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의 내밀한 사연

‘달맞이 길’을 트레킹 하다보면 청사포구 쌍둥이등대가 바다에 떠서 유혹하는 멋진 오션`뷰의 와우산 언덕빼기에 산수유군락지가 있다. 춘삼월에 때 아닌 눈 폭탄이 터진다는 중부`강원지방과 을씨년스런 시국 탓에 필둥말둥 망설이던 산수유가 에라 모르겠단 듯이 일제히 폭죽을 터뜨렸다. 노란 떼거리 아우성인 놈들을 입맞춤해보고 한 무리를 포로로 잡아오려고 언덕빼기를 오른다. 산수유는 가까이 맞서야만 영롱하고 신비한 매력에 취할 수 있다.

무허가집들이 철거한 공유지가 산수유 군락지로 변신한 언덕빼기를 오른다. 근디 산수유꽃밭에 왠 빨간 점퍼차림이 땅을 파고 있잖은가? 조심스레 다가서보니 웬 할머니가 구덩이를 파서 씨앗을 심고 있었다. “할머니 뭘 심고 계세요?” 허리를 펴며 일어서던 할머니는 “어째서 오요?” 아뿔사, 할머닌 쬠 놀란 표정이라. 얼른 안심시키려 “예, 사진 찍으려고요” “뭔 사진?” “산수유꽃이 예뻐서요.” “흐지부지헌 걸 찍어 엇다 쓴데요?”

“예쁘잖아요. 근디 할머닌 지금 뭘 심어요?” “심어야 소용 없시유. 호랭이 땜에---, 그냥 심심헝게요” “호랑이라니요?” “호랭이가 새순 나면 다 따먹응께 허나마난디-?” “호랑이가 새순을 먹어요?” “호(고)랭이가 새순을 얼마나 좋아헌디.” 아차, 내가 잘 못 알아듣고 있었다. ‘고라니’를 '고랭이'라 발음하는 걸 호랑이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두 발짝 앞에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잡초 속에 마늘 수 십 개가 봄볕을 탐하고 있었다. “마늘 할머니가 심으신 거예요?” “---” 본채 만 채다.

“할머닌 잘 하고 계신 거예요. 운동도 되고, 심심풀이 시간 보내면서 채소도 가꿔 잡수시고-” 할머니가 웃으면서 “고랭이가 먹고 남은 거 주어먹는 거유.” 미소에 주름살이 더 선명해지는 할머니얼굴은 ‘이 순간의 만족’을 즐기는 행복의 표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 땐 쪼그만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노년을 살고 싶어 귀농을 꿈꾸기도 했었다. 할머니의 산수유꽃밭은 출입제한지역인 공유지라서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단속 나온 사람인줄 알고 놀라셨단다. 흐지부지한 꽃 사진을 찍고? 호랑이라고 동문서답한 내가 민망했다.

산수유는 ‘산에서 자라는 수유나무’란 뜻에서 붙은 이름이란다. 꽃말은 ‘고요한 사랑’ ‘영원불변의 변치 않은 사랑’으로 사랑을 맹세하기 위해 산수유 꽃과 열매를 연인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3~4월에 꽃이 피고, 보리쌀 모양의 열매는 녹색인데 7~8월에 붉게 익기 시작하여 완숙되기 전에 낙과한다. 열매는 약용으로 쓰이는데, 독성이 있는 씨를 제거한 육질은 말려서 먹거나 산수유주를 담갔으며 정력제 등의 약재로 애용하는 구례`산청마을엔선 효자나무였다.

산수유의 씨를 제거하려고 부녀자들은 열매를 입에 넣고 앞니를 이용하여 씨를 발라 뱉어내고 육질을 따로 모아서 말렸다. 구례나 산청 산수유마을의 할머니들 앞니가 기형적인 것은 부녀자들 입술에 산수유 진액이 배어든 탓이다. 달디 단 진액이 밴 아내의 입술을 밤마다 물고 빤 남편들은 변강쇠가 됐다는 방중술(房中術)의 비밀이다. 뽀뽀 촉매제였던 산수유 열매는 체내의 정(精)을 보(保)하지만 씨는 정을 출(出)하는 정력 강장제라! 시인 김종길은 ‘성탄제(聖誕祭)’란 시(詩)에서 ‘산수유 먹는 아버지’를 오버랩한다.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산수유는 수천 년 전부터 약용식물로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사랑받았다. 비타민C와 플라보노이드는 면역력을 높이고 피로회복에 좋다. 칼륨은 혈압조절에, 캄슘은 뼈 건강에 이롭단다. 그래서 구례`산청마을에선 산수유나무 몇 그루로 자식들 대학교육까지 시켰다고 했다. 부부의 사랑도 깊어지고~! 산수유나무는 지금 관상목으로 온 나라에 식재되고, 빨강열매는 새와 산짐승들의 애용식이 됐다. 할머니 말마따나 ‘흐지부지한 꽃’이 뭐가 좋다고~! 2025.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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