

-봉국사에서 영장산정상 오르는 계단-

 

부도비와 추모비를 답사하고 식당에서 점심공양까지 받았다. 깔끔하고 담백한 공양식은 설날이라 떡과 과일까지 곁들여서 맛있게 포식했다. 각별한 처사님의 친절에 송구스런 작별인살 나누며 사찰 뒤 영장산을 올랐다. 곧장 누빗길이 연결됐다. 영장산누빗길은 분당시민들의 심신의 치유처일 테다. 퇴색한 누런 낙엽이 두텁게 깔린 영장산은 겨울가뭄에 푸석거리고 있었다. 한 시간 남짓 트레킹하고 남한산성입구 산성역에서 지하철에 올랐다수유리 화계사를 향했다. 춘성스님이 열반하시고 다비식까지 행한 장소가 화계사여서였다.

 

-화계사이일주문과 옆의 국제선원-

 

삼각산(북한산)이 품은 화계사는 서울도심에 자리한 대찰 이다. 근래 숭산대선사님이 조실로 계시며 선불교의 세계화에 힘써 32개국에 포교를 하는 도량으로, 국제선원을 개원한 사찰로 회자됐다. 처음 찾은 나는 경내를 탐방하다가 스님 한 분을 만나 춘성스님얘길 꺼내며 다비장소를 물었으나 젊은스님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의 간곡한 당부에 스님은 요사체에 들`나오시더니 대적광전 뒤뜰일 거란 답을 해줬다. 420여년을 수호수처럼 버틴 귀목 서너 그루가 있는 뒤뜰은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 아닌 빙설뜨락이었다. 두루 살펴보니 거기가 틀림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화계사천불오백성전-

 

1977.8.25, 다비장엔 전국에서 모여든 수좌, 비구니, 신도 등 5~6백 명이 밤을 세우며 노래방을 차려놓고 패를 갈라 노래자랑을 했단다. 춘성스님이 생전에 즐겼던 맥주를 마시며 스님의 애창곡 나그네 설움열창으로 시작 된 술판이 소주까지 곁들고, 술잔이 부족하면 고무신짝에 따라 마시는 아수라장이 돼 장의위원장인 월산스님이 걱정이 됐던지 덕산스님께 사의를 전하고 사라졌단다. 덕산스님은 이런 장례는 처음이고 마지막일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명진, 혜광스님은 회고 하셨다.

 

 

-춘성스님 다비장으로 추정되는 뜰-

 

다비식후 춘성스님의 유일한 유물인 걸망을 찾으러 혜광, 견진스님은 온양 비구니절인 옥련암을 찾아갔다. 걸망을 열어보니 조그마한 죽비

하나와 틀니 하나, 주민등록증과 빤스 한 장이 들어있었다고 증언했다. 철저한 무소유를 실천하신 생불이셨다.

<만인보>춘성이란 시를 쓴 고은 시인은 호탕한 무애춘성스님을 회고했다. 조계사 상당(上堂)법문에 초대 받은 춘성스님이 법좌에 앉아 청중 대부분이 보살님들인 걸 보고 한마디

 

-화계사 대웅전-

 

아이구! 보지를 달고 나온 년들 때문에, 그 구멍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이 중의 코가 딱 막혀버렸구나!”라고 일갈하니 분위기가 확 바뀌고, 보살들 얼굴빛이 흑빛으로 진해지자

! 딱따구리가 밤새도록 부리를 쪼아 구멍을 내는 데, 그 놈들 참   불쌍해---구멍을 뚫을라치면 침을 발라가며 뚫어야 하는데 침이    나와야지---”라고 다시 말하니 보살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육두문자 법설을 하고 내려와서 내게, 네놈밖에 알아들을 놈 없다는 암시를 하며

어떻더냐! 내 말 짤 들었냐?”

스님 말씀이 어디 말인가요, 똥찌끄럭지지요.”

! 이놈 제법이로구나. 어디 네 똥구멍 성한가! 내놓아보아라.”

오줌 마려우면 함께 오줌 누십시다.”

오냐! 내 자지도 그런 기별을 내고 있는 중이니라. 가자! 가서 이놈의

좆 덜렁 내놓고, 한바탕 소나기 쏟아버리고, 청천백일하에 바람이나 쐬러가자.”라고 했다는, 호방 질탕한 장골의 스님이 좋았다고 고은시인은 회억했다.

 

-춘성스님다비장, 얕은 못이 됐다-

 

그러면서 스승 만해의 감옥살이를 수발하면서 철창사이로 인찰지 꼰 것을 받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 <독립신문>에 발표케 한 조선독립의 는 오로지 스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쾌거라고 했다. 또한 도올김용옥은 티브이에서 무소유철학강의를 하다가 욕쟁이스님을 소개했다.  춘성스님이 망월사중창을 할 때 근처 나무를 베었다고 경찰서에 불려가서 취조를 받는데 경찰이 물었다.

"당신주소가 어디요?"

"우리엄마 보지다." 어이가 없다는 듯 경찰이 다시 물었다.

"본적은 어디요?"

"우리아버지 좆대가리이다."

무소유, 무장애 삶에서 가능한 선지가 번뜩이는 욕설을 도올선생은

간파했기에 춘성스님을 얘기 했으리라.  

 

                                -혜성스님의 선물, 선가구감과 염주-

 

어느 날, 조계사 법당기둥에 기대앉은 춘성스님의 발을 보니 양말이 짝짝인 채 다릴 쭉 뻗고 있었다. <불교신문>편집장이던 박경훈스님이 웃음 띠면서

스님! 양말이 짝짝입니다.”

별놈 다 보겠구나. 따로따로 보지, 두 발을 함께 보고서 분별을 하느냐?”라고 하셨다.

영국제 밤색싱글을 입고 나비넥타이에 조끼를 걸친 위에 버버리코트까지 걸치고 짧은 중절모를 쓴 말쑥한 영국신사차림의 스님이 박경훈을 데리고 신신백화점2층 일식집에 들러 술자릴 벌렸다. 마담과 지배인이 인살 하자 스님은 벌떡 일어나 지배인더러 막무가내로 옷을 벗으라는 거였다. 사양하자 손수 지배인바지를 벗기곤 자신의 바지를 벗어 바꿔 입기 시작하여, 모두 홀라당 바꿔치기를 한 후 잘 됐다고 자리에 앉았다. 옷이 딱 맞아 멋쟁이가 된 지배인은 황송해 어쩔 줄을 몰라 몸 둘 바를 몰랐다.

 

-화계사경내-

 

가끔 양복도 입는 스님이 맞춤신사복을 오늘 찾아 입고 자랑삼아 나들이 나온 걸 알아 챈 박경훈스님이

스님! 모처럼 부탁해서 해 입은 새 옷을 하루만 입어보시고 남에게

주시면 됩니까?”
입고 싶은 옷, 하루 입었으면 족하지. 평생 입든 이틀을 입든, 언젠가는 벗어야 할 껍데기다.” 스님은 길가다 허름한 옷 걸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주저않고 옷 벗어 주는 기행(?)으로도 이미 소문 난 바다. 무소유와 기행의 무애도인 이였던 춘성스님은 알면 알수록 현대판 원효스님이란 생각이 드는 거였다.

 

 

-화계사 뒤 둘레길의 마애불-

 

화계사뒷길인 북한산둘레길을 걸으며 삼성암을 돌아 나설 땐 오후 다섯 시를 넘겨서다. 이 시대에, 헬조선을 말하는 혼탁한 사회에 춘성스님이 계셔 육두문자 죽비를 울려 청량감을 주셨으면 싶단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갖고 잠을 자면, 베개를 집어던지고 난리가 납니다. 춘성스님은

"이놈들아 목침 하나 갖고 자다가, 거기서 굴러떨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정진을 해야지, 잠을 자려고 작정하고 달려든 놈들아, 이 도둑놈아, 밥 도둑놈아!" 라고 하셨어요.    -수경, 화계사주지- 

                       

-이 글에서 춘성스님에 대한 얘기는 김광식박사의 책 <춘성>에서 대부분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 

 

2016. 설날.

 

-삼성암-

-봉국사일주문으로 범종각이~-

 

-춘성스님기념비와 부도-

 

 

-봉국사를 친절히 안내한 처사님-

 

 

-봉국사 점심공양, 흡족했다-

-봉국사 뒷산서 본 성남시-

 

-분당시가지-

-누리길-

 

 

-북한산 둘레길-

-삼성사 일주문-

 

 

-망월사-

Posted by peppuppy(깡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지성의 전당 2018.11.24 19: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열반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