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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사랑에 눈먼 궁녀들의 질투가 빚은 비극

 사랑에 눈먼 궁녀들의 질투가 빚은 비극

 

 

조선조 때 가장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성종임금은 12명의 부인에 왕자16, 공주12명을 둬 태종에 이어 두 번째로 왕성한 정력을 과시한 왕 이였다. 그렇게 힘 센 성종이 첫 왕비였던 공혜왕후 한씨가 열아홉 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비극이 잉태된다.

궁녀들 중에 춘추관 판봉상시사 윤기무의 딸이 있었는데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성종보다 나이도 12살 연상의 여인으로 왕의 눈에 쏙 들어 성총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윤기현)가 집현전에 근무한 인재였지만 일찍 작고해 홀어머니 신씨와 곤궁한 생활을 하다 후궁에 들어온 여자였고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를 꿰찼다.

근데 윤씨는 왕비가 되기 전에 왕자 융을 낳았고 성종은 왕자 융을 강희맹의 집에서 기르도록 했다. 융이 훗날 폭군 연산군이 될 줄이야?

윤 왕비는 왕비로써의 품위와 법도를 준수하려고 애썼고, 성종이 딴 후궁들과 놀아나도 꾹 참곤 했었다. 이때 후궁들 중에 정소용, 엄숙의, 권숙의가 있었는데 정소용이란 후궁이 왕을 독차지하려는 욕심과 기교가 뛰어나자 왕비는 왕께 입방아를 찧곤 했었다.

정소용의 치마폭에 푹 빠진 성종이 왕비 윤씨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한데다 그런 왕비의 시기 질투에 마침내 염증이 났다. 그런 왕비를 질책하며 왕의 발길은 정소용, 엄숙의, 권숙의의 침소로 향하는 거였다. 성종의 사랑을 함께 받아오던 이들 후궁들도 눈엣가시 같은 왕비 윤씨에 대해 심한 질투와 시기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왕비 윤씨의 홀어머니 신씨도 장흥부인이 돼 왕비의 후광을 업고 영화를 누리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세 후궁들은 그런 신씨와 왕비가 못마땅해 모사를 꾸미기로 했다.

마침내 세 후궁들은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헐뜯었다. 왕비 윤씨를 대궐에서 쫓아내려고 모의를 했던 것이다.

인수대비도 보잘 것 없는 왕비 윤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참이라 세 궁녀들의 입방아가 귀에 솔깃해졌다.

 어느 해, 정소용과 엄숙의가 왕비 윤씨와 그 아들을 죽이려한다는 내밀한 투서가 들어와 왕비는 질투심과 함께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 왕비는 두 후궁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여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독약을 준비케 하여 왕비 침소에 감춰뒀었다. 

                                                       -선릉 입구-

근데 어느 날 성종은 뜬금없이 왕비윤씨의 처소를 방문하였고, 탁자 아래 감춰두었던 봉지가 삐죽이 나와 있던 걸 발견하여 펼쳐보곤 놀래 묻는다.

"아니, 이거 비상이 아니오. 비상이 왜 여기 있소?"   왕비 윤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며 사실대로 말했다.

"정소용과 엄숙의가 왕자와 저를 헤치려 한다는 소문이 그치질 않아 어쩔 수 없었사옵니다."                                                         

"두 궁녀를 해치려고 비상을 준비했단 말이오?"     성종은 버럭 화를 내며 하소연하며 붙잡는 왕비 윤씨를 뿌리치고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성종은 왕비의 허물을 덮어둔 채 비상을 구해온 몸종 삼월이를 처형했고, 왕비의 어머니 신씨를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명했다. 이 일로 인해 성종의 마음은 왕비에게 더욱더 차가워지고 멀어져 발길이 끊겼다.

다음날, 성종이 인수대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었는데 왕의 얼굴을 바라보던 인수대비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용안에 웬 손톱자국이 나 있소?"   성종도 그제야 손톱자국이 난 것을 알았다.                                                                                 

"어제 왕비의 처소에 들었다가 손끝에 스친 모양입니다."    성종은 전날 오랜만에 왕비 윤씨에게 갔다가 후궁들의 일로 말다툼했던 걸 상기했다.   인수대비는 안 그래도 왕비 윤씨가 못마땅하던 차였다.

성종이 돌아가자 인수대비는 곧장 우의정 윤필상을 불러 문제를 제기했다.

"무엄하게도 중전이 상감의 용안을 할퀴었소. 이 어찌 가만 보고만 있어야겠소?"                                                                           

 "중신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라고 우의정이 조아린다.               이때 윤필상은 쾌재를 불렀다. 친척인 윤윤호의 딸이 후궁으로 들어와 숙의로 있어서 잘하면 그 아이를 왕비로 앉힐 수 있겠다는 계략을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필상은 곧 이일을 3정승인 정창손, 심회와 긴밀히 논의 하고 성종께 윤씨 폐위를 진언했다.

 

                                                       -선릉(성종묘)-

종은 3정승과 원로 공신 한명회, 김국광 등의 의견을 물었으나, 조정의 대신들은 윤씨를 폐비시켜야 한다는 쪽과 원자가 있어서 폐비는 불가하다는 두 패로 나뉘어졌다.

"왕비 윤씨는 중전으로서 부덕합니다. 비상사건도 용납할 수 없거니와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궁중이 불화하니 폐서인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정창손이 나서서 크게 반대했다. 윤필상은 한 발 물러서 성종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14766, 성종은 마침내 왕비 윤씨를 서인으로 낮추어 궁궐 밖으로 내쫓아내고 다음해 11월에 윤호의 딸 숙의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폐비윤씨는 어머니 신씨와 함께 3년 동안 곤궁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성종도 어엿하게 자라는 세자생각에다 윤씨에 대한 고까움도 사그라질 무렵 이였다. 허나 낌새를 눈치 챈 정소용과 후궁들은 성종에게 틈만 나면 폐비윤씨를 헐뜯는 거였다

"폐비윤씨는 죄인이면서 온갖 사치와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성종은 내시를 시켜 윤씨의 동정을 살피고 오게 하였지만 정소용은 미리 내시에게 뇌물을 듬뿍 줘 매수한 후였다왕의 하사품을 가지고 간 내시는 곤궁하게 지내는 폐비윤씨 모녀를 살펴보고 돌아갔지만 궁궐에 들어와 성종에게 거짓보고 하곤 했다.

"폐비윤씨는 호사생활하면서 나라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후일 복수를 하겠다는 말도 하였습니다."라고.              성종은 반성의 기미가 없는 윤씨를 그냥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음날, 신하들이 대전에 입석하자 끔찍한 하명을 한다.

"짐이 은연 중 폐비윤씨를 살피게 했던바 3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잘못을 반성키는커녕, 세자가 등극하면 복수하려고 한다 하오니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사약을 내릴까하오."              왕은 혹여 반대하는 대신들을 향해 후환을 막음 질하는 못을 박았다.

"대신들은 왕자를 위한다고 더 이상 내게 이 일을 말하지 말 것이며, 앞으로 1백 년 동안 이 일을 문제 삼지도 말아야 한다. 이 말을 명심하여라."

어느 누구도 성종의 뜻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우찬성 허종은 말 타고 입궐을 하다가 부러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를 하였다. 그리고는 다쳐서 입궐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전해야 했던 허종은 낙마꾀병으로 갑자사화 때 살아날 수가 있었다.(허종의 대타였던 이세좌는 어땠을까?)

 

                                           -선릉에섭 본 홍살문쪽-

그런 음모를 알 턱이 없던 폐비윤씨는 성종이 다시 궁궐로 부를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신씨에게 내시가 우리의 형편을 보고 갔으니 환궁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위로하였다. 그때 폐비 윤씨에게 대궐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어명이오! 죄인은 사약을 받으시오."

폐비 윤씨와 어머니 신씨는 순간 귀를 의심하다 기가 막혀 휘청대며 쓰러질 듯하였다.   통곡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폐비윤씨는 체념을 한 채 사약 받을 절차를 행하였다목욕재개하고 옷을 단정히 입었다. 그리고 사약을 상에 받아 놓고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였다.

사약을 가져온 이세좌가 독촉을 하자 폐비윤씨는 사약을 들어 마셨다. 고통을 버티며 소매 끝에 달린 한삼을 뜯어 입에서 흐르는 피를 씻었(1482).  폐비윤씨는 피 묻은 한삼자락을 어머니에게 전해 주면서 그걸 동궁에게 꼭 전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폐비윤씨가 사약을 받고 자진한 뒤 어머니 신씨는 장흥으로 귀양길에 들었다.

 

                                     -선릉 송림길-

사약을 내린 성종이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누구든지 폐비윤씨의 죽음을 입 밖에 내어 세자가 알게 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 당부하였다. 그토록 폐비윤씨의 죽음은 엄중한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폐비윤씨가 사사된 2년 후 세자융이 옥좌에 오르니 연산군이다.

세상에 비밀이란 존재할 수 없듯 간신 임사홍이 왕께 보고하기 전에 연산은 생모(폐비윤씨) 의 비극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으로 등극 10년차 갑자사화(1504)의 참화는 조정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윤씨 폐출의 원죄였던 엄귀인과 정귀인 등이 파리 목숨이 됐고, 그들의 소생도 귀양 보내 죽였다. 폐출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이세좌, 성준, 권주(權住), 이주(李胄) 10여 명을 처형됐고, 이미 사망한 남효온,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한치형, 어세겸(魚世謙), 심회, 이파(李坡) 등은 부관참시 당했다. 조모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폐륜행위를 꾸짖다가 화병으로 죽었다. 사랑에 눈먼 궁녀들의 시기와 모략이 빚은 치정극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비극으로 치닫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역사의 주인은 백성이지만 훌륭한 역사를 창조하는 건

군주다. 백성의 총의를 어떻게 결집시켜 찬란하게 꽃피울지는 지도자의 열정과 예지에서 비롯된다할 것이다.

2015. 05.

 

 

                                                             < '이조 야사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