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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아미산전망대의 낙조 & 응봉봉수대

아미산전망대의 낙조(落照)  &  응봉봉수대(鷹峯烽燧臺)

내가 부산 아미산이란 이름과 산이 품고 있는 내밀하고 애잔한 역사에 호기심이 생긴 건 감천문화마을을 탐방하면서였다. 산자락비탈에 힘겹게 삶의 터전을 만들었던 일본인들이 갑자기 8.15해방을 맞아 쫓기다시피 떠난 피폐한 삶터가 아미골이었다. 그 골짝에 6.25동란으로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밀물처럼 몰려와 정착하면서 일군 현대사의 굴곡진 단면과 흔적을 엿볼 수가 있는 상흔이 아미산자락에 옥수수 알처럼 박혀있었다. 산의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 같다고 아미산(峨嵋山)이라 불렀는데 산골짝엔 실재 ‘아미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아미산전망대
아미산 전망대서 조망한 몰운도

아미골의 어원은 ‘움막집’이 ‘애막’으로, 이를 한자로 ‘아미(蛾眉)’로 표기한데서 기인한다. 일제강점기 현해탄을 건너 부산에 몰려온 일본인들은 대게 가난한 하층민들이어서 부산 변두리 산자락에 삶터를 잡았다. 글다가 일본이 느닷없이 패망하자 쫓기듯 철수한 그들의 아미골 삶터와 공동묘지는 흉흉한 폐허가 됐다. 5년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헬 수 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들이닥쳐 부산인구 50만 명이 1년 만에 100만 명이 됐다. 피난민들은 일본인이 떠나 무주공산이 된 아미골 폐촌에 삶터를 일군다. 산골짝이나 달동네엔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재활용 소각장이라던가? 빨리 용도변경 리모델링하여 활성화됐음 싶다. 폐건물로 방치하긴 넘 아깝지 않는가>
낙동강하구
명지국제신시가지

움막을 짓느라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의 상석과 비석, 옹벽의 돌과 주춧돌 등 쓸 만한 것들은 모조리 사용했다. 그런 와중에 아미골 괴담이 생겨났다. 묘비를 주워와 다듬이질할 때 썼더니 ‘이타이, 이타이(아야, 아야)’하고 돌이 울고, 유골함단지를 쓰려고 뜨거운 물로 씻었더니 ‘아츠이, 아츠이(뜨거워, 뜨거워)’ 하는 목소리가 났단다. 밤엔 세탁소지하에서 게다 끄는 소리가 들리고, 골목에서 기모노를 입은 귀신을 봤다는 등등 별의별 얘기가 아미골에 난무했다. 감천 아미동 비석마을은 일본인들 공동묘지 위에 생긴 움막집동네다.

아미산정상을 깎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여 거창한 아파트타운이 형성됐다

피난 와서 변두리로 쫓기고 쫓겨(?) 이곳에 터를 잡은 피난민들은 살기가 바빠서 귀신이고 뭐고 젤 무서운 건 배고픔과 추위라 움막이라도 칠 수 있는 자리 차지하는 거였다.  그런 괴담은 자리를 잡고 한참 후 정착했을 때 생긴 얘기라 했다. 비석마을 고샅을 거닐다보면 묘지의 비석과 상석, 묘석들이 집의 주춧돌이나 옹벽, 계단으로 쓰였음을 목도하게 된다. 피난민들은 쫓겨 도망가다시피 한 일본인들에게 한결 고마움이 들었단다. 그들의 공동묘지가 집터가 되었고 그렇게 마을이 형성됐으니 말이다. 그래 일본인과 묘지의 망자에 대한 측은지심과 고마움은 명절에 차례를 지내주게 된다.

음력 7월 15일(백중)에는 인근 절에서 주민들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낸다. 이곳의 일본인 망자들은 후손들과 소통이 끊긴 불쌍한 서민들로 동병상련의 애환을 공감하는 소이였다. 일제강점기 재한 일본인 중에 부라쿠민 등 하층민이 생활고를 피해 이주한 경우가 많았지만, 다우치 치즈코처럼 한국인 빈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한 일본인도 있었다. 더욱이 가네코 후미코나 소다 가이치 처럼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분들도 있었단다. 그래서 일본인 지주나 경찰, 헌병 등의 지배층이 아닌 하층민의 일본인 이주민들을 결코 적대시하지 않았던 비석마을 주민들의 감정을 십분 이해하고 공감대가 형성된다.

다대포항 앞바다의 모자섬

죽은 자가 산사람에게 삶터를 마련해 준 셈이니 아미골 주민들은 비석 앞에 수시로 정한수와 음식을 놓고 명복을 빌었단다. 그런 아름답고 소박한 차례행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아미산전망대를 오른다. 언덕 빼기에 들어선 아파트단지를 한참 올라야 아미산전망대다. 전망대는 아미산 우듬지를 깎아 아파트단지를 만들면서 다대포해수욕장과 해안을 조망하는 남단에 있다. 몰운도와 해수욕장, 낙동강하구와 명지신시가지, 거제도까지 조망하는 땅끝이다. 전망대에서 맞는 황홀한 황혼은 인구에 회자되어 관광객들이 성시다.

음침한 숲길에서 모처럼 만난 산님, 나의 위치를 확신하는 안도감을 선사했다

아미산 산봉우리를 깎아 일군 아파트단지가 얼마나 광대한지를 응봉봉수대를 향하는 아파트단지 내 길에서 실감케 된다. 깔끔한 아파트단지를 관통하면 홍티고개에 닿는데 본격 산행은 여기를 들머리삼아 아미산자생식물원을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다대사(多大寺)를 간이역 삼아 응봉봉화대에 오를 참이다. 다대사를 향하는 숲길에서 조망하는 두송반도와 감천항 풍경도 삼삼하다. 다대사에서 응봉봉수대를 오르는 산세도 상당히 가파르다. 갈림길에 간혹 이정표가 있기 망정이지 인적이 뜸해 홀로 처녀 산행하는 나의 초조감을 해소 시키는 건 얼핏 숲사이로 뵈는 감천항과 송도가 방향타노릇을 해줘서다.

두 시간쯤 산길을 더듬어 응봉봉수대에 올라섰다. 다대포와 서평포진과 낙동강하구일대, 몰운대 앞바다의 왜선의 동향을 감시하는 군사적 전략의 요충지다. 응봉봉화는 인근의 양산-경주-안동-단양-충주-광주-서울남산으로 교신한다. 봉수대를 관할하는 기관은 다대진(多大鎭)으로 다대포 응봉봉수대엔 도별장(都別將) 1인을 두었고, 그 밑에 별장(別將) 6명을 두고, 감고(監考)는 1명, 봉군(烽軍)은 1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두송반도와 몰운도가 품고 있는 올망졸망한 바다풍경이 멋진 수묵화로 태어났다.

다대사입구

마침 한 산님커플이 나의 인증샷도 해주었는데, 맑은 날엔 거제도일원과 대마도까지 조망된다고 했다. 체육공원쉼터를 찍고 낙동강하구방면 아미산둘레길에 들어서 다대포해수욕장에서 낙조를 감상하며 트레킹 피날레를 할 요량이다. 헬기장에 눈 맞추고 아미산둘레길에 들어섰다. 넓은 산림도로 주변의 수목들은 흡사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태곳적분위기의 수풀사이로 낙동강하구 을숙도와 명지신도시가 장대한 묵화 한 폭이 되어 다가선다. 낙동강토사가 일궈낸 백합등 섬들이 석양노을 준비를 하느라 보채는 성싶다. 해안의 풍정들은 한정 없이 굼떠 좋다.

다대사조롱박도 임자가 없는 듯
돌탑언덕
두송반도(좌)

다대포해수욕장에 들어섰다. 낙조를 기대하는 낭만족들이 파도 앞 모래톱에 점점이 붙박여 묵화(墨畵)퍼레이드를 펴고 있다. 자연이 빚어낸 풍경 속에 들어가 까만 그림자로 변신한 사람마저 아름답기 그지없다. 뭉게구름이 다소 거슬리지만 구름사이로 투영되는 빛의 파장은 황혼의 보너스일 테다. 암튼 굼뜬 황혼의 미감은 느림의 미학을 여실히 발산하여 나를 흥분시킨다. 붉게 활활 타는 석양은 아니었지만 저무는 바다 끝 시꺼먼 산 능선으로 숨어드는 태양빛은 은근해서 뭉클했다. 오랜만에 품는 저녁노을! 다대포해수욕장 - 몰운대의 황혼을 맞으러 몇 번 왔던가! 행복한 하루가 저문다.                     2024. 10. 07

 

중앙의 산은 영도 봉래산
봄철 봉수대 산능선은 벚꽃터널로 장관일듯~!
팽나무아래 벤치에서 망중 한인 노인장의 모습에서 나를 읽는다
먕지신시가지
낙조를 품기 전의 낙동강 하구의 평온~!
일나넝 팔쌍둥이 솔이라 해야하나!
명지국제신도시
낙동강하구의 장림포구의 공장지대(앞)와 건너편 명지신시가지
몰운대
다대포해수욕장 백사장초지
▲낙조의 신비경에 빠지다보면 느림의 미학이 수반하는 치유까지 보너스로 안게 된다▼
재활용소각장(?) 이란데 준공하자마자 가동중단 됐단다. 지자체의 근시안적인 행정이 우릴 슬프게 한다
▲다대포해수욕장의 석양, 구름 탓에 좀 아쉬웠다▼
아미산자락은 아파트신도시가 됐다
▲해수욕장 수변공원▼
▲1909년 한일합장 전의 아미산에서 본 부산항 & 공동묘지 묘비석이 아미골움막의 축대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