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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그 여적

조선궁녀의 사랑과 비극

조선궁녀의 사랑과 비극

 

중비란 방자(房子;심부름하는 궁녀)가 왕족의 심부름이나 문방구관리를 하는 천민신분의 어린별감 부귀에게 연심을 품었다. 소천시(15~16세의 어린별감)는 내시가 아닌데다 맨날 궁녀들과 같이 있다 보니 바람나기 십상이었다. 중비가 부귀에게 연정을 품고 추파를 보낸 건 그런 연유였다.

붓 하나 구해줄 수 없나요?” 라고 중비가 은근한 부탁을 하자 부귀는 사뭇 당황하면서도

다음에 갖다드리면 안 되겠는지요라며 기꺼이 응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중비는 설레는 가슴을 동료인 자금과 가지에게 털어놓고 그녀들을 꼬득여 시녀 월계를 찾아갔다. 그녀들은 글을 몰라 월계를 찾아 연애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러 갔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어제 주겠다던 붓은 보내주지 않습니까. 대궐은 지금 넓고 적막합니다. 서로 만난들 어떻습니까.”라며 노골적으로 만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편지 쓰긴 중비뿐만이 아니었다. 동행했던 자금과 가지도 평소에 연모하고 있었던 소천시 수부이와 함로에게 연서를 대필하여 보냈다. 방자 세 명이 소천시 세 명에게 집단미팅을 제안하는 편지를 쓴 거였다. <단종원년        1453.4.14>

사춘기궁녀들이 총각을 연모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나 궁녀는 오직 왕과 세자만을 위한 여자일 뿐, 딴 남자를 넘보는 건 극형을 면치 못할 죄악인 것이다.

그러나 어린방자들의 불붙은 연정은 금지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그 편지내왕의 메신저역할을 했던 복덕이란 궁녀가 어린방자들에게 소천시의 편지를 읽어주면서 소문이 퍼져, 마침내 묘단이란 나인이 이 금지된 연애질을 감찰상궁께 고자질을 하고 말았다.

수사에 들어간 의금부는 사실을 밝혀냈고, 어린방자 세 명과 별감 세 명을 부대시(不待時)란 참형에 처하기로 한다. 또한 편지를 전달하고 읽어준 궁녀복덕에겐 곤장100대와 유배3000리형을 내렸다. <1453.5.8. 단종실록>

연애편지 서너 번 주고받았을 뿐, 섹스는 커녕 살 비벼보지도 못하고 목을 참수당하는 극형에 처할 수밖에 없던 까닭은 조선의 법전속대전에 따른 법집행 탓이었다.

궁녀가 왕과 세자 이외의 남자와 간통하면 남녀 모두 즉시 참수한다. 다만 임신한 여자는 출산까지 기다려 출산 100일 후에 형을 집행한다.”라고 명문화 됐다. 그러나 부대시형은 예외로 형을 곧장 집행했었다.

단체미팅으로 가깝게 지냈을 뿐 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메신저 묘단이 진술한 걸로 봐서도 간통한 증거가 없으니, ‘부대시처형은 너무 과하다고 여긴 어린 단종(11세였다)은 형벌을 각각 1등씩 경감시켜주라고 왕명을 내려 여섯 명은 가까스로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들에겐 곤장을 때린 후에 별감들(수부이,함로,부귀)은 함경도 부령의 관노로 평생을 존속시키고, 방자(중비,자금,가지)들은 평안도 강계의 관비로 영원히 소속시키라라고 하명했다고 단종실록에 기록 돼있다.

 

 역대 임금 중 가장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궁녀들의 간통만큼은 추상같이 엄벌했다.

궁녀 내은이(內隱伊)가 왕이 쓰던 푸른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 환관 손생(孫生)에게 주며 연정을 나눴다. 기미를 안 의금부가 수사하여 손생과 내은이의 연애질을 자백받아 참형에 처했다.

고자인 환관과 바람피워봐야겠지만 궁녀가 왕 아닌 딴 남자를, 더욱이 왕의 물건을 훔쳤다고 참수형을 내리자 세종은 주저 없이 제가를 내렸다. 옳게 섹스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황천길에 들었다.

세종은 또 장미란 궁녀에게도 참수형을 내리고, 부모의 재산을 몰수한 채 아비는 귀양, 어미와 형제는 관노비로 삼는 연좌죄형을 내리기도 했다. 사연은 이렇다.

태종은 궁녀장미를 불러 무릎안마를 시켰다. 태종은 안마가 시원찮았던지  장미를 꾸짖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근데 장미가 좀 조심성이 없었던지 왕의 무릎을 쌔게 주물렀다. 잠에서 깬 왕이 무례함을 캐묻자 장미 한다는 소리가 꾸지람이 너무 과하여 화가 나서 자신도 모르게 좀 세게 주물렀다고 아뢰었다.

왕이 좀 꾸짖었기로 옥체에 화풀이를 한 장미의 당돌함과 대담성이 놀랍기도 하나 문책 받아 마땅하다. 태종은 장미를 궐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근데 얼마 후 그녀는 환궁해 명빈궁의 시녀로 복귀한다.

그녀의 대담성은 환관 임장수를 꾀어 그녀를 출궁시켜라는 임금의 거짓교지를 만들게 하여 궐 밖 구경을 했던 것이다.

결국 이 거짓교지가 발각 돼 심부름한 환관 임장수만 애꿎게 참수형을 당했다. 그러고도 장미는 꾀병을 핑계로 출궁하여 친정에 머물다가 신의군(이성계의 3남인 의안대군의 아들)의 술자리에 초대받아 거기서 며칠간 머물었다. 장미는 신의군 형제들과 주연놀이를 하다 마침내 신의군과 눈맞아 붙어버렸다. 나아가 신의군의 매부 김경재도 장미를 초대해 잔치를 벌려 놀아났으니 궁녀치곤 바람기가 대단했다. <1435.5.14.세종17>

이 희대의 난잡한 장미스캔들은 9년간이나 입방아를 찧다가 (1444.5.29.세종26) 세종이 마침내 참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의금부에선 장미가 음탕짓을 하게 한 건 신의군과 김경재이니 장미와 같은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세종은 장미와 두 사람의 죄는 같지 않다고 장미만 참형에 처했다. 백성을 긍휼히 여겼던 세종도 왕족 감싸기란 이중성의 잣대를 어쩌질 못 했나 싶다.

 

현종때의 궁녀 귀열은 형부인 서리(書吏) 이중윤과 간통하여 임신까지 했다. 왕은 귀열을 내수사에 감금시키고 애를 낳자 부대시참형에 처해버린다. (1667.5.20. 현종8)

갓난애를 위한 100일 유예란 속대전의 법령도 무시해버린 것이다. 형부를 사랑한 죄로 참수 당한 비극의 여인-궁녀의 사랑은 애당초에 싻 틔울 수 없는 거였다. 헌데도 목숨을 걸고 사랑을 쫓은 걸 보면 사랑의 마력을 알 듯 말듯하게 한다.

궁녀 덕중의 슬픈 러브스토리도 예왼 아니다. 덕중은 수양대군의 애를 낳은 수양의 여인 이였다. 수양이 세조로 등극하자 후궁에 올랐는데 애가 죽자 수양의 발길도 뜸해지고, 가슴에 자식 묻은 상처로 괴로워하다가 환관 송중과 눈이 맞았다. 세조는 이를 모른척했다.

허나 덕중의 가슴은 넘 뜨거워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아들 귀성군에게 홀딱 반했다. 18세에 병조판서, 28세에 영의정까지 오른 귀성군이기에 덕중의 짝사랑은 환장할 지경 이였다. 덕중은 귀성군을 열렬히 사모하는 연애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를 시켜 전한다. 편지를 받은 귀성군이 아버지께 알리고, 아버지는 세조에게 고한다.

임금의 애까지 낳은 궁녀로부터 연서를 받은 의성군은 이를 임금께 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세조는 덕중을 방자로 한 단계 격하시켰을 뿐이다. 자신의 후궁이 조카에게 추태를 부렸다는 스캔들은 자신의 체면과 종실의 위엄만 손상시키는 노릇이어서 요란 떨고 싶질 안했던 것이다.

근데도 덕중의 의성군을 향한 짝사랑열정은 접질 못한다. 다시 환관 김중호를 통해 연서를 의성군에게 전했고, 의성군은 이를 아버지께 아버지는 세조께 고한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세조는 덕중을 교수형에 처하고, 편질 전한 환관 최호와 김중호를 궐 밖으로 끌어내어 때려죽였다.

한 여인의 무분별한 짝사랑에 애먼 환관 두 명이 맞아죽어야 했고, 의성군부자는 살얼음판 걸음걸이를 한 셈이다.

조선조 궁궐엔 궁녀가 230(인조때)에서 600(영조)정도 있었으며 연산군 땐 1000명이나 됐다고 했다. 그렇게 많은 궁녀가 평생 상대할 남자는 왕과 세자뿐이니 욕정을 참느라 얼마나 많은 한숨으로 구들장을 울렸겠는가.

왕이나 세자와 딱 한 번만이라도 잠자릴 같이하여 은총을 받는 건 궁녀의 소원 이였다. 출세가도에 입문한 거였다. 궁녀의 비극적인 삶, 어쩌다 피운 슬픈 사랑의 종말은 알면 알수록 우릴 처연케 한다. 그 많은 궁녀들이 사랑 한 번 못 해보고 세상을 떠야 했던 것이다.

2015.0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읽고-