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난장 속 미쁨의 음주문

5월의 산야에 피는 꽃들은 대게 흰꽃이다. 이팝나무와 조팝나무, 아그배나무와 찔레꽃나무, 아카시아와 귀룽나무, 때죽나무와 층층나무, 국수나무와 산수국이 하얀 꽃으로 산야를 수 놓는다. 숲길에 수북히 쌓인 흰꽃잎들을 밟으며 맡는 꽃향기는 신록의 5월이 선사하는 풍요다. 그 중에 이팝`조팝나무의 흰 꽃은 꼭 쌀밥 같아 옛날 춘궁기(春窮期)에 쌀이 귀한 시절 배고픔의 설음앓이를 한층 더 했지싶다.


옛날 어느 가난한 집의 시아버지 제삿날, 갓 시집 온 새색씨는 시어머님이 내준 쌀 한 공기로 제삿밥을 지어 솥뚜겅을 열고 밥 상태를 감별하다가 시어머니 눈에 띄었다. 시아버지 제사맷밥을 진설하기도 전에 훔처먹은 년이라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모진 시집살이는 새색씨를 끝내 자살케했다. 그 며느리의 묘역에 나무 한 그루가 자라서 5월에 하얀 쌀밥 같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자 사람들은 며느리의 넋이라 여겨 ‘이밥나무’라 불러 이팝나무의 전설이 됐다.


5월의 보릿고개를 넘기던 옛사람들은 이팝(밥)나무의 소담한 흰 꽃을 보며 배고픔에 더 신음했을지도 모른다. 5월의 하얀 꽃잎들과 향기는 주린 배를 더 허천나게 했을 테다. 찔레, 돌배, 아카시아, 진달래꽃잎을 씹다 뱉어냈던 내 어릴 때의 기억이 아련한 삽화로 떠오른다. 그 시절엔 어떻게 해서든 식구들 입에 풀질하는 게 서민들의 일상이라 흰쌀밥 한 그릇을 먹는 건 언감생심이었지 싶다.


오후 5시, 율과 앨과 울`부부는 예약한 ‘대도 소곱창’집에 들어섰다. 충정로 막바지에 있는 곱창집의 곱고 친절한 여사장은 오랜만에 나타난 울`가족을 반색하며 푸짐하게 영접한다. 십여 평 남짓한 가게는 금새 만원이 돼 떠들썩한 실내는 고성으로 얘기꽃을 피워대고, 고기 굽는 냄새까지 더해 소음 아수라장이 됐다. 마치 누가 더 목청이 큰지를 시합이라도 하듯이 손님들은 옥타브를 한껏 높인다. 그렇게 끼리끼리 얘기꽃을 피우던 손님들이 몇 순배의 술잔을 돌렸을까? 한켠의 손님들이 일어서느라 소란스럽다.


한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느닷없이 모두 일어나서 밖으로 탈출(?)한다. 벌써 1차가 끝났나? 테이블의 음식과 술잔은 진행형 그대로인 채다. 근디 잠시 후에 또 다른 팀 손님들이 아까 탈출한 손님들의 꽁무니를 이으려는지 밖으로 사라졌다. 한 참 후, 첫 탈출한 손님들이 떠들면서 등장하는데 실내의 손님들은 철저히 외면(?)하나 싶었다. 나만 빼고~. 도대체 그들은 밖에서 뭘 했을꼬? 글고 들랑날랑 어수선떠는 청장년들이나 식도락에 열중인 손님들이 상대를 무시하듯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 무관심은 냉정과는 달랐다.


‘끽연은 밖에서 니코틴 향은 요령껏’ 이란 ‘음주문화의 룰’을 지키려는 청장년들의 암묵적인 절제와 포용이 미뻐서 내심 격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할 것 없이 고래고래 떠들고 포식하면서 배짱을 키워내 스트레스를 푸는 듯한 희열은 기막힌 하루의 종언(終焉)이지 싶어서다. 왁좌지껄 소음난장 속에서 늙은 나도 덩달아 끼어들어 분위기를 타고 큰 목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그렇게 젊음을 탐닉하는 타임머신 여행!


울`부부는 가끔 애들의 초대로 젊은이들의 밤문화를 엿보며 끼어드는 행운과 뿌듯함을 자못 기대한다. 그래 온 가족동참하는 식도락을 자주 마련하는 율과 앨이 무지 고마워서 아내와 나는 빠른 세월이 아니꼽다. 아니다, 이 기쁨을 위해 몸과 맘을 젊게 유지하려 애쓴다. 노년의 부모와 흔쾌히 동행하려는 효심은 쉽질 않을 의지일 터. 5월은 가정의 달. 이팝나무꽃이 쌀밥이길 염원했을 부모님의 옛시절이 불과 70여년 전이었지 싶어 고단하셨을 애닳음을 그려본다. 지금 부모님이 계신다면 애들처럼 나도 효행할까? 어째 자신이 없다. 2026. 05. 09




# 위 그림 중 연등사진은 봉원사의 2025년 석탄경축일 준비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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