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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심금 울리는 매화연정

심금 울리는 매화연정

 

  내 어릴 때 고향집엔 제법 큰 매화 한그루가 남새밭에 있었다. 선친께서 어찌나 나무심기를 좋아하시던지 얼마 안 되는 남새밭은 온갖 나무들로 밭 아닌 정원이 된듯하여 어머님은 여간 못마땅해 하셨다. 나무그늘에 치어 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였다.

하여 어머님은 매화나무가지를 꺾어버리곤 했는데 담장 밖 고샅길로 월담한 가지만 성하여 꽃피우고 열매를 맺곤 했었다. 당시엔 매실을 지금처럼 유용하게 쓰이지 안했던 탓에 푸성귀라도 잘 자라게 해서 반찬에 쓸 요량이었을테다.

먹거리 귀한 시절인데도 매실은 어찌나 시던지 누구 얼른 나서서 따먹질 안했고, 누렇게 익어서 따먹었는데 역시 신맛이 강해 과실나무로썬 별로였던 걸로 기억된다.

선비들의 사군자그림 속에서나 사랑받던 매화가 지금은 꽃 축제마당으로, 매실은 갖가지 음식레시피 용으로, 또는 약용으로 애용 돼 고소득작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매화를 가장 사랑한 사람은 퇴계선생이 아닐까 한다. 선생은 매화를 좋아할 정도가 아니라 애착하다시피 해 평생 매화를 소재로 쓴 시가 107수며 이 중 91수를 추려서 매화시첩(梅花試帖)으로 묶기도 했다.


하늘이 늦게 피워 복사꽃 살구꽃 압도하니/ 신묘한 곳 사람의 말로는 다할 수 없네/ 아릿따운 모습에 어찌 철석같은 심장이 방해되랴/ 병든 몸이지만 술동이 들고 감을 사양치 않으니라고 44세 때인 15442월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읊었었다.

선생은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한 지 두 해째 되는 48살에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8세의 관기 두향(杜香)을 만난다. 두향은 나이는 어리지만 시문과 가야금에 능했고 매화와 난초를 특히 좋아했다.

그녀는 퇴계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흠모와 사모의 정을 떨칠 수가 없었고, 퇴계 역시 한 떨기 설중매 같은 두향의 재능과 고운품성을 사랑했다. 두 연인은 함께 시와 음률을 논하고 산수를 거닐다 사랑을 하게 됐는데, 겨우 10개월 만에 이별을 하게 된다.

선생이 풍기군수로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술잔을 앞에 두고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시 한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우네/ 어느 듯 술 다하고 님 마져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퇴계 또한 붓을 들어 두향의 치마폭에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다라고 시를 써 준다.


그날 이후 두 연인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 선물한 매화분 하나가 있었는데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그 매화분을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마치 두향을 보듯 매화분을 곁에 두고 애지중지 했다.

병색이 깊어 몸꼴이 초췌하게 되자 매화에 그런 모습을 보이기 민망스럽다는 생각으로 매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기도 했다.

1570(선조3)128일 선생이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선생은 시자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일렀으며, 오후 5시경 누운 자리를 정돈하라 하시어 부축해 일으키니 앉은 채로 조용하게 떠나셨다.

선생이 풍기군수로 떠난 뒤 두향은 후임 사또에게 간청을 올려 관기에서 탈기해 선생과 자주 갔던 남한강가의 강선대 옆에 초가를 짓고 님을 그리며 살았다.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나흘간 걸어서 안동을 찾아 먼발치에서 조문한 뒤 다시 단양 남한강으로 돌아가 몸을 던져 선생을 따라갔다.
매향기보다 더 맑고 고운 숭고한 사랑이야기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사랑의 향기가 매향보다 더 짙고 그윽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음이리라.

안동시는 해마다 퇴계선생과 두향의 사랑을 그린 가무극 퇴계연가를 안동민속박물관 앞 개목나루에서 펼치고 있다.

                                                         - 박진성 좋은문학지회장 글 참조-

 또 하나 짙은매향 속에 가슴 미어지는 애절한 사랑얘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이 강진 유배지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준 사랑의 매화첩이 품은 얘기다.

다소 곰살궂은 데가 있었던 선생은 친한 벗과 제자에게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을 만들어 선물하곤 했다. 그의 아내가 굳이 낡아 못 입게 된 치마를 보낸 것은 남편의 이런 용도를 헤아렸기 때문일 터였다

1810, 선생의 본가인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바랜 낡은 치마는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였다.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 떨어져 산 세월이어느 덧 10년이다.

다산은 치마 솔기를 뜯어 잘라낸 다음 풀칠하고 배접해서 공책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 '하피첩(霞帔帖)'이란 수첩을 만들어 주었다.

'하피첩'을 만들고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 마침 강진 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보낸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 폭을 그려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翩翩飛鳥         

내뜰 매화에 쉬네    息我庭梅

꽃다운 향기 매워    有烈其芳

기꺼이 찾아왔지     惠然其來

머물러 지내면서     爰止爰棲 

집안을 즐겁게 하렴 樂爾家室

꽃이 활짝 피었으니  華之旣榮

열매도 많겠구나.     有賁其實

안마당에 찾아든 새 두 마리는 사위와 딸이다. 멀리 떨어져 가까이 데려와 짝지어준 기쁨을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으로 표현했다.

꽃이 활짝 피어 열매도 많이 달리겠다고 함은 딸에게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축원함이다.

근데 20096. 다산의 또 다른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발견 공개되었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古枝衰朽慾成槎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擢出靑梢也放花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何處飛來彩翎雀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應留一隻落天涯

위 시는 1813819일에 지었다.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를 714일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린 그림인가?

다산은 초당 생활 중에 눈맞춘 소실정씨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두었다. 분명 이 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일 터이다.

선생이 52세 되던 해 딸이 시집을 간 며칠 후 소실 정씨가 딸을 낳으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1818년 두릉으로돌아오면서 다산은 홍임 모녀를 함께 데리고 왔으나 본의 아니게 초당으로 다시 내려보내야 했다. 본가에서 부인이 받아들이지 않아서였다.        

하긴, 어진 아내라도 어찌 시앗을 좋게 보겠는가.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의 속이 좁다'고 탄식하였으니 무릇 남정네의 이기적인 사랑이란 속성은 다산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실 정씨가 강진초당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남당사'를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아빠 언제와하며 대 여섯 살 난 딸이 우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빠 곁을 떠난 또 다른 유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결국 홍임 모녀는 평생동안 다산을 만나지 못했을 테다. 그렇게 모녀는 무심히 처량하게 잊혀졌고, 만년의 다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인륜의 정도 여인의 투기 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두 모녀의 삶이 슬프지만, 단지 태어난 죄값 만으로 평생동안 아빠를 그렸을 딸 홍임이 짠하다.

홍임 모녀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추정되는 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는 절친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그의 집안과 누대 연비로 맺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자기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인 홍임을 위해 두 점의 매조도를 그렸으니, 치마를 보낸 정실의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어 분할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산과 소실 정씨와 딸 홍임의 사연이 깃든 매조도를 보며 애처로운 사랑의 한탄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잊혀지며 홀로 쓸쓸이 늙고 죽어갔을 한 여인과 아빠를 그리며 평생 서녀로 서글픈 삶을 살았을 홍임의 가슴은 헤아릴 수 없는 막막함이려니! 

나는 이번에 다산초당엘 가서 누구보다도 홍임모녀를 그려봤었다. 모녀에겐  다산이 유배에서 풀리지 않았음 차라리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유추해 봤다. 매화가 만발한 초당을 거닐면서.

                                                             -정민교수의 매조도 참조-

2015.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