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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매화 - 두 번의 가슴 찡한 사랑

매화 - 두 번의 가슴 찡한 사랑

달맞이 언덕에서 마주한 매화

달맞이 언덕을 오르다 금방 꽃봉오리 터뜨리는 매화나무 두 그루와 마주쳤다. 엊그제까지 춘설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세월도 하 수상쩍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안타까웠는데 활짝 핀 매화가 나를 기쁘게 한다. 영춘화(迎春花)-고결의 상징 매화는 많은 얘기도 피워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얘기는 영조말엽에 황해도 곡산의 재가열녀(再嫁烈女)로 칭송받는 기생 매화의 러브스토리일 것이다. 예쁘고 총명한데다 가무(歌舞)에 뛰어난 열여섯 살의 기생매화는 곡산과 인근 지방에 입소문이 쫙 퍼져 갑부한량들과 방귀께나 뀌는 권세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어느 날, 돈 많은 한량이 부인을 친정에 보내고 사타구니가 불나게 달려와 술자리를 펴고 매화를 찾았다.

“내 오늘 너의 머리를 올려주고 싶구나.”

“고맙습니다. 소첩을 그토록 생각하여 주시다니요”

“그래, 허락해주겠단 말이지”

“아니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니가 나를 아직 잘 모르나싶구나. 해주 만석꾼인 나와 같이하면 평생 화의호식 시켜준단 약조를 하마”

“황송하옵니다. 제가 나리께 시조 한 수 불러올리겠습니다.”

​“그래, 나를 위한 노래이니 기쁘다마다. 어서 불러라”

데이지

세상 부자들아 돈 없는 사람 괄세마라 (富貴人 貧寒士)

​수만금 가진 졸장부도 있고 표주박 하나만 있어도 남부럽지 않은 어진사람도 있음인데 (石崇萬財 匹夫)​

​나 지금 비록 가난하지만 노력만 한다면 당신 돈 부러워하겠느냐 (貧寒 安貧一瓢)

매화의 기막힌 노래 한 수에 의외의 일격을 당한 해주한량은 소태 씹은 얼굴로 짐짓 점잖을 빼면서

​“그래 돈만 가지고는 안 된다 그 말이지”​

​​“예, 어른들 말씀에 조강치처는 내처서는 안 된다. 라고 했습니다. 방금 나리께서 저를 위해 부인을 친정으로 보내셨으니 장차 다른 여인을 위해 저도 버리실 것 아닙니까?”

산수유

해주 한량은 무안해서 발길을 돌렸다. 기생 매화의 정절을 돈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던 거다. 매화가 17세 되던 해에 황해도 관찰사 어윤겸(魚允謙)이 곡산에 순시 차 들려 연회가 베풀어졌다. 어윤겸이 천하절색 매화를 보고 “이런 벽지에 저런 기녀가 있는가!”라고 감탄한다. 연회가 끝난 후 매화가 관찰사의 이부자리를 펴놓고 돌아가려하자 어윤겸이 묻는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냐?”

​“예, 올해 열일곱입니다.”

​“그래, 좋은 나이로구나. 예 앉아서 이야기나 좀 하다 가거라.”

​ 매화는 사또의 당부와 관찰사 의중을 짐작하여 다소곳이 곁에 앉는다.

​“머리를 보니 아직 동기가 분명한데 지금까지 머리를 얹어주겠다는 사람이 없더냐?”​

“아니옵니다. 있었으나 소녀가 거절했습니다.”

​​“뭐라고, 거절했다고”

​“비록 미천한 천기이지만 한번 몸을 허락하면 평생동안 그분을 위해 수절해야 하는 것으로 아옵는데 아직 그런 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갸륵한 생각이로고! 여자는 정절이 생명인 것을...” 어윤겸의 말끝이 흐려진다.

​​“매화야, 사또가 너를 왜 이 방으로 들여보낸 줄 아느냐?”

​“예, 사또의 의중을 익히 짐작하옵니다.”

​“그런데 왜 너는 내게 수청들 생각을 하지 않고 이부자리만 펴고 돌아가려 했느냐?”

​“황공하오나 절개를 중하게 여기기에 그러했사옵니다.” 잠시 머뭇대다 소신을 아뢴다.

​“그럼 내가 너를 희롱만 하고 갈 것이라 생각을 했단 말이더냐?”

​“........”

​“말이 없는 걸 보니 그렇단 말이렷다.”

오리나무꽃술

“너를 수청 들게 하면 내 조강지처 대신 너를 들여앉혀야 한다는 말이지?” 매화는 고갤 숙인 채 말이 없다.​

​“그래 너의 정절관에 감탄을 하였느니라. 네가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소중하게 정절을 지켜라. 나가보아라.” 매화는 깜짝 놀랐다. 지엄한 관찰사가 수청을 들라하면 거절할 수 없는 기생이라. 허나 어윤겸의 언행이 사려 깊고 자애로운 진정성에 멍 맞은 매화는 차마 일어서질 못하고 있었다. 관찰사가 말한다.

​“내 비록 몸은 늙었으나 너와 같은 미인을 보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 뜻이 가상해 그냥 보내는 것이니라. 어서 가거라.” ​매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처럼 고매한 어른을 첨 마주하는 감격에 그동안 버텨왔던 자존심이 초라하단 생각이 들었다. 매화가 다소곳이 아뢴다.

​​“오늘밤 소녀가 어르신을 뫼실까 합니다.”

​“아니, 가겠다고 하더니 웬일이냐?” 미소를 머금으며 어윤겸은 속으로 기쁨을 삼킨다. 젊고 예쁜, 게다가 지조까지 갖춘 여인을 거절할 남자가 있으랴. 기쁨과 민망함속에 언뜻 이태백의 시 한 수로 분위기쇄신을 하는 어윤겸을 매화는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인생의 뜻을 얻었을 때 모름지기 기쁨을 다하여라. / 황금술단지를 달빛아래 헛되이 버려두지 말라.​ /       ​​기회를 맞이했을 때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지나가면 후회한다. / 때마침 천하절색 어린 기생이 수청을 들겠다니 / 거절하는 것은 남자의 덕이 아니겠지.”

​매화가 주안상을 마련하여 한 순배 음미한 후 술상을 물리자 촛불도 꺼졌다. 그렇게 매화와 어윤겸은 꿈같은 밀월을 공유했으나 노인과 십대처녀의 정염은 화끈하지 못했다. 매화꽃 활짝피던 어느 봄날, 곡산 노모로부터 기별이 왔다. 병세가 깊어져 죽을 것 같으니 한번 보고 싶다는 거였다. 수심 가득 찬 매화가 어머니의 병환을 얘기하자 어윤겸은 걱정하면서 노자돈을 두둑이 챙겨주며 다녀오라고 했다. 곡산집에 들어서던 매화는 어머니의 건강한 모습에 깜짝 놀란다.

​​“어찌된 일입니까. 어머니”

​“글쎄 나중에 얘기할 테니 우선 들어오너라.”

어머니가 중병이라 핑계 댄 사연인 즉, 매화가 어윤겸을 따라 감영에 올라간 후 곡산에 신임사또 홍시유(洪時裕)가 부임했다. 홍시유도 소문만 듣던 매화를 선망했으나 이미 어윤겸을 따라간 후라 아쉬웠지만 매화의 어머니를 음양으로 잘 보살펴주었다. 이에 감동한 어머니가 거짓편지를 써서 매화를 부른 거였다. 어머니가 홍사또를 한번 만나보라 간청하자 난처했지만 매화는 인사치례 삼아 사또 홍시유를 찾아가 만난다.

목련

젊고 건장한데다 다정한 홍시유의 매력에 호감을 느낀 매화는 어머니의 간청을 저버릴 수가 없어 그날 밤 동침에 든다. 매화는 난생처음 여자의 열락을 만끽하며 보름동안 홍사또 품에서 성의 신비에 눈뜬다. 새삼 젊음을 경탄하며 쾌락에 올인한 나날이었다. 매화는 어윤겸에게 돌아가기로 약속한 날 홍시유와 헤어지면서 맘속으론 다시 오리라 가슴 여민다. 감영에 돌아온 매화는 매사가 즐겁지 못했다. 늙은 어윤겸의 손길은 어쩐지 서먹하고, 잠자리에서도 홍시유의 젊은 홍안이 떠오르는 거였다. 뭔가 허전한 매화는 혼자 쓸쓸히 독백한다.

“심중에 무한사(無限事)를 세세히 옮겨다가 / 달 밝은 비단장막 님계신 곳에 전하고자

그제야 알뜰히 그리는 맘 짐작이나 하실까. / 한밤중 잠못이뤄 이리저리 뒤척일 때

궂은비 방울 소리에 애간장 끊는 그리움 / 뉘라서 내 모습 그려다가 님 앞에 전할까.”

매화는 병이 들었고 젊은 사또 홍시유를 향한 상사병은 점점 깊어져서 자리에 누워버렸다.   

목련은 매화 지기만 고대하나 싶다

 어윤겸은 유명한 의사를 불러서 진맥을 시키고 약을 먹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마음병을 약으로 고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누워있던 매화가 갑자기 머리를 풀어헤치고 속옷만 입은 채 거리를 헤매는 미치광이가 됐다. 허나 그건 어윤겸의 그늘을 벗어나 홍시유 품으로 가기 위한 기만 쇼(?)였다. 어윤겸은 안타까웠지만 애인 매화는 돈으로 살수 없었던 정절과 진심을 다 내주었던 고마운 여인이었다. 용하다는 의원을 모두 불러 치료하고 온갖 정성을 쏟았으나 매화의 병세는 악화되자 그녀를 고향에 보내기로 했다. 매화와 홍시유의 관계를 모르는 어윤겸은 곡산사또에게 잘 부탁한다는 전갈까지 써 보냈다.

곡산에 도착한 매화는 하늘을 날 것 같이 생기가 났다. 그녀는 곧바로 그리운 홍사또의 품속에 안겼으며 두 사람의 젊은 육체의 향연은 매화의 마음병을 치유했다. 철저한 정절관의 매화의 인생을 변화시킨 건 뭘까? 젊음과 사랑은 이념에 앞선다는 통설은 만고불변이라. 매화가 홍시유와 함께한지 두 달여 후, 어윤겸이 홍시유에게 감영에 출두하라고 명령한다. 병신옥사(丙申獄死)에 연루된 홍시유는 참형을 당하였다. 홍시유가 죽자 그의 부인 이씨도 자결한다. 매화는 홍시유 내외를 선영에 고이 안장하며 사랑하던 홍시유를 자기 손으로 땅에 묻었다. 매화는 온 세상이 텅 빈 허탈감에 빠져 무덤가에서 눈물로 노래하였다.

영춘화

“매화(梅花) 옛 등걸에 춘절(春節)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 즉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매화(梅花)-

​봄이 오니 아름답게 꽃 피었던 매화나무 그 가지에 다시 꽃 봉우리가 돋을 것도 같은데 봄눈이 어지럽게 내리고 있어선지 필듯 말듯 하구나​.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그 행복했던 날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홍시유를 땅에 묻은 매화는 인생의 낙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담 다음날, 매화의 죽은 시체가 홍시유 무덤가에서 발견된다. ​한때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지조와 정절을 지니고 있던 여인, 자신을 알고 믿어준 인품에 이끌려 처녀의 몸을 바쳤던 늙은 감사 어윤겸과의 사랑, 그러나 이성간의 단맛을 알고부터는 미친 듯한 행동도 불사하면서 자신만의 사랑을 찾았던 그녀였다.

동백

세상 사람들은 매화를 일컬어 재가열녀(再嫁烈女)라고 부른다. 두 번 혼인한 열녀라.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어윤겸을 배신하고 젊은 홍시유에게로 돌아간 것을 비방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사랑하던 홍시유의 주검 앞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열녀라고 부르기에 충분했다. 감정에 충실하였고 자신의 사랑 앞에 떳떳했던 한 여인. 거짓 사랑보단 진실한 욕구가 뭣인지 알았던 여인, 매화는 그렇게 갔다.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한 재가열녀 매화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순수한 사랑의 일생은 매화꽃처럼 영원히 피어난다.  2025. 03. 13

팔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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