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와 허균은 진정 광인인가?

 

 

 

경희궁은 1617(광해9)에 기공하여 1623년에 완성한 조선의 이궁(離宮)이였다후궁출신인 광해는 왕위란 정체성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무리하게 경희궁을 중수하다 결국엔 민심이탈이란 빌미를 제공하여, 인조반정에 폐위되는 아이러니한 궁궐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모두 불태운 건 왜구보다도 무책임하게 도망친 왕께 분노한 백성들이 방화를 했다) 의주로 피신갓던 선조는 환궁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사저인 경운궁(덕수궁)에서 침전을 하다 승하한다. 이때 적자인 영창이 어려 후궁 공빈김씨의 소생인 광해가 16082월 보위를 계승한다. 그리고 거처를 16154월에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즈음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한 허균은 사회 개혁을 꿈꾸는 칠서의 난(서자들의 모임)에 연루된 사실로 신변에 위험을 느낀다. 그가 전라도 부안의 정사암에 은둔하면서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건 그의 불행이 가져다준 쾌거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당시의 실세인 이이첨에 접근하여 신임을 얻고, 나아가 광해에게 다가서는 처세의 달인이 된다.

 

 

 

모름지기 척결대상으로만 여겼던 권신이이첨을 이용해 광해의 신임을 얻은 허균은 호조참의, 승문원 부제조, 형조판서, 좌참찬에 올랐으며 천추사와 동지겸 진주부사로 임명되어 두 차례 명나라도 다녀온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와 기민함은 임금광해 편에 서서 인목대비 폐비를 간했지만, 깊숙한 속내는 어떻게 광해를 폐위시키고 개혁의 대의를 실현하느냐 이었던 것 같다.

 

 

 

1617년 인목대비폐비를 반대하다가 유배길에 오른 기자헌은 허균의 절친 이였지만 허균은 그를 외면한다허균의 제자이자 기자헌의 아들이었던 기준격은 허균의 흉중을 알고 있어 그가 역모를 꾀한다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비밀리에 올린다. 신의를 외면한 탓에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한 셈이다.

 

 

-옥좌, 일월오봉도와 쌍용-

 

철석같이 신임한 허균의 배신에 분노한 광해군은 그를 즉시 능지처참시키고 허균의 집을 허물어 연못으로 만들었다.

허균을 능지처참시키던 날 광해는 일부러 걸판지게 축제의 장을 펼쳤다. 그만치 허균의 배신에 치를 떤 광해였다. 허균의 나이 마흔아홉 이였다.

 

 

 

허균은 임진왜란에 아내를 잃었고, 전란의 폐해로 나라가 망신창이가 되게 한 무능한 선조와 서인들이 원망스러웠다. 해서 그는 새로운 이상향의 나라 율도국을 꿈꾼다. 그런 원대한 야망과 패기에 광해를 한갓 마중물로 여기려했을지 모른다.

 

 

 

적자출신이 아닌 광해는 왕권이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동복형 임해를 유배하여 죽이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후 방에 가둬 장작불을 지펴 죽인다.  또한 자신의 계모이며 영창의 친모이기도 한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광해는 당파를 초월한 인재등용과 개혁정책을 펴고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대동법을 실시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하는 등 선정을 폈다.

명나라가 후금과 전쟁을 하며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파병했으나 명나라가 패하자 곧장 후금(청)과 화의하는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허나 전란 후 나라재정이 엉망인데도 경희궁궐 재건은 후궁소생이란 정체성에서 벗어나려 광해가 무리하며 서두른 중건역사였다. 게다가 계모를 폐위시키며 인목대비부친 김제남일가를 죽이고, 임해군을 내치며 능창군을 죽게 하는 등 폭정으로 인심을 잃어 서인에게 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왕이 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이 경운궁의 별당(別堂)에서 즉위하니 그가 인조이다.

인조를 보위에 오르게 한 할머니 인목대비는 생때같은 자식을 죽인 원수인 광해를 끌어다 7년간 자신이 유폐당한 석어당마당에 무릎 꿇게 하나 차마 죽이진 안했다.

 

 

 

광해는 인조 153월 제주도에 위리안치 돼 4년간 유배생활하다 인조 19(1641) 716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광해와 허균은 탕평정책으로 인재를 등용(유재론)하고, 전란을 극복하며 실리외교를 펼쳐 국방을 튼실하게 하는 부국강병의 나라를 세운다,는 개혁과 굴기의 진취욕망은 공감했지 싶다.

 

 

 

그러나 그 외골수 광기로 서로를 포용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 한 건 후세의 우리에게도 불행 이였단 생각이 드는 거였다.

광해의 뒤를 이은 인조는 무능과 친명배금이란 편파외교로 나라는 초토화되고 자신마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해야했던 일연의 역사들이 광인취급 당했던 광해와 허균을 그립게 하는 거였다.

 

 

 

작금 우리정부는 북핵으로 중국시진핑에게 도움 청하다 무시당하나 싶고,  일본아베에게 악수하다 무안당하는 서툰외굘 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살얼음 깔린 경희궁에 싸라기눈발이 휘날리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개혁의 깃발을 들고 세상을 바꿔보려 했던 허균과 광해는 광인취급을 당하며 비극의 최후를 맞았다.

그들이 진정 미친 망나니들이였던가?

2016. 01. 26

 

 

 

 

-자정전, 왕과 신하들이 회의,경연을 했다-

 

 

-숭정전내-

 

-경희궁의 명물인 瑞巖,  바위속에서 샘물이 솟았다-

 

 

-숭정전 앞 품계석-

 

 

-수령380년의 느티나무-

-경내의 서울시립미술관-

 

Posted by peppuppy(깡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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